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느냐고 묻거든 [일상스케치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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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느냐고 묻거든 [일상스케치㊿]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08.28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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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아서 헤매다
왜 사느냐고? '그저 웃지요'
어떻게 사느냐가 인생 과제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알알이 맺힌 가을. ⓒ연합뉴스
알알이 맺힌 가을. ⓒ연합뉴스

바람의 서늘함이 계절의 변화를 직감케 한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 했던가. 치르치르 치르르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깊은 성찰의 시간을 맞았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생각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또는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문득 불안과 허무, 고독을 느낌과 동시에 떠오르는 질문,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롭게 살고 있다. 의학의 발달로 인류의 수명은 두 배가 넘게 증가했으며 질병 또한 더 치료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하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정작 본인 삶의 의미는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 같다.

내 허무의 정체

회상해 보면 학창시절 나 역시 유난히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집착했다. 심지어는 허무주의에 빠져서 왜 사는 걸까 하는 의문이 날 계속 따라다녔다.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시간만 나면 서점에 가서 그와 관련한 서적을 뒤적였다.

눈에 띄는 제목이 있어 자연스레 손끝이 가 닿았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생의 한가운데'  등 루이제 린저의 저서였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내가 만족할 만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몇 권의 책으로 답을 얻을 수 있는 테마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평생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는 화두임엔 틀림없다.

다만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정체모를 내 허무의 실체를 알게 됐다. 그건 바로 상실감에서 비롯된 거였다. 아주 오래전 내 삶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가슴 맨바닥 깊숙이 들어있던 상처가 원인이었다.

생애 첫 기억, 내 나이 대여섯쯤 됐을까. 바로 밑 남동생과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이랑 둘러앉아 놀던 모습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건너뛰어 어느 병원 마당 평상에 혼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그날, 날씨가 유난히 화창해 하늘에 티끌 한조각도 없는 듯 청명했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쾌청한 날씨 아래 날아든 비보, 어린 동생이 치료받던 중 끝내 숨을 거뒀다. 삶이란 때론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밝을 때도 어두울 때도 있다. 다양한 색채로 물들이며 흘러간다. 그런데 소중한 대상과의 이별만큼 애통하고 깊은 슬픔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난 어릴 때부터 화창한 날씨에 저 멀리 아지랑이가 보이면 짙은 상실감과 공허감에 빠졌다. 성장해서도 한 번씩 밀려들던 알 수 없던 허무의 실체가 무엇일까 했는데 나중에서야 답을 찾았다. 가슴 한켠에 자리를 차지한 채 잿빛으로 머물렀던 동생과의 짧은 만남, 영원한 이별의 상처였다.

로고스(logos, 의미)

빅터 프랭클. ⓒ구글 위키백과
빅터 프랭클. ⓒ구글 위키백과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철학자들은 어떤 해답을 얻었을까. 나치 유태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정신의학자이자 철학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1905~1997)은 고통 속에서도 로고스(logos, 의미)를 연구하고  실제 적용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반유대주의가 휘몰아치며 부모와 그리고 아내마저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하고 그는 홀로 살아 남았다. 전쟁이 끝나고 종합병원의 신경과장이 된 프랭클은 홀로코스트 지옥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 생존한 체험과 관찰을 『인간의 의미 탐색(Man’s Search for Meaning)』(1946년)으로 발간했다. 책은 삶의 근본적인 동기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라는 프랭클의 믿음을 담았다.

프로이트가 쾌락에의 의지를, 애들러가 권력에의 의지를 삶의 동인(動因)으로 본 것과 달랐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애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 학파인 로고테라피 학파의 시발이었다. 극심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난 프랭클의 놀라운 회복력을 담은 체험 고백서는 로고테라피(의미치료) 효과의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프랭클은 이 빼어난 업적에서 실존적 정신의학의 원칙을 제시했다. 인간이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 존재의 근본이라는 것. 만일 그 의미를 못 찾으면 사람들은 공허함을 권력, 물질주의, 신경증적 집착과 강박으로 채운다는 논리다.

따라서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무언가 창작하거나 행위를 취함으로써, 누구와 접촉하거나 무언가를 경험함으로써,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고난에 맞서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라고.

당대 철학자들 설파

‘시지프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광채 없는 삶에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광채 있는 삶을 갈망하는 순간이 오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돌려받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리고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순간이여! 멈추어라”고 했다. 순간에서 영원을 발견하면 그 순간은 영원이 되며, 덧없는 삶에서 불후의 삶을 생성하면 인생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이러한 아름다운 순간,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기억을 많이 거느린 삶이라는 뜻이다.

밑바닥을 경험하거나 죽음의 언저리까지 다다라서 많은 것을 내려놓다 보면 작은 것의 아름다움, 보잘것없음에서 의미를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이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부족함을 알고 매달릴 존재 즉, 자신이 믿는 종교에 따라 신을 찾고 의사나 이웃을 찾는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완전히 부서진 다음에야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삶에는 기쁨의 크기만큼 고통이 늘 따른다. 삶을 유지하는 일은 꽤나 힘들다. 매 순간 먹을거리를 찾아야 하고, 각종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괴로움에도 마지막이 있다는 생각이 종종 삶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스티브 잡스는 죽음이 삶을 새롭게 하고, 또 죽음을 염두에 두면 삶의 잔가지들이 떨어져 나가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는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다른 모든 갈매기는 오직 먹이 구하는 일에만 급급한 데 반해 주인공 '조나단'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날고, 오래 날 수 있을까에 골몰하며 비상 훈련을 더 열심히 한다.

'조나단'은 먼 벼랑으로 쫓겨나면서 이렇게 한 맺힌 절규를 했다 "삶을 위한 의미와 더 높은 목적을 찾고 추구하는 갈매기보다 더 책임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조나단'의 가슴 저미는 이 부르짖음처럼 우리의 삶도 그저 단순히 먹고사는 것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이에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는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까?’와 같은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의문에 다시한번 휩싸이게 된다.
 
은퇴후 인생이막을 맞은 이들은 무엇을 지향하며 추구해야 할까.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는 신간 '아직 긴 인생이 남았습니다'에서 정년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답을 제시했다.
 
미국의 문학가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노년을 황혼이 진 뒤의 하늘에 비유했다. “저녁 황혼이 사라지면 하늘엔 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는 노년을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본연의 자신을 찾아가는 기회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밤이 오면 일과가 끝났다고 생각해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반면에 밤하늘을 들여다본 사람은 자신을 기다리는 수없이 많은 별(기회)을 발견하게 된다.

소이부답 심자한

한편,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왜 사느냐'라는 질문을 불쑥 받았을 때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선뜻 응답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소이부답 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 “빙그레 웃고 대답은 않으니 내 마음 스스로 한가하다”라는 한 마디, 중국 시성(詩聖)의 명언이다.

어떤 스님은 "왜 사느냐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굳이 묻지 마시게, 사람 사는 일에 무슨 법칙이 있고 삶에 무슨 공식이라도 있다던가, 그냥 세상이 좋으니 순응하며 사는 것이지" 한다.

사실 ‘왜 사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사느냐’가 올바른 명제가 아닐까. 그럼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하게 사는 길인가. 움켜쥐고 있던 자기를 내려놓고, 그냥 가볍게 살면 그것이 진정 행복한 인생인 걸까. 그러니 어느 시인이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라고 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사람은 더 불행하고 실패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의미를 추구하고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고자 하면 즐겁고 건강하고 행복한 방향으로 이끈다. 그렇다고 의미 있는 삶이 덧없이 하루를 흘려보내지 않고 인생을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일까. 정답은 없다. 개개인 각자가 선택할 뿐이다.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월파 김 상용-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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