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 “시대정신은 공정…尹정부 당면 과제, 사회적 사다리 놓는 것” [풀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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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 “시대정신은 공정…尹정부 당면 과제, 사회적 사다리 놓는 것” [풀인터뷰]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2.09.06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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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 변호사 (공익사단법인 공정세상연구소 소장)
“돈 장사하는 판결, 기득권 세습 잔치 로스쿨”
“입시와 로스쿨 조금 바꿔도 한결 나아질 것”
“尹 대통령과 닮았다?… 분투하는 모습 짠해”
“일찌감치 윤석열 정부 예견, 앞으로 잘 될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신평 변호사는 공정 시대가 시대정신이라고 강조해 왔다. 사진은 지난 7월 서울서 그의 용산 사무실에서 신 변호사가 시사오늘과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신평 변호사는 공정 시대가 시대정신이라고 강조해 왔다. 사진은 지난 7월 서울서 그의 용산 사무실에서 신 변호사가 시사오늘과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신평 변호사(공익사단법인 공정세상연구소 소장)가 꼽은 시대정신은 ‘공정’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국민은 광복을 염원했다. 한국전쟁 전후는 폐허를 딛고 무너진 삶을 재건하는 게 목표였다. 1960년대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로 대표됐다.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시절을 견디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경제성장이라는 시대정신은 대한민국의 집약적 발전을 추동했다. 밥 문제가 해결돼 갔다. 자식들 대학도 보낼 수 있게 됐다. 산업화를 일궈냈다. 

1970~80년대 저변으로 민주화 열망이 가득했다. 독재가 장기화되자 부마항쟁이, 서울의 봄을 앗아가자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타는 목마름은 6월 항쟁을 불러왔다. 마침내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87체제’의 동이 텄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새시대는 구시대를 박차고 나온다. 1990년대, 보통사람의 시대를 지나 문민정부를 맞았다. 처음으로 내용 면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채워졌다. 역사적 수평교체를 거쳐 세계화 물결 속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다. 

2000년대 참여정부와 MB(이명박) 정부로 이어오면서 양극화 현상이 극심했다. 자유시장경제는 복지와의 접목을, 정치민주화는 경제민주화의 요구로 번져나갔다. 역사 후퇴의 위기의식은 하나둘 촛불로 모아졌다. 하지만, 기대했던 정부에서는 불공정과 내로남불 논란이 대두됐다. 다시금 이정표를 세워야 했다. ‘공정’이라는 어젠다였다. 

 

1. 공정 시대 


2022년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다. 새 대통령에 거는 희망은 ‘공정 심리’였다. 신평 변호사는 윤 대통령을 지지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공정이 시대정신이라고, 말해 왔다. 

둘은 닮았다. 

지난달 26일 경주 첨성로 외곽서 신평 변호사 댁을 찾았다. 7월 서울서 보고 두 번째였다. 개인적 불찰로 다시 찾은 거였다. 오래전 손수 설계해 지었다는 한옥이 튼튼해 뵀다. 국가에 등록된 농민이라더니 뜰 가득 푸른 채소가 들어왔다. 서재 천장 위로 조그만 창이 나있다. 하늘이 보이고 나뭇잎이 드리웠다. 부인이 다과를 내왔다. 한 프레임에 담고 싶어 찰칵. 손사래를 쳤다. 눈매가 선하고 조용한 분이었다. 
 

신평 변호사는 경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예전에는 논 농사도 지었으나 요즘에는 밭 농사만 짓는다고 말했다. 사진은 신 변호사가 경주 첨성로 외곽에 위치한 자택 서재 천장에 난 작은 창문.ⓒ시사오늘
신평 변호사는 경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예전에는 논 농사도 지었으나 요즘에는 밭 농사만 짓는다고 말했다. 사진은 신 변호사가 경주 첨성로 외곽에 위치한 자택 서재 천장에 난 작은 창문.ⓒ시사오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과 닮은 면이 있는 점을 상기했다. 

- 닮았다고 보는데 본인은 어떤가요. 

“분투하는 모습이 짠합니다.”

그 말만 했지만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성역을 깼다고 평가되고 있다. 검찰하면 정적을 제거하는 권력의 사냥개로 불려왔다. 그는 의외였다. 살아있는 권력을 조준했다. 79학번 서울대 법대 시절 전두환에게 사형을 구형한 뱃심이 어디 가지 않았다. 

신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74학번이다. 윤 대통령의 5년 선배다. 윤(尹)이 국민의 검찰로 평가됐다면 신 변호사는 국민의 판사로 불렸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3차 사법파동의 주역이다. 1993년 개혁의 물결이 거셀 때였다. 당시 대구지법 판사였다. 말단 판사 때부터 촉망받아 왔다. 한 대법원장이 직접 쓰던 책상을 물려줄 정도였다. 

 

2. 정풍 운동 


하지만 10여 년 판사로 있으면서 목도한 것은 “공공연하게 판사실에서 오가는 돈 봉투”였다. “그것으로 판결이 좌우되는 세상”이었다. 

“100만 원 줄게. 판결 내놔. 판결 장사 아닙니까. 나는 거기에 분노했던 거죠.”

두어 차례 기고문을 통해 정풍을 촉구했다. 법조계 치부를 낱낱이 드러냈다. 사법부가 발칵 뒤집혔다. 급기야 불이익이 떨어졌다. 헌정 사상 최초로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됐다. 국정감사 쟁점으로 확대될 만큼 파장은 컸다. 

법복을 벗고 경주에 터를 잡았다. 태어난 곳은 대구지만, 경주는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대구지법 경주지원서 근무했을 때부터 경주와의 인연은 시작됐다. 은사(안형관 교수)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슬하에 자녀들이 태어났다. 온전한 기쁨을 누렸다. 재임용 탈락 후 고뇌에 찼을 때도 몸과 마음을 재생시켜 준 곳이 경주였다.

그곳에서 변호사 겸 농부로서 제2의 삶을 살았다. 논밭서 일할 때는 땀방울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변호사 일도 처음엔 힘들었다. 시간이 약이 돼줬다. 차츰 정의로운 변호사를 찾는 발길이 늘어갔다. 수임 건만 전국 최다를 기록할 때도 있었다. 

다만 성역을 깨는 숙명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이후 로스쿨 교수로 재직하면서 또 한 번 부조리를 경험했다. 학계 내 부당 인사 논란, 사회지도층들의 공공연한 자녀 입시 비리 의혹 앞에서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3. 금기를 깬 사람들 


신평 변호사는 돈으로 판결이 좌우되는 사법계의 문제를 지적한 데 이어 로스쿨 제도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사진은 7월 그의 용산 사무실에서 신 변호사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신평 변호사는 돈으로 판결이 좌우되는 사법계의 문제를 지적한 데 이어 로스쿨 제도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사진은 7월 그의 용산 사무실에서 신 변호사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연이어 폭로했다. 사회는 그에게 영원한 내부고발자라는 칭호를 붙였다. 

"전국 로스쿨 교수들에게는 공적이 됐지요.”

초연한 듯 말했다. 

사법부와 학계로부터 탄압받은 고(故) 마광수 교수가 겹쳐 떠올랐다. 예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슬픈 사슴이 연상되는 이미지였다.

그는 탐미적 소설을 통해 기득권층의 민낯을 풍자했다. 지식인 사회의 위선과 내로남불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날개>의 이상처럼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다. 비폭력을 지향한 진정한 페미니스트기도 했다. 

사법부는 소설 <즐거운 사라>속 여주인공이 끝끝내 반성하지 않는다며 그를 구속했다. 학계는 외설이라고 몰았다. 폭력적 영화는 넘기면서, 문학적 상상력엔 재갈을 물렸다. 그의 명작은 불온서적이라는 누명 아래 빛을 보지 못했다. 

신 교수도 젊은 시절 천재 소리를 들었다. 일본 유학 당시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들은 대로 써보라던 한 교수의 말에 그대로 빼곡히 칠판에 적을 만큼 기억력이 좋았다. 일기 형식으로 쓴 베스트셀러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는 잠자리의 투명한 날개와도 같았다. 양심을 선택함으로 인해 불운까지 겪고 마는 강인하면서도 연약한 한 인간의 고뇌와 갈등, 성찰이 투명하게 전해졌다.  
 

“이 사회를 위해 꼭 해야 할 역할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내면의 소리가 억제될 수 없었다.”
-신평, <법원에 법정을 세우다> 중-


때로는 한탄도 했지만 제 십자가를 짊어질 각오였다고 했다. 

- 숙명처럼 느꼈나요. 

“어느 경우는 그랬어요. 정해진 하나의 숙명으로 생각한 거죠.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싸웠던 것 같아요.”

 

4. 인생의 출발점 


문득 자라온 환경이 궁금했다. 신 변호사는 1956년 없는 집 살림의 막내로 태어났다. 손이 겨울만 되면 항상 얼었다. 동상에 걸려서는 진물이 고였다. 그래도 밥은 굶지 않았다.  

“나는 내 인생의 출발점을 내 부모의 것으로부터 항상 보는 버릇이 언젠가부터 생겼던 듯해요.” 

어머니는 1919년생이었다. 열여섯 이팔청춘 나이로 시집와 10남매를 낳았다. “낮에는 소작하고 아버지와 둘이 열심히 일했겠죠. 밤에는 국문을 가르쳤대요. 자식은 자꾸 태어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전쟁을 겪었다. “그분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얼마나 힘들고 두려웠겠어요.”

호소를 띠고 물어왔다. 저절로 감정 이입이 됐다. 어릴 때 어떤 아이였나요. “엄청난 난독을 했어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괴테의 <파우스트>라든지, <실낙원>, 앙드레지드 <좁은문>, 마르크스-엥겔스 서적 등 말할 수 없이 읽었다. “머리만 무거운 아이였지.”

크게는 친형과 누나들의 영향도 받은 듯했다. 4·19세대의 주역이었다. “형이 지프차를 타고 가면. 막 소리치면서 쫓아갔어요. 삐라(전단)를 던져요. 덥석 받으면 아이들한테는 그게 능력의 척도가 되는 거예요.” 

 

5. 부조리에 눈 떠


신평 변호사는 공정 시대를 위해서는 사회적 사다리를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7월 그의 용산 사무실에서 신 변호사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신평 변호사는 언젠가부터 부모님 시각에서 사회를 바라보게 됐다고 말했다. 사진은 7월 그의 용산 사무실에서 신 변호사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잠시 동심의 미소가 번졌다. 형-누나가 집에 갖고 온 문집들을 읽으면서 세상에 눈을 떴다. 경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자의는 아니었다. 성적순으로 학교에서 보내던 때였다. 그때는 그런 분위기였다. 

“대학에 들어갔는데 법서를 볼 수가 없는 거예요.” 

연상됐는지 괴로움이 스쳤다. 당시 그는 감수성이 예민했다. 법학은 가진 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생각됐다. 관념처럼 각인되자 책을 펼쳐 들기조차 어려웠다. “비참했죠.” 낭패였다. “책을 읽기 위해 어떻게 했겠어요.” 물어왔다. 노력했겠죠. “술을 마셨지. 정신이 얼큰하게 돼서야 겨우 책을 읽을 수 있었어요.” 

원체 “사회가 모순과 불합리함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서민이 고통받고 있다, 사회 제도가 개혁돼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 변호사를 존경했다. 동교동계 이석현 전 국회부의장(5선 역임)과는 호형호제했다. 함께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활동도 할 뻔도 했다. 

그 길로 갔다면 어땠을까. 정치를 했을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아무튼 사법에 이어 로스쿨 제도를 비판하면서 명예훼손에 시달리는 일이 예사였다고 했다. 가혹한 입증 책임은 내부고발자를 더욱 힘들게 했다.

“유일한 목격자가 될 수밖에 없는 미투 운동 역시 브레이크가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내부고발에 대한 심한 편견을 갖고 있어요.” 내부 카르텔로부터 새김 당하는 주홍글씨와도 같았다.

- 언론도 기사를 쓴 당사자에게 입증책임을 요하는 법 개정이 지난 정부서 추진됐던 적이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불가결한 것이잖아요. 자칫 국가 비리에 대한 기사를 쓰는 게 불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취재원 공개를 요구토록 하는 것도 헌법에 규정된 기자들의 기본권을 부당하게 침해할 수 있고요.”

동조해왔다. 

- 후회하지는 않나요. 사회 부조리 고발 이런 것들은 고달픈 일이잖아요. 

“그런 것에는 좀 둔감하다고나 할까. 흘러간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후회도, 집착도 없는 편이라고 했다. 포기도 굉장히 빠르다고 했다. “내가 살아남은 주요한 이유죠.” 

 

6. 똑같은 좌우  


사심의 반대는 공심이다. 가급적 무욕의 삶을 좇은 데서 오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관계에 연연했다면 공심을 따르기 어려울 것이다. 2017년 문재인 대선캠프서 공익제보공동위원장을 맡았던 그이지만 ‘조국-윤미향 정국’ 당시 침묵하지 않았다. 진보 귀족이라 직격했다. 

“보수와 진보로 나눠 보면 진실을 보기 어려워요. 기득권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보면 사회가 훤해지기 시작해요.” 좌우는 똑같았다.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조금의 양보를 안 해요. 서민을 활용할 뿐이죠.”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 결정판이 로스쿨 제도예요.”

사법시험을 개혁하고자 만든 건데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해관계만 더 적나라하게 반영되고 만 거죠.”  물론 “진흙탕 속에서도 연꽃이 피듯 훌륭한 사람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고도의 지성과 야만이 병존하는 게 이 사회예요.” 

사법은 사명감과 조직체계가 있다. 지나치게 행동하면 눈총도 받는다. 그런데 로스쿨 학계는 아니었다고 혹평했다. “기득권층과 지혜의 대물림에 너무 좋은 제도인 거예요. 교수 개개인이 절대 권력자였고 세습을 위한 놀이터였죠.”

책을 통해서도 그는 이 점을 꼬집었다.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 본성을 더 드러내기 좋은 구조였다고 소회했다. 
 

“한국의 로스쿨은 철저하게 로스쿨 교수를 위한 것이다. 가장 큰 피해를 입고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로스쿨 학생들이다. 로스쿨 학생을 위한 로스쿨로 바꿔야 한다.”
-신평 저서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중-


“이런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함에 저항했던 거죠.”

신 변호사는 자신에게도 화살을 돌렸다. 로스쿨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반성한다”고 했다. 

 

7. 통찰력


신평 변호사는 공정 사회를 위해서는 사회적 사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7월 그의 용산 사무실에서 신 변호사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신평 변호사는 공정 사회를 위해서는 사회적 사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7월 그의 용산 사무실에서 신 변호사가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성찰은 명상을 요한다. 그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신학, 명리학, 주역 등에 심취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는 유체이탈도 겪었다. 우연한 계기로 주역의 대가 안형관 교수와 연이 됐다. 안 교수는 비상한 인물이었다. 처음 만난 음식점 여인의 아이가 셋이고, 그들 모두 성씨가 다른 것을 맞춰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사찰서는 스님과 함께 있다, 멀리서 걸어오는 방문객이 간밤 꾼 꿈 때문에 온 것도 알아맞혔다. 

그도 스승을 따라 사람이나 사물을 꿰뚫고 소통하는 염력 훈련을 한 듯했다. 한때 깊어지면서는 나비나 잠자리나 새와 텔레파시가 통하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기독교와 불교에 이어 천주교로 정착한 것은 환상 속에서 마리아 일행을 만나면서다. 뚜렷한 실체였다. 비리에 맞설 때마다 내부 세계로부터 고초를 겪는 극심한 고통이 잇따랐다. 그 순간 마리아 일행을 본 거였으니 위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DJ(김대중)도 일본 납치 사건, 내란음모혐의 등으로 몰렸을 때 세 번 예수를 만나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사심에 초연해서일까. 시간이 가면서는 선견지명, 통찰력이 생겨 났다. 정치 전망도 잘 맞았다. 몇 년 전 ‘이낙연 독주 체제’일 때 이미 ‘윤석열 vs 이재명 대선’을, ‘윤의 승리’를 예견했다. 20대 대선 기간에는 조정관 교수와 함께 ‘윤석열-안철수’ 단일화 성사에 숨은 공신으로 나섰다. 이준석 전 대표에 대해서는 여전히 박한 점수를 줬다. 

요즘은 윤 대통령 지지율이 고비지만 잘 될 거라고 봤다. “내년 상반기쯤에는 (지지율도 원래대로) 회수가 될 겁니다.” 총선도 압승할 거라 했다. 그러한 이유로 여러 근거를 보태왔다. 덧붙여 “선한 사람은 결국 성공하더라고요.” 이 말이 여운을 줬다.

여당은요. 차기 대권주자로 박진 외교부 장관을 주목했다.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갸웃함이 무색하게 그럴 날이 올 거라고 했다. 전당대회는요. 권영세 통일부장관에 관심을 가졌다. 글쎄. 모를 일이었다. 야당에 대해서도 몇 가지 언급했다. 김동연 경기지사가 이재명 대표를 이길 날이 올 거라 했다.  

 

8. 사회적 사다리 


어떤 기준으로 전망하는 걸까. “나는 엘리트에 관심이 없어요.” 대신 민심에 집중했다. 마그마의 끓는점을 감지했다. 지금은 어떤가요.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그의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이날도 마그마의 온도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요. 

“사회적 사다리를 놓아야 해요.” 윤석열 정부가 성공하는 길이라 했다. 예로 사법개혁을 제시했다. “해방 후 지금까지 사법 개혁이 행해져 왔지만 ‘공정한 재판, 공정한 수사’가 모토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기억 상 그랬다. “공정하게 수사받게 하고 공정하게 재판받게 해야 해요. 그거야말로 국민이 원하는 거죠.” 

사회적 사다리를 놓는 구체적 방법으로는 세 가지를 들었다. 우선은 대학입시제도를 개혁하는 일이다.

수시 완전 폐지는 어려울까요. “수시도 좋은 수시가 있어요. 기득권 자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수시는 대폭 줄여야죠. 서울대를 비롯한 모든 국립대학의 50% 정원은 경제적 중하위층의 자제들로만 응시하게 한다거나….” 파격적이었다.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비춰 봐도 용인될 수 있는 거라고 봐요.”

다음으로는 공무원 제도와 법조인 양성 제도 개혁이다.
 

“공무원 특채를 과감하게 획기적으로 줄이고 여분을 공정한 선발기준에 따라 선발한다. 
로스쿨 제도에 대한 반성에서, 우리 현실에 맞는 제도를 시급히 고안하되, 우선 당장 로스쿨 학비를 반액으로 낮추며, 로스쿨을 통하지 않고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작은 문’을 만든다. 
- 신평 <공정세상> 중-


대학입시와 로스쿨만 일부 수정해도 사회가 훨씬 나아진다는 얘기였다. “로스쿨을 통하지 않고 변호사 시험을 볼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만든다든지, 조금만 개선해도 얼마든지 좋게 만들 수 있어요.” 근데 “그거 고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였다. “이익을 뺏기기 싫으니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요.”

카르텔의 견고함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표정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듯했다. 저변이 원하는 곳에 시대정신이 있어왔다. 공정시대를 강조해온 그다. 그게 맞는다면 민심에 쫓겨서라도 사다리 놓을 날 오지 않을까. 당분간 예견이 맞기를 바란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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