법원으로 가는 이준석…‘정치력 부족 자인’ [옛날신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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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으로 가는 이준석…‘정치력 부족 자인’ [옛날신문보기]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2.08.13 15:5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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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김영삼 가처분 신청 주도자 역사에 흔적 없이 사라져
당 내 문제, 당 밖에서 해결은 모순…정치적 해결이 급선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비대위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과 관련해 1979년 신민당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시사오늘 김유종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비대위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과 관련해 1979년 신민당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시사오늘 김유종

국민의힘 내홍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국민의힘은 8월 9일 전국위원회와 의원총회를 잇달아 열고 주호영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을 확정했다. 이러자 이준석 대표는 10일 비대위 구성 절차에 하자가 있다며 서울남부지법에 효력 정치 가처분 신청을 냈다. 당권을 사이에 둔 세력 다툼이 법적 공방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이 대표의 행보에 국민의힘 내에서는 우려가 터져 나온다. 지지율 폭락으로 위기에 빠진 정부여당의 혼란이 더 커질뿐더러, 당이 분열되는 등 자칫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본인의 정치적 미래에도 득될 것이 없다는 충고도 들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1979년 신한민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사건이다.

1979년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은 김영삼의 등장을 못마땅해 했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신민당 전당대회는 이철승과 김영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철승 쪽의 세력이 더 컸다. 이철승은 차지철이 김태촌 등을 동원해 ‘김영삼 낙선 공작’을 벌인 1976년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당선되면서 세력을 넓힌 상황이었다. 박정희 역시 ‘중도통합론’을 제창하며 온건한 모습을 보인 이철승 쪽을 더 선호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전당대회 전날 밤, 중식당 ‘아서원’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사건이 판도를 뒤바꿨다. 이날 김영삼은 아서원에서 ‘민권의 밤’ 행사를 열고 마지막 세(勢) 몰이에 나섰는데, 이 자리에 김대중이 깜짝 등장한 것이다. 이때 김대중은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장기 가택연금을 당한 상태였다.

박정희 정권의 극심한 탄압으로 정치 활동은커녕 언론에서 이름 석 자를 찾아보기도 힘들었던 김대중이 나타나 필생의 라이벌 김영삼의 손을 잡자, 전당대회 판도는 출렁이기 시작했다. 결국 김영삼은 2차 투표 끝에 378 대 367의 근소한 차이로 이철승을 꺾고 신민당 당수 자리에 오른다.

선명야당과 민주회복을 강력히 주창해 온 김영삼 씨가 30일 신민당 당수로 당선, 신민당이 두 번째로 김영삼 시대를 맞음으로써 정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신민당은 이날 전당대회에서 지도체제를 최고위원 중심의 집단지도체제에서 총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 바꾼 뒤 총재선거를 실시, 2차 투표에서 김 씨를 총재로 선출했다.
이날 1차 투표에서 이철승 씨에게 뒤졌던 김 씨는 2차 투표에서 재석 751명 중 과반수선(376표)을 2표 넘는 378표를 얻어 367표를 획득한 라이벌 이철승 현 대표최고위원을 11표 차로 누르고 역전승, 만3년 만에 당수직에 복귀했다. (중략)
김영삼 신임 신민당 총재는 당선 직후 인사말에서 “오늘은 진실로 위대한 민권 승리의 날”이라면서 “아무리 험한 길을 가더라도 민주회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울 것을 맹세한다”고 말했다.
김 총재는 “나의 당수 도전은 이 정권에 굴복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하고 “오늘의 결과는 우리가 곧 여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며 정권 인수 준비가 되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후략)

1979년 5월 31일 <동아일보> 신민 새 총재 김영삼 씨

하지만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된 지 열흘 가량이 흐른 6월 9일. 신민당 서대문지구당 전(前) 부위원장이었던 조가연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조윤형 신민당 부총재와 김한수 전당대회 부의장의 당원 자격 유무에 대한 해석을 의뢰하면서 당내에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조가연은 “조윤형은 1974년 대통령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는데 형기 만료 6년이 경과하지 않았으므로 선거권이 없다”면서 “선거권이 없는 조윤형은 당원이 아니고, 당원이 아니면 당부총재 자격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자 선관위는 6월 26일 전체회의를 열고 조윤형과 김한수에겐 선거법상 정당원 자격이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놓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6일 하오 전체회의를 열고 신민당의 조윤형 부총재는 국회의원선거법 제14조3호 및 정당법 제17조에 의거, 당원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지구당위원장의 등록은 무효이고 신민당 부총재로서 직무행사도 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중앙선관위는 또 김한수 신민당 전당대회부의장도 상기 법조항에 따라 당원 자격이 없다고 유권해석했다.
선관위는 지난 5일 전 신민당 서대문지구당 부위원장 조가연 씨가 낸 ‘당원 자격에 관한 질의’에 대해 이 같은 유권해석을 내린 것이다.
선관위는 정당법 제17조에 의하면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는 자는 정당의 당원이 될 자격이 없으며 국회의원선거법 제14조3호에 의하면 선거범으로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종료된 후 6년을 경과하지 아니한 자는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다고 인용, 조 씨는 대통령선거법 위반 등의 죄로 징역 3년의 형을 선고받고 지난 76년 3월 2일 그 집행이 종료된 것으로 판명되어 국회의원 선거권이 없으므로 정당의 당원 자격이 없다고 밝혔다. (후략)

1979년 6월 27일 <경향신문> 선관위 해석 “신민 조윤형 김한수 씨, 당원자격 없다”

이러자 윤완중·유기준·조일환 등 신민당 원외 지구당위원장 3인은 중앙선관위의 유권해석을 근거로 8월 13일 서울민사지법에 총재단 집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다. 절차적 하자를 이유로 김영삼 당선을 무효화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신민당 당권 향방은 법원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9월 8일. 서울민사지법은 이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며 정운갑을 신민당 총재직무대행자로 선임한다.

서울민사지법합의16부(재판장 조언 부장판사, 김중곤-김동건 판사)는 8일 조일환·유기준·윤완중 씨 등 신민당 전 원외 지구당 위원장 3명이 낸 ‘김영삼총재등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에 대해 “총재선출결의 무효확인 등 본안 소송의 판결확정시까지 김영삼 씨는 신민당 총재의 직무집행을, 이민우·박영록·이기택·조윤형 씨는 부총재의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총재등 직무집행정지 가처분결정을 내리고 본안소송의 확정판결까지 정운갑 씨를 신민당의 총재직무대행자로 선임했다. (후략)

1979년 9월 9일 <조선일보> 법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김영삼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결정은 정치권력의 지시에 의한 조작극일뿐 아니라 헌정의 일익을 이루는 정당의 지도기능이 민사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서울민사지법의 결정은 야당을 말살하여 정권의 영구화를 기하려는 이 정권의 부도덕한 정치음모에 사법부가 하수인 노릇을 하여 이루어진 비극적인 소산으로 규정, 역사와 국민 앞에 고발, 규탄한다”며 사법부까지 겨냥했다.

문제는 분열이었다. 김영삼은 가처분 결정을 ‘정치권력에 의한 조작극’으로 규정하고 수용 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비주류는 비주류대로 정운갑을 새로운 총재로 추대했다. 당이 김영삼을 지지하는 쪽과 정운갑의 법적 정통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뉜 것이다. 이로써 신민당은 분당(分黨)을 향해 줄달음친다.

총재단직무정지 가처분파동에 휘말려 있는 신민당은 법원 결정 후 10일 만인 17일 법원에 의해 총재대행으로 선임된 정운갑 전당대회의장이 대행직을 수락하고 주류측이 과반수가 넘는 36명의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의원총회를 소집, 김영삼 총재의 법통 지지를 다짐함으로써 사실상 분당 상태에 들어갔다. (중략)
김 총재 측은 정 대행의 수락이 “분당의 신호탄이며 이제야말로 진짜 야당을 할 것이냐 법원 결정에 매달리는 야당을 할 것이냐를 선택할 시점에 왔다”고 말하고 있고 정 대행은 “누가 대행을 하든 분당하게 돼 있다. 소신대로 하겠다”고 맞서 있다. 정 대행은 “누가 뭐라고 해도 총재가 유고 상태이며 당이 비상사태인 만큼 당헌에 따라 수습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며 김 총재 측은 “총재는 국민과 당원의 지지로 뽑는 것이지 관리인을 관이 임명하면 야당은 끝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후략)

1979년 9월 17일 <동아일보> 정 대행체제 출범…신민, 분당 상태로

급기야 9월 26일에는 양측이 ‘세 대결’에 나섰다. 김영삼은 9월 25일 정운갑이 중앙선관위에 신민당 총재직무대행등록을 마치자 26일 42명의 김영삼 체제 지지 서명의원 명단을 발표하면서 실력대결에 들어갔다. 이로써 신민당원들의 눈앞에는 분열이라는 두 글자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분당의 위기를 맞았던 신민당이 다시 힘을 모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권 덕분이었다. 김영삼은 가처분신청이 인용된 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끊어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이를 본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인터뷰 내용이 “용공적인 이적행위이며 미국에 민주화 압력이라는 내정간섭을 요청하는 사대발언(事大發言)”이라면서 의원직 제명을 거론했다.

이에 둘로 나뉘었던 신민당은 10월 2일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김영삼에 대한 징계 움직임에 대해 힘을 모아 강력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실제로 이날 의원총회에는 67명 중 수감 중이었던 손주항 의원과 지방에 내려가 있었던 임종기·황병우 의원 등 3명을 제외한 64명 전원이 참석해 투쟁을 결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론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김영삼 제명이 신민당의 내분을 수습한 셈이었다.

다만 박정희 정권이 김영삼 총재 제명안을 처리하지 않았다거나, 10·26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신민당 사태는 결국 분당으로 끝났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당내 문제를 당 밖으로 끌고 가선 안 된다는 우려도 이 같은 역사적 교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법원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손을 들어주더라도 정치적으로 매듭을 짓지 못한다면 결국 당내 갈등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도 “사법부의 비대화를 비판하던 정치권이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법원 손을 빌리려 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며 “정치 발전을 위해서도 정치적 문제는 정치로 풀어내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이 대표를 향해서도 “당내 문제를 밖으로 끌고나가는 건 정치력 부족을 자인하는 것밖에 안 된다”면서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서라도 정치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게 옳은 길”이라고 충고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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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나그네 2022-08-13 20:49:19
김영삼은 76년 전당대회때 깡패들이 동원돼 당권을 이철승에게 넘겨줬지만, 법원은 안갔다. 절치부심 79년 당권을 찾아옴. 법원 찾는건 "나 정치력 없소이다"를 인정하는 꼴

어이가 없네 2022-08-13 18:28:51
구태를 바꾸려고 나온 정치인을 없애려고 구태들이 가처분신청 건 거랑, 구태를 바꾸려고 가처분신청 거는 거랑 동급으로 보는 건가ㅋㅋ Ys가 무덤에서 울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