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범 “6월항쟁 주역 민추협, 정립 필요” [민추협 되짚기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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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범 “6월항쟁 주역 민추협, 정립 필요” [민추협 되짚기⑫]
  • 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 승인 2022.09.1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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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범 인권국장 (현 사단법인 민추협 공동 부회장) 
"운구행렬 지날 때까지 임성규와 시청 옥상 조기게양"
"고대 앞 사건, 건대 사태, 삼민투 때 학생들 뒷바라지"
"유신 반대 투쟁 이어 박종률 의원 따라 민추협 참여"
"산발적이던 민주화 운동 집결, 민추협 공 인정받아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민추협 김일범 인권국장은 학생들과 재야 단체와의 창구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고대 앞 사건, 건대 사태, 삼민투 사건 등이 일어났을 때 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사진은 김일범 국장이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추협 김일범 인권국장은 학생들과 재야 단체와의 창구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고대 앞 사건, 건대 사태, 삼민투 사건 등이 일어났을 때 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사진은 김일범 국장이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6‧29 선언이 있고 10여 일이 지났다. 1987년 7월 9일 오전 故(고) 이한열 군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연세대서 영결식을 마친 운구 행렬이 시청을 향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는 장례준비위원회로 참여했다. 김영삼(YS)-김대중(DJ) 공동의장도 도보행진을 함께했다. DJ는 다리를 절었다. 

"열사여…" "열사여…" 목 놓아 부르는 연대 총학생회장(우상호) 뒤로, 걸음걸음 애도의 물결이 뒤따랐다. 주최 측에서는 100만 인파, 경찰 측은 10만 명을 추산했다.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는 대형 플래카드를 들었다. ‘한열이는 민주의 아들’이라는 추모 글이 이 군의 어머니 배은심 씨를 위로하는 듯했다.  

 

시청 조기게양 


한낮의 햇살은 뜨거웠다. 긴 그림자 행렬은 시청 맞은편 플라자호텔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시민들 눈에 태극기가 들어섰다. 평소처럼 높이 솟구쳐 있는 모습이 야속했다. 공권력에 의해 이한열마저 목숨을 잃었다. 당국의 공식 사과를 시민들은 바랐다. 이날만큼은 고인의 넋을 기리고 조의를 표할 것을 요구했다. 전국 각 도시에서도 조기(弔旗)게양을 하던 터였다. 

"조기게양 하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성난 민심 앞에 호텔 측도 부랴부랴 국기를 내렸다. 다른 건물들도 동참했지만 유독 한 곳이 꿈쩍 안 했다. 시청이었다. 조기게양을 명령하는 군중들의 사자후가 이번엔 시청을 포위했다. 그래도 요지부동이었다. 
 

김일범 국장은 민추협이야말로 6월 항쟁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민추협서 도보행진을 하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김일범 제공)
김일범 국장은 민추협이야말로 6월 항쟁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민추협서 도보행진을 하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김일범 제공)

‘우리가 내리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시청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민추협의 김일범 인권국장(현 민추협 공동부회장|이하 김일범)이었다. 그를 따라 민추협 젊은 동지 임성규(27‧한광옥 비서실장 보좌)와 민간인으로 이중배(백산중학교 교장) 씨가 나섰다. 

"내가 앞장서 주도했어요." 
김일범이 당시를 소회했다. 
"신문에도 이만하게 나왔더라고."
지난 8월 2일 여의도 모처에서 만났다. 
 

“12시 25분경 민추협 인권국장 김일범 씨가 시청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반기로 게양하려다 시청경비원들에게 끌려 내려왔다.”
-1987.7.9.<동아일보> 중- 


신문 상에서는 끌려 내려간 것까지만 기록돼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성공했다고 김일범은 전했다. 그는 임성규와 2인 1조처럼 움직였다. 경비원들과의 몸싸움을 감수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또 한 차례 실랑이가 벌어졌으나 마음이 바빴다. 달려오는 이들을 막아서며 강제로 조기게양에 성공했다. "와아아아…." 밑에서 지켜보던 군중들의 환호성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김일범 국장은 임성규 민추협 회원과 시청 옥상에서 조기게양을 했다. 김 국장이 끌려내려 갔을 때 임 회원이 조기게양을 지켰다.ⓒ시사오늘(사진 : 임성규 제공)
김일범 국장은 임성규 민추협 회원과 시청 옥상에서 조기게양을 했다. 김 국장이 끌려내려 갔을 때 임 회원이 조기게양을 지켰다.ⓒ시사오늘(사진 : 임성규 제공)

주동자가 체포되듯 김일범이 끌려 내려가자 임성규는 혼자 버티기 시작했다. 지난 12일 당시 상황을 듣기 위해 전화를 했다. "경비원들이 아니나 다를까 와서 태극기를 다시 올리려 하더라고." 안 되겠다 싶어 건물에 화염병이라도 던지겠다. 거친 말들을 늘어놓았다. "운구 행렬이 떠날 때까지 조기게양을 했었죠." 한 시간 정도 지났을 거다. "그제야 태극기가 올라가더라고." 숨을 돌렸다. 

 

헌정사 불행한 정치인 


시청을 둘러싼 조기게양은 그날의 상징적 사건으로 남게 됐다. 당사자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됐을 터였다. 

"다른 건 몰라도 6월항쟁 주역은 민추협이에요. 민주화의 가장 큰 역할을 했어. 견인차가 돼줬지." 시청 조기게양의 주역 김일범은 <시사오늘>과 만나면 이 점부터 강조하려 한 듯 단단히 준비한양 말을 꺼냈다. 6월 항쟁 기간 그가 맡은 인권국장은 민주화운동의 야전 사령관과 같았다. ‘박종철-이한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 간사부터 각종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DJ하고는 어떤 인연이었나요. 김일범은 동교동계다. "아버지(김용대)와 DJ는 친구 사이였어요." 선친은 동경대 졸업 후 정치인이 됐다. 그에 대해서는 선거 관련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부안군 위도 사건 

1963년 전라북도 부안군서 실시된 6대 총선서 264표 차로 이기던 민주당 소속의 김용대는 끝내 31표차로 석패했다. 이후 선거무효소송을 제기했다. 유권자 142명만 살고 있는 작은 섬 위도면 제3투표구를 중심으로 부정표가 나왔다. 2년여가 지난 1965년 8월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위도만 재선거할 것을 판결했다. 날짜는 9월 13일이었다. 김용대는 29표만 얻으면 당선, 상대편은 89표를 얻어야 의원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득표전만 보면 김용대에 유리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 시절 신문은 김용대에 불리한 선거 분위기였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육지에서 섬에 이르는 유일한 교통기관인 연락선의 독점을 비롯해 경찰 및 공작원의 침투 등 달갑잖은 선거 바람이 일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 많은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1965.9.9 <조선일보> 중-

“선거전이 시작되자마다 그들(공화당)은 낙도의 대표적 야당계 인사 세 사람을 임의동행 유괴 또는 납치의 뒤범벅으로 표현해야 온당할 방법으로 섬에서 빼내갔다. (중략) 섬엔 선거 무드보다 먼저 공포 분위기가 휩쓸었다. 거기다 정사복 경찰관들의 플래시가 어두운 낙도의 계곡을 비추고 다녔다.”
-1965.9.15. <동아일보> 중-

 

"오죽하면 신문 <동아일보> 단상단하(壇上壇下)에 헌정 사상 제일 불행한 정치인이라고 나왔겠어요."
아버지를 회상하자니 스스로도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억울하게 떨어졌다고들 했어요. 남들 말로는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선친은 50대 이른 나이에 타계했다.  

 

연설 녹음 사건 


민추협 김일범 국장은 1971년 대선에서 DJ를 도왔다. 이후 70년대 중후반부터 정치 활동에 본격 뛰어들었다. 사진은 김 국장이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추협 김일범 국장은 1971년 대선에서 DJ를 도왔다. 이후 70년대 중후반부터 정치 활동에 본격 뛰어들었다. 사진은 김 국장이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거기서부터 형님이 아버지 유업을 계승한다고 정당에 들어갔던 거예요."

인터뷰 자리에 배석해 있던 민추협의 조찬옥 사무총장이 첨언했다. 

어느 당이요. "민주통일당이요." 양일동 총재가 이끄는? "맞아요." 당은 반진산계가 주축이었다. 김녹영 의원(8·9·10·12대 역임)도 통일당 소속이었다. 함께 동교동계 사람으로 활동했다. 그 시절 김일범은  유신 반대 운동을 했다. 

DJ와는 더 앞서부터 지근거리에 있었다. "전에도 무슨 직책을 맡은 건 아니지만 선거 때 돕고는 했어요." 1971년 7대 대선 때를 말했다. 아버지와의 인연도 있고 하니 일이 있을 때마다 보좌한 듯했다. 통일당서는 지구당 위원장 등을 맡았다.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76년 중반부터였다. 이름도 바꿨다. "김해김 씨는 원래 곤자항렬인데 아버지 호(凡石|범석)를 따서 일범(一凡)으로 고쳤어요."

78년 12‧12 10대 총선서는 부안에 출마했다. 부안군 동진면 봉황리에서 태어났다. 고향 출마에 뜻을 둔 것도 있겠지만 선친의 숙원을 완성해 내고 싶다는 일념도 내심 있을 듯했다. 하지만 떨어졌다. 심기일전했다. 

1980년 2월 서울의 봄이 가시기 전, 한 번은 DJ가 한신대서 강연을 할 때가 있었다. 그의 연설은 유명했다. 찾는 사람이 많았다. "녹음을 제가 했어요. 후농 김상현 회장과 상의해 테이프를 만들었죠." 현장서 녹음해 이를 보급하려면 영상 기술자가 필요했다. 마침 후배 중 적임자(고춘남)가 있었다. "근데 그 일로 끌려가 고초 당하고…" 후배 얘기였다. "운영하던 회사도 완전히 망가져 버렸지." 엄혹한 시절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돕다가 벌어진 비극이었다. 미안함은 말할 수 없었다. 

김일범도 남산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갔다. "눈 감고 가는데 막 겁을 주더라고. 며칠간 구둣발로 밟혔다. "선생님을 잘 압니다." 그래도 호의적이었다. 일주일 여가 지나자 풀어줬다. 

 

학생들 간의 창구 역할 


- DJ는 망명 가고 YS는 가택연금 당하던 암흑의 시기였잖습니까. 전두환 집권 당시 상도동계서는 최형우 전 장관 부인이 속옷 장사도 하고, 김덕룡‧문정수‧최기선 등은 무교동서 사랑방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을 운영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고 들었습니다. 동교동계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버텼습니까. 

"호구지책으로 와이셔츠 가게를 했어요." 

을지로 지하상가였다. "두 칸을 터서는 맞춤양복도 하고 셔츠도 팔았지." 매장은 금세 동교동계를 비롯한 야당 인사들이 모여 교류하는 사랑방 같은 곳이 돼줬다. 권노갑 고문도 왔다 갔다. "전부 다 와이셔츠를 맞춰 입었지." 

- 민추협은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건가요. 

"동교동계서는 박종률 의원(8‧12‧13대 역임)이 앞장서서 추진했잖소."

상도동계가 전원 참여했다면 동교동계는 김상현-조연하-김녹영-박종률 등이 적극 참여했다. 나머지 핵심들은 DJ가 국내에 없는 점을 들어 소극적이었다.

"내가 그분(박종률)을 모셨거든. 광화문에 사무실이 있었지." 박 의원을 따라 민추협 초반부터 자연스레 합류했다. 또 하나. "젊은이로서, 야당으로서,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당면과제인 민주화운동에 어떻게든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처음에 맡은 직책은 뭐였나요. 

"문교 부국장을 했어요."

국장은 김장곤 의원(14대 역임)이었다. "항상 그분 뒤를 따라다녔어." 김장곤 의원이 인권국장에 오르자, 김일범은 문교국장 자리를 넘겨 받았다. 김 의원이 기획실장으로 갔을 때는 곧바로 인권국장 뒤를 이었다. 

함께 고대 앞 사건, 건대 사태, 삼민투 사건 등을 겪었다. 학생들과 더불어 민가협, 구속자가족협회, 유가족협회와 재야 간 창구 역할을 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왔어요." 한 번은 이런 말도 들었다. "어느 집회 가든지 꼭 민추협 인권국장은 있더라." 또 한 번은 "건대 사태 때였는데…." 전두환 정권서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김일범은 <민주통신>을 통해 반박했다. "내가 그랬어요. 학생들은 좌경이 아니다. 순수한 민주운동이다." 
 

김일범 국장은 집회 때마다 빠짐없이 참석한 인사였다고 알려져 있다. 민주화 공이 크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사진은 김 국장이 1980년대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김일범 제공)
김일범 국장은 집회 때마다 빠짐없이 참석한 인사였다고 알려져 있다. 민주화 공이 크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사진은 김 국장이 1980년대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김일범 제공)

삼민투 주동자였던 함운경과 김민석 등이 잡혀 들어갔을 때는 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상도동계 백영기 대외국장(한국방송영상 사장 역임)을 통해서도 당시에 대해 들은바 있다. 
 

"미문화원 사건에 대한 재판이 있었는데 제가 어머님들에게 속치마를 입고 재판정에 들어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이 진행될 때 그 속치마를 찢어 머리띠와 어깨띠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대학생 부모들이 민주화 문구가 적힌 머리띠와 어깨띠를 재판정에서 하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사건 때문에 재판정이 뒤집혔습니다. 큰 사건이었습니다."
-2011.7.26. 백영기 <시사오늘> 인터뷰 중-


백영기 국장 얘기가 나오자 김일범은 "민추협 모금에 상당히 일조한 분이었다"고 기억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 규명 집회 때도 생각이 났다. 
 

# 진상 규명 촉구 집회, 1987 연대  

1987년 1월이었다. 연세대에서 2시쯤 집회가 열리기에 앞서 학생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낮에는 군경들이 학교를 막고 있으니 새벽 6시에 교내에 들어가기로 했다. 신문을 들고 신촌서 만나기로 했다. 누군가 접근해오면 암호문을 대기로 사전에 약속했던 차였다. "최 선생님입니까" 하면 "영철이 친군가" 로 답하면 됐다. 학생을 따라 교내에 숨어 있었다. 오후 2시가 됐다. 사회자가 민추협 인권국장이라고 김일범을 소개했다. '선배 정치인들이 제대로 못 싸웠기 때문에 학생들이 투쟁하는 거다. 선배들 잘못이 크다.' 그 말을 해줬던 것 같다. 연설을 끝내고 연대 병원 쪽을 거쳐 빠져나갔다. 전경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터라 쉽지 않았다. "연세대 음대 여학생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거요." 차를 태워준 학생이었다. "김 모 양이었는데…." 어렴풋했다. 

 

DJ와의 일화 


DJ와의 일화는요. 화제를 돌렸다. "민추협 국장들 회의가 있잖아요. '김 국장, 김 국장.' 김대중 선생이 부르는 거예요. 귓속말로 '자당(慈堂)님 잘 계시오?'" 어머니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남들이 볼 때는 중요한 이야기하는 줄 알고 선생이 나를 각별히 생각한다고 소문이 났어." 껄껄 걸 웃었다. "사실상 그 양반이 나를 예뻐했어요." 
 

김일범 국장 선친은 DJ와 친구 관계였다. DJ도 자신을 각별히 생각했다고 김 국장은 소회했다. 사진은 YS-DJ가 참석한 행사장에서 김 국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김일범 제공)
김일범 국장 선친은 DJ와 친구 관계였다. DJ도 자신을 각별히 생각했다고 김 국장은 소회했다. 사진은 YS-DJ가 참석한 행사장에서 김 국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김일범 제공)

 

# DJ가 준 용돈

이런 일도 있었다. "의장실에서 불러. '김 국장 고생이 많지?' 지갑을 열어 돈을 딱 주는 거예요. 황송해하다 그 돈을 밑에다 흘렸지 뭐요." 나중에 세어보니 70만 원이었다. 월급이 30~40만 원 할 때였다. 큰  돈이었다. "근데 돈 받는 순간에 총무국장이 들어오다 봤어. 다들 내가 받은 걸 아는데 어떻게 하겠어. 집행부 실국장들한테 전부 밥 한번 샀지." 미소가 번졌다. 

애틋한 시절을 지나 87 체제를 맞았다. 평민당에서는 재야협력국장을 지냈다. "큰 공을 세웠다. 많이들 그 말을 해줬어요." 위상이 나름 높았다. 그런데 왜 공천은 받지 못했나요. 그는 13대 총선 이후 동교동계와 멀어졌다. "공천 거래가 있을 때였어요. 부안으로 나가려 했는데 다른 사람한테 공천권이 돌아가게 됐다며 내게는 전국구를 준다는 거예요." 펄쩍 뛰었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내가 안 받는다고 그랬어." 전국구로 나갔다면 당선권이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을 거다. "지나고 보니까 우매했지." 솔직한 아쉬움을 비췄다. 

 

재결성의 의의 


김일범 국장은 민추협이 재결성 되면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역사적 재정립을 위해서는 학계의 활발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은 김 국장인 인터뷰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김일범 국장은 민추협이 재결성 되면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역사적 재정립을 위해서는 학계의 활발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은 김 국장인 인터뷰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추협은 민주화에서 가장 중요하다. 반독재를 규합해 제도를 고쳐 한 나라의 오랜 체제를 바꿔냈다. 하지만 그 공은 정작 586들이 가져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추협 스스로 자신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간과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김일범을 만나서도 이 점을 말했다.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6월 항쟁 당시 민추협이 없었다면 자유를 못 누렸을 거예요. 그때 민주화운동은 산발적이었어요. 집결시키지 못했어. 민추협이 그걸 해냈으니 된 거지."

사실 전두환은 학생들의 산발적 시위에 눈 하나 깜짝 안 했을 것도 같아요. "전두환은 학생들이 플래카드 들고나가면 일부러 방치하고는 했어요." 좌경으로 몰려고 유발시켰다며 조찬옥 총장이 설명을 보탰다. 

근데 왜 586한테 공을 뺏겼다고 보나요. "양김이 청와대 간 뒤로 민추협 정립에는 신경을 못 썼잖아요. DJ는 수혈론을 앞세워 586을 전면에 등장시켰어요. 유신체제에 투쟁한 세대는 건너뛰어 버렸어요." 조 총장이 끼어들며 답했다.  김일범도  "세력을 공고히 하려고 한 거죠." 부연했다. "DJ는 재야세력을 필요이상으로 우대했어요. 내가 재야협력국장을 했기 때문에 잘 알아요. 원래부터 해왔던 사람들이 밀려난 거야." 서운함이 감돌았다. "우리가 민주화 운동의 초석이 됐고 혁명적인 것을 이뤄왔는데 정작 부각되지 못해온 것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죠."

구체적 정립이 덜 된 점도 과제로 남았다. "앞으로라도 민추협 정신을 계승하는데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학술적으로 발전시켜야 하지 않는가. 염원이 있어요." 

민추협 재건은 그런 점에서 잘한 일이다. 과거 양김의 분열로 유명무실해졌던 민추협은 16대 대선을 앞두고 재결성됐다. 상도동계에서는 김덕룡-김무성, 동교동계에서는 박광태-김장곤 등이 힘썼다. 김일범도 사단법인 민추협 재창립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 실무를 전담했다. 취지문도 직접 작성했다. 역할을 해 온 것에 뿌듯함이 어렸다. "그나마 유지가 됐으니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을 수 있게 된 거예요." 갈 길은 멀다.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죠."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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