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죽음의 진실⑤>윤재걸, ˝장준하 죽음은 정치적 모살이다˝
<장준하 죽음의 진실⑤>윤재걸, ˝장준하 죽음은 정치적 모살이다˝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2.09.13 1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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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의문사 최초 보도한 기자의 육성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시사오늘
장준하 의문사를 최초로 다룬 이는 윤재걸(1947년생) 전 동아일보기자다. 다방면의 취재를 거쳐 르포와 인물기행 형식으로 쓴 <장준하, 그 의문의 죽음>은 1985년<신동아>에 게재됐다. 이후 1993년 윤 기자의 기사를 참조한 SBS<그것이 알고 싶다>는 추가 의문점들을 덧붙여 방송,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낳았다.

윤 기자는 전두환 정권 시절 5·18 광주 민주항쟁 취재 건으로 4년간 해직된 적이 있다. 그가 장준하 의문사에 관심을 두게 된 건 1984년 4월 복직된 후였다. 참고로 이번에 알게 된 건데, 광주민주화항쟁을 함축하는 (영화제목이기도 한) ‘화려한 휴가’라는 말을 처음 쓴 이가 윤 기자였던 것.

또한, 흔히들 장준하 선생을 ‘재야의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이 표현 역시 윤 기자가 처음 썼다. 장준하 의문사에 대한 이런저런 궁금한 마음에 지난 9일 통화를 시도했다. 윤 기자는 근래 전라남도 해남에 있다고 한다.

그의 일상은 낚시와 술 그리고 시 창작, 정치인물평전 집필 시간 등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기자직에서 물러난 뒤 현 한국정치인물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편의상 윤재걸 기자로 쓴다. 故 장준하 선생과 故 박정희 전 대통령 경우도 장준하 박정희로 지칭했다.

- 장준하 의문사를 취재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1985년 남 모 국장이 출판국장 할 때였어요. 1980년 광주항쟁 때문에 해직됐다가 복직한 지 얼마 안 된 때였어요. 하루는 남 모 국장이, 출판국장인데 어느 날 아침에 저를 불러요. 차 한잔 하자고. ‘무슨 일입니까’, ‘어젯밤에 말이야, 아무개랑 급히 술 한 잔 먹었는데 장준하 선생이 모살됐다는 소문이…, 장 선생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하는데 윤 기자는 어떻게 생각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이미 그런 의문을 제기하고, 상당히 진전된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랬더니…‘윤 기자, 그래? 기사 쓸 수 있겠어?’, ‘한 달은 있어야죠.’ 그렇게 해서 시작하게 된 거죠."

ⓒ시사오늘(사진 제공=윤재걸 전 동아일보기자)
“동아일보 숨은 자료 들춰 현장 취재”

윤 기자는 장준하 의문사를 최초로 기사화한 것은 본인이지만 그렇다고 최초 취재를 한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 모 보도국장이란 분이 있어요. 그에게 동아일보 사회부에 취재 자료가 있다는 귀띔도 받고….

송석현 기자라고 우리 선배인데, SBS 보도국장도 하시고 방송 선배인데 (암튼) 동아일보 자료실 가봤더니 그분이 취재한 자료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최초 취재를 한 건 아닌 셈이죠.

장준하 선생 사건이 1975년 사건인데 (당시) 10년도 더 지났는데, 아무도 그거에 대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누구도 그 자료를 기사화하지 못했어요. (사이) 무서워서…

이런 자료가 있으면서 선배들이 취재도 했으면서 쓰지를 못했다는 게 안타까운 거예요. 이런 이유로 동아일보에 보관된 숨은 자료를 들춰내서 현장을 취재하러 간 겁니다.

그래서 정 모 사진기자랑 약사봉까지 같이 갔어요. 현장을 확인했는데 나무들이 엄청나게 많고 사람이 가지를 못해요. 그렇게 현장을 확인하고 오니까 아까 말한 김 모 국장이 ‘우리 윤 기자가 할 수 있겠어?’라고 말해서 ‘아니 기자가 왜 이런 걸 못 합니까’라고 했지요.’”

“박정희와 장준하 불화의 뿌리”

윤 기자의 취재 방법은 다시 역취재 하는 거였다. 그는 재야의 백기완 선생 등 관련된 분들을 두루 만나러 다녔다. 그러고는 박정희 정권이 그를 왜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풀었다고 한다.

“장준하와 박정희는 일제강점기부터 적입니다. 일제가 패망하니까 박정희는 만주 항일독립군 소속 장준하 사단으로 들어갔어요. 몸을 숨기려고.”

여기서 잠깐 설명을 덧붙이는 의미로 윤 기자가 <신동아>에 썼던 해외자료를 토대로 ‘박과 장의 불화의 뿌리’를 설명한 대목을 옮겨본다.

『…1945년 7월 일본군 중위로 진급한 박정희는 자신이 소속된 제8연대가 영안으로 이동한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무장해제를 당해야만 했다…이 무렵 북경에 주둔하고 있던 광복군 제3지대를 찾아간 그는 급한 대로 광복군 조직에 가담했는데 얼마 후 박은 전투경험을 인정받아 광복군 제1중대장이 되었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이미 훨씬 전부터 학도병을 탈출하여 광복군 간부로 있던 장준하와 박이 만나게 됐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장은 박에게 몇 가지 점을 들어 호되게 힐난했는데, 첫째는 박이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자진해서 일본군을 탈출하지 않은 점, 둘째는 만약 일본이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 승승장구의 기세로 나아갔다면 박은 창씨개명한 일본군 장교로서 여전히 한국 독립투사를 잡아 학살했을 것이라는 점, 셋째는 이 같은 연유에서 당시 박은 기회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박과 장의 불화는 이렇게 해서 이미 18년에 달하는 뿌리 깊은 내력을 지니고 있으며…』<신동아 5월호/윤재걸 장준하, 그 의문의 죽음 中>

ⓒ시사오늘(사진 제공=장준하기념사업회)
“월간조선은 김용환 옹호”

-그런데 <월간조선>에서는 ‘박정희는 장준하를 만난 적이 없다’ 이런 식으로 반박했던데요.

“허허…,그때 당시 신동아와 월간조선 취재수준 차이는 국민학생(초등학생)과 대학생 수준이에요. 월간조선은 80년에 조갑제 등을 스카우트해서 만든 거라, 초기만 해도 취재자료나 취재경험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고 신동아에서 이슈를 제공하거나 문제를 제시하면 무조건 거기에 따라오는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신동아가 히트를 하면 뒷이야기 치기에 급급했어요. 물론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암튼) 제가 <말> 지에 월간조선에 대해 ‘장준하 선생의 의문의 죽음을 희석하기 위해 김용환을 옹호하듯 쓴 것 같다’며 반박 글을 쓴 게 있어요. 나중에 그거 찾아봐서 읽어봐요.”

얘기는 다시 ‘장준하와 박정희’로 돌아왔다. 윤 기자는 장준하 전집 <돌베개>에 나온 내용을 취재하면서 ‘왜 박정희가 장준하를 그렇게 증오하고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의문의 실타래를 풀어갈 수 있다고 했다.

“장준하는 ‘누구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까. 그러나 박정희만은 절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이였어요. 이게 뭐냐면 박정희는 매국노고 친일주의자다, 일본이 패망하니까 장준하 밑의 독립군 부대에 들어와 거기 은신해 살아남은 놈이다, 그런 놈이기 때문에 절대 대통령 될 수 없는 놈이다! 근데 그것이 박정희의 자존심을 가장 상하게 한 거예요.”

“이념의 양극화로 다뤄서는 안 돼”

그런데 윤 기자는 37년이 지난 지금, 장준하 사건이 정치적 이슈로 떠오른 것에 “참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75년 당시만 해도 전 국민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정치적 모살”이라고 수군댈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묘한 양상을 치닫고 있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는 것.

“그때만 해도 이념의 양극화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었거든. 지금은 이념의 양극화로 되다 보니까 윤재걸이 좌파 언론인 몇 등 안에 들어가요. 70년대는 좌우 이념이 양극화되지 않았어요. 제가 장준하 사건을 다루던 1985년 때만 해도 이념의 양극화는 없었어요.

ⓒ시사오늘(사진 제공=장준하기념사업회)
민주화와 민족화 민주통일 독재 이런 화두가 있었던 건데, 지금은 이념의 장소로 변질됐어요. 좌냐, 우냐에 따라 학생운동도 다르게 보고 3․1절도 다르게 보고, 8·15 광복절도 다르게 보고…이념의 양극화 되다 보니까 옳고 그름에 앞서서 모든 걸 이념의 잣대로 파악하는 거예요. ‘윤재걸, 저놈은 좌파니까 장준하 사건을 터뜨린 거다’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 그는 약간 화가 난 듯했다.

“박정희 정권 시대는 독재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나뉘었어요. 근데 지금은 박정희를 지지하는 우파 세력들은 장준하 사건을 좌파 세력들이 만들어낸 조작사건이라고 보는 거예요. 저는 한심스러운 거예요. 대꾸할 가치도 없는 겁니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어요.”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최근 장준하 사건 관련, 박 정권에 의한 암살이라고 믿는 이들은 천벌 받을 것이라며 힐난했다. 조 전 대표와 친구 사이였던 윤 기자는 이런 그의 모습에 쓴소리를 던졌다.

“박정희를 옹호하기 위해 우파와 좌파로 분류한 사기꾼들이에요. 기자가 아니에요. 조갑제한테 제가 뭐라고 했느냐면 ‘너 어째 사람이 그러냐. 너 마당 잡지 편집장하고 나랑 같이 해직되었을 때 그렇게 친했는데….’저는 사실 다혈질적인 편입니다.

기자가 다혈질은 안 좋은데 그자는 아주 냉철한 기자 중의 기자, 선택과 집중을 잘하는 대표적인 기자상이었어요. 그런 자가 나중에 보니까 이념의 전도사가 된 거예요. 제가 모순을 느끼고 제가 존경했던 기자인데 말이죠. (사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요.”

윤 대표는 그러면서 기자는 우도 좌도 아니라고 했다. 엄밀히 말하면 중도좌파 중도우파, 그 경계를 지킬 존재가 기자라고 했다.

그는 옳은 소리만 한 외길을 걸어온 터라 국가보안법에 네 번 걸릴 정도로 위험한 고비가 많았다. 현재는 고문 때문에 척추가 손실돼 가방 같은 것은 들 수 없고 직립보행만 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간 팩트에 살고 팩트에 죽는 기자정신이라는 점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는 인생이었다. 때문에 극좌파로 몰아세우는 작금의 상황이 더욱 불쾌한 이유다.

“제가 좌파입니까. 저는 좌파가 아니에요. 굳이 따지자면 기자는 현실타파, 미래지향적이니까 애초부터 중도 좌파, 혹은 중도우파쯤은 돼요. 제가 민주화에 앞장섰듯이 현실비판을 하잖아요. 극좌나 극우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 등에서 장준하 선생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그 당시의 현실과 상황, 사실을 왜곡하는 거예요.

37년 지났다고 장준하 실체를 덮어씌우려는 거예요. 그때는 모든 언론, 국민이 남모르게 ‘정치적 모살이다, 박정희가 자기의 걸림돌이니까 죽였다’ 이렇게 생각했다, 이겁니다. (사이) 박정희가 죽인 사람이 누구냐면 정인숙 사건이라고 있어요.”

ⓒ시사오늘(사진 제공=윤재걸 전 동아일보기자)
“박정희가 ‘이 죽일 년’하면…”

제3공화국 때 일어난 정인숙 암살사건은 의문사로, 고급 요정 소속 정인숙이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에 의해 죽은 걸 말한다.

“정인숙은 당시 비서실장이 죽였는데, 박정희는 절대 죽이라고 말 안 해요. ‘이런 죽일 년, 이런 죽일 년이, 이런 죽일 년이 있나’ 세 번 외치면 이를 듣고 죽이는 거예요. 박정희가 그 정도로 영특한 이입니다.”
그의 말인즉슨, 장준하 의문사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암살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 장준하 선생님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장준하 선생은 민족주의자입니다. 백기완 선생이 어떤 말을 했느냐면…, 7․4 남북 공동성명서 있었잖아요? 백기완 선생이 하루는 장준하 선생을 찾아가서 ‘선생님, 박정희 김일성 두 사람이 사기 치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은 거예요.

그랬더니 장준하가 뭐라고 그런 줄 알아요? ‘사기 치든 어쨌든 간에 통일은 아름다운 것이다. 박정희가 그렇게 해서 통일한다면 우리는 박정희를 도와줘야 한다’라고 얘기했을 정도예요. 물론 나중에 사기 친 것을 알고 엄청나게 화를 낸 걸로 알지만, 장 선생은 이처럼 박정희의 7.4 남북공동성명 초창기 때는 찬성을 했어요. 반대했다는 소리는 없어요. 백기완 선생 말대로 장 선생은 통일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바쳐야 할 지고지순의 과제로 여긴 분입니다.”

“거사를 앞두고 의문사한 재야의 대통령”

윤 기자는 장준하 선생이 왜 재야의 대통령인지를 알 수 있는 일화를 들려줬다.

“예전에 ‘재야의 대통령 장준하’라고 르포를 쓴 적이 있어요. 왜 재야의 대통령이냐면 장준하가 박정희를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면서 윤보선, 김대중, 김영삼 등 재야인사 7명을 모이게 하고서는 장준하가 재야 7인회 회의를 주도했어요. 카리스마가 김대중, 김영삼하고 달라요. 독립운동으로 일궈낸 돌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한마디 하면 엄청난 카리스마가 있어요. 윤보선도 장준하에 대해 함부로 말을 못해요. 티끌만큼의 거짓과 티끌만큼의 굴절된 것이 없어요. 암튼 장준하가 국민의 당을 만들고 당수가 되고 하니까, 그때부터 박정희의 눈엣가시가 된 거예요.”

ⓒ시사오늘(사진 제공=윤재걸 전 동아일보기자)
그는 장준하 선생을 주제로 <옥중출마 아무나 하나>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이 대목에서도 박정희 정권 당시 장 선생의 존재감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장준하가 동대문을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전의 일인데, 박정희가 허위사실유포죄로 장준하를 옥에 가뒀어요. 그런데 장준하가 옥중에서도 출마한 거예요. 당시 장준하는 국민의 참뜻을 묻고자 한 거죠. 그래서 제가 <옥중출마 아무나 하나>라는 기사를 썼지요. (웃음)

어찌 보면 죄인이 출마한 셈인데, 결국 장준하가 당선된 거예요. 이게 뭘 의미했겠어요. ‘박정희, 네가 틀렸다’, 박 전 대통령 역시 국민의 열렬한 지지때문에 한 달 만에 바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죠. 이처럼 장준하 선생은 끝까지 굽힘이 없었어요. 70년대 당시, 그는 재야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전국민주화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어요. 등산이라는 명목으로 제주도부터 광주 등 한반도 백두대간 곳곳 주요 인물들을 일일이 다 만났어요. (사이) 그게 바로 75년 8월 20일 장 선생이 하려고 했던 거사였습니다.”

8월 20일 되기 3일 전 장준하 선생은 경기 포천 약사봉을 등반하다 의문사했다.

“이 사건은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을 알지 못하면 이해를 못 해요. 지금같이 이념의 양극화로 보면 해결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한편 윤재걸 기자가 쓴 <장준하, 그 의문의 죽음> 서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장 선생은 문제의 사고 현장에 아예 가지 않으셨는지도 모른다. 여러 사실을 종합해 볼 경우, 추락사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락사를 가장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위치로 옮겨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시사오늘
장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오호,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 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이 맨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뿌리 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옮겨 증언하라.

돌아가신 날 1975.8.17
비를 세운 날 1975.9.17
고 장준하 선생 추모동지 일동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험준한 약사골 한 켠에 세워진 시 비문의 전문이다. 올해로 10주기를 맞기까지 매년 장준하가 숨진 8월17일이면 고인을 추모하는 많은 인사와 젊은이들은 의문의 현장인 이곳 약사골 계곡을 찾아 고인이 평소 지녔던 뜻을 되새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무심코 흘려버릴 수 없는 것은 사건 현장에 세워진 비문 중의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이라는 대목이다. 생전에 그를 따르던 많은 인사들과 젊은이들은 10년 세월이 지난 요즘에도 “선생의 죽음은 결코 단순 실족사가 아니다”라고 거듭 주장하면서, “언젠가는 선생님의 원통한 죽음이 세상에 밝혀질 날이 꼭 오고야 말 것”이라고 ‘의문의 변사’임을 암암리에 시사하고 있다. -1985년 <신동아>에 수록된 윤재걸 기자의 <장준하, 그 의문의 죽음>중에서-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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