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회담, 정국경색 풀 해법일까 [옛날신문보기]
스크롤 이동 상태바
영수회담, 정국경색 풀 해법일까 [옛날신문보기]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2.09.01 11: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주당 이재명 신임 당대표, 尹 대통령에 영수회담 거듭 제안
전두환-김영삼, 6월 항쟁 이후 진행…다수 회담 가졌던 YS-DJ
盧 ‘당·정·청 분리’ 강조하며 피해…朴·文 정부선 다자회담 위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 시사오늘 김유종 기자
영수회담은 국가나 정치 단체 등의 우두머리가 만나 의제를 갖고 말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시사오늘>은 과거 영수회담 내용을 살펴봤다. ⓒ 시사오늘 김유종 기자

지난달 28일 이재명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신임 당 대표로 선출됐다. 이 대표는 당 대표 수락 연설문에서 “국민의 삶이 반보라도 전진할 수 있다면 먼저 정부여당에 협력하겠다”며 “영수회담을 요청해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 모두발언에서도 “민생 앞에 여야와 정쟁이 있을 수 있겠냐”며 “가능하면 적절한 견제 속에서 협력하고 ‘국민 우선, 민생 제일’이라는 원칙 아래 협력할 길을 찾아주시길 당부드린다”며 영수회담을 재차 거론했다. 

영수회담은 국가나 정치 단체 등의 우두머리가 만나 의제를 갖고 말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국내 정치권에서는 통상적으로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만남을 가리킨다. 과거 정부 수장이 정치적 난국에 처할 때 야당 총재와 회담하여 국정을 풀어가는 것이 관습이 있었다. 회담을 통해 정치적 혼란을 해소할 수도, 정국 경색이 되려 심화된 적도 있었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이준석 전 대표의 ‘당원권 6개월 정지’ 징계 결정에 이어, 비대위 전환, 법원의 비대위 전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일부 인용 등 사태로 혼란 상황을 맞은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이재명 대표와의 통화에서 “당이 안정되면 가까운 시일 내에 여야 당 대표님들과 좋은 자리 만들어 모시겠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사오늘>은 정국돌파의 상수가 될 수 있을지 지난 정권의 영수회담을 모아봤다.

 

1975년 YS-박정희·1987년 6월 항쟁 이후 YS-전두환 회담까지
DJ-이회창, 약사법 개정·남북정상회담 등 중요 사안 논의
盧 정부서 ‘영수회담’ 현저히 줄어…朴, 일대일 아닌 3자·5자회담


1975년 5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와 박정희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가졌다. 회담 직전이었던 2월, 조윤형·최형우·김상현 등 8대 국회의원 13명이 유신 직후 보부 등에 끌려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했는데, 신민당은 YS를 중심으로 ‘고문정치의 종식을 위한 선언’을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은 △유언비어의 날조·유포 및 사실의 왜곡·전파행위 금지 △집회·시위·정치 관여행위 금지 △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선포하는 행위 금지 등 내용이 담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크메르 정부군과 월남이 공산군에 함락되는 등 국제 상황이 여의치 않자 YS는 박정희에게 회담을 제안한다. YS는 박정희 서거 전, 회담내용을 일체 알리지 않았다가 후에 회고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밝힌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는 창밖의 새를 가리키며 ‘김 총재,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하고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박정희에게 ‘민주주의 하자, 대통령 직선제 하자’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박정희는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 사람은 공산당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데서 오래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박정희는 ‘김 총재,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내가 정권을 내려놓는다고 하면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일단 진심으로 믿어보기로 했다.” (중략) 

“박정희가 울지만 않았으면, 나는 ‘그럼 언제 할 거냐’고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물 때문에 추궁하려던 나의 마음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꼭 민주주의 하겠다’는 박정희의 말은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중 일부

영수회담 이후 <동아일보> 광고 탄압이 중지됐고, 조윤형·김상현·김한수 의원 등은 석방됐다.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잇따른 사망으로 국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던 1987년 6월엔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으로 퍼졌다. 정부가 시위 진압을 위해 군 투입을 고려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권복경 전 치안본부장은 2013년 <동아일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시위대가 부산 거리를 가득 메우자 군을 투입해 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나라가 뒤집힐 수 있는 결정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해 6월 24일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영수회담이 진행된다. 영수회담에 자리에 함께 간 김태룡 대한민국헌정회 이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6월 항쟁이 벌어졌는데, 20일이 지나가도 전두환이가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는 거예요. 6월 25일, 26일 전국 대대적 시위가 일어나게 돼 있었어요. 그리되면 제2의 부마사태, 계엄이 선포될 우려가 있었어요. 이걸 막기 위해서 우리가 한 게 뭐냐. 영수회담 제안이었어요. 전두환이도 급하니까 딱 받더라고. 자기도 몸이 단 거지. 부마사태가 난 뒤 열흘 만에 박정희가 죽었잖아요. 위협을 느끼니까 수락한 거야.”

- 2021년 4월 19일, 김태룡 민추협 상임운영위원 인터뷰 

다음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다. 6월 29일엔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선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 

ⓒ 연합뉴스
1997년 열린 여야 영수회담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문민정부 4년 차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만났다. 양김은 4자 회담, 부정선거, 비자금 문제, 중소기업 정책, 물가 안정, 지역감정 등 다양한 사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대화 정치’를 열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과거 경쟁관계에 놓였지만, 민주화를 위해 함께 힘써온 동지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국민의정부에선 대부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만남으로 영수회담이 이뤄졌다. 이회창 총재는 당시 회담에 가져갈 의제를 철저히 준비해 간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정상회담, 약사법 개정 등 국가적 의제를 논의해 여야가 건설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씨앗이 됐다. 

건전한 의회정치를 발전시켜 나가기위해 국회에 가칭 미래 전략위원회(국가비전·발전전략수립)와 여야정치협의체(총선공약사항중 공통사항 실천)를 구성키로했다. 

두 사람은 또 생산적인 정치발전을 위해 국회에 정치개혁특위를 구성해 정치개혁을 조속히 이룩하고, 인권법과 통신비밀보호법, 금융실명제법, 부패방지 관련법 등 개혁입법이 조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공동 노력하기로 했다. 

-2000년 4월 25일 <한국경제> ‘남북회담 超黨的 협력…金대통령-李총재, 정치협의체 등 11개항 합의’

지난 24일 전격적으로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간 영수회담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상생의 정치”를 본격화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날 회담에서 여야 영수는 빠른 시일내에 약사법을 개정키로 합의, 의료계의 폐업사태를 진정시킴으로써 여야간 대화와 타협만이 꼬인 정국을 풀 유일한 길임을 보여줬다.

이 총재의 전격적인 제의로 이뤄진 영수회담에서 김 대통령과 이 총재는 각자의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한발짝씩 양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 게임”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 2000년 6월 25일 <한국경제> ‘[전격회동 안팎] 與野영수 相生정치로 약사法처리’

ⓒ 연합뉴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2005년 청와대에서 열린 영수회담에서 자리에 앉기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초 “나는 행정부의 수장이지 여당 영수가 아니다”라며 당정분리를 강조했다. ‘여야 영수회담’ 형식의 대화도 피해 갔다. 그러다 재임 후반기인 2005년 9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진행한다. 당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론’을 명분상 우위에 뒀다. 박근혜 대표는 주로 노무현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정·청 분리’를 강조하면서도 대연정 제안과 인터넷 ‘서신정치’ 등으로 정치권을 한바탕 뒤흔들어놓았다. (중략) 

대연정 드라이브는 언론사 편집·보도국장을 비롯한 언론인들과의 연쇄 간담회 등을 통해 간단없이 계속됐다. 인터넷 공간을 통한 서신정치는 연정론뿐 아니라 ‘행정수도 건설을 결심하게 된 사연’ ‘국방장관 해임건의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등으로 이어졌다.

정작 상대인 한나라당은 대연정을 “낮은 지지율의 수세국면을 뒤엎기 위한 권모술수”로 치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끈질긴 ‘구애’ 끝에 9월 박근혜 대표가 노대통령과 청와대 담판을 가졌지만 경제상황 인식, 지역구도 극복방안 등에서 물과 기름 같은 인식의 간극을 드러냈다. “안 하니만 못한 영수회담”이었다. 연정론은 결국 노대통령에게 생채기만 남긴 채 사그라들어갔다.

- 2005년 12월 29일 <경향신문> ‘大연정…X파일… 국회 파행으로 ‘終’’

이명박 정부에선 2008년 5월과 9월, 2011년 6월 세 번에 걸쳐 영수회담이 이뤄졌다. MB 정부 임기 초 소고기 파동이 일어났다. 2008년 5월, 손학규 당시 통합민주당 대표는 소고기 수입 문제와 인사, 재벌 위주 경제정책, 대운하, 남죽 정상회담 인정 등의 여러 국정 사안을 대화 테이블에 올렸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같은 해 9월에 이명박 대통령과 정세균 당시 통합민주당 대표와의 회동이 있었다. 양측은 경제 위기 극복, 남북 관계 발전 등 주요 사안 7개항에 합의했다. 여야간 초당적 협력의 틀을 만들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지만, 회동 자체보다 구체적 실천 여부에 달렸다는 평가가 있었다. 금융위기 대처, 경제 살리기 등에 합의는 봤으나 종합부동산세 개편,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주동자에 대한 보복성 수사 중단, 교과서 수정 문제, 언론 문제 등 쟁점에는 견해차를 보였다. 3년 뒤 회담이 한차례 더 이뤄졌지만 ‘성과 없는 공허한 회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근혜 정권에선 3자 회담이나 5자 회담 등은 실시됐으나 일대일 영수회담은 한차례도 없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직전이었던 2016년 11월, 추미애 당시 민주당 대표가 여론 수렴 과정 없이 청와대와의 ‘영수회담’에 합의해 거센 반대에 부딪친 일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는 취임 초부터 “영수회담은 권위주의적인 정부 시대의 산물”이라며 “내가 당 대표를 하는 한 영수회담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남북정상회담을 약 2주 앞두고 영수회담을 가졌다. 홍 대표는 “남북 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핵폐기회담이 돼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한미 동맹을 강화시키는 조치를 해주길 바란다” 등의 입장을 밝혔다. 회담에선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임명 철회 △정치보복 수사 중단 △지방선거 중립 △홍장표 경제수석 비서관 해임 요청 등이 논의됐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