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비껴간 대통령들③>빗나간 영웅 이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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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비껴간 대통령들③>빗나간 영웅 이인제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2.09.24 16:4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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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의 꿈´ 통일 시대는 아직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지막 화살 하나는 남겨둬라, 2012년 대선 그의 선택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시대를 비껴간 대통령들이 있다. 한 때 유력 대선주자들로 통했지만 대통령 운이 닿지는 못한 이들을 말한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는 신익희, 조병옥, 유진산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민주화 된 다음에는 이인제, 박찬종, 이회창, 정몽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나름의 애석한 이유로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비껴간 시간의 단면을 돌이켜 봤다. <편집자 주>

아직도 많은 이들은 합리적 대북관을 지닌 중도개혁 성향의 이인제 선진통일당 대표가 언젠가는 대통령이 될 가망성이 높다고 한다. 훗날은 통일을 주도할 적임자가 시대의 부름을 받을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인제 시대가 오려면 그 전에 먼저 해결할 당면 과제가 있다. 독재세력 잔당과 종북세력 잔당을 떨쳐내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가짜 진보좌파, 가짜 보수우파들에게 휘둘리는 상황이다. 이를 청산하지 않으면 우리 정치가 정화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대표는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중도개혁 성향의 제3후보 세력이 성공할 수 있도록 이제껏 그래 왔듯 정화된 토양을 만드는데 힘써주면 된다.

그간 광야에서 고군분투해온 저력이라면 가능하다. 제3세력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진짜 멋진 기회가 올 수도 있음이다. 불사조 이인제는 아직 젊다. 과녁을 뚫을 마지막 화살은 아껴두라는 것.

이인제를 알 수 있는 대목, 아내 김은숙 여사와의 인연

ⓒ뉴시스.

먼저, 아내 김은숙 여사와의 인연이다. 충남 논산의 가난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난 이 대표는 9살 때까지도 돈이 없어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처지였다. 가난이 부끄러울 법도 한데 평생 농사일을 한 부모님의 가치를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던 그는 서울대 법대를 들어갔고 주위 기대와 달리 3선 개헌 반대 등 민주화 운동에 전념했다. 1972년 졸업한 후에는 곧장 군대에 입대했다. 입대 2일 전 십여 년간 교제했던 한 여인과 결혼을 한다. 바로 김은숙 여사이다.

이 대표가 아내 김은숙 여사를 만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중학생 연합 시화전에 참가할 당시 김은숙 여사는 논산여중 학생회장이었다. 이 대표에게는 첫눈에 반한 여인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는 후문이다.

한때 김 여사는 한국의 힐러리로 불렸다. 남편이 사법고시를 준비하면 사법고시 뒷바라지, 정치인 길에 들어서면 정치인 뒷바라지에 온 힘을 다했다. 요즘 말로 치면 내조의 여왕인 셈. 하지만 그녀를 두고 치맛바람이 세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세간에는 김 여사가 든든한 배경이 없어 같은 정치권 인사의 부인들에게 무시당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인제 대표, 김은숙 여사 모두 가진 것은 없지만 이런 것에 굴하지 않고 정정당당한 길을 걸어왔다는 게 주위의 시선이다.

정치의지가 분명했던 그, YS와의 인연

ⓒ뉴시스.
1979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 대표는 1981년 대전지법 판사로 재직, 양심적인 법 해석에 충실했다는 평을 얻는다. 그러나 3년 만에 사표를 내고 근로자 산재 등 노동 인권 변호사로 활동한다.

그런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을 겪고 나서다. 그해 9월 이 대표는 경복고 선배 김덕룡이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로 직접 찾아가 정치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소신을 전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87년 대선 당시 상도동 사조직의 총사령탑에 해당했다. 이후 이 대표는 김영삼(YS) 캠프에 합류했고 최연소 노동부장관, 초대 민선경기도지사, 국회의원 등 승승장구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에 대통령 후보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5년 YS 발언과 이를 잘못 해석한 언론의 역할이 크다고 전해진다.

"YS(김영삼)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차기 대통령은 반드시 세대교체 된 인물이 등장할 것”이라고 강변했다. YS의 ‘세대교체론’은 DJ(김대중)와 JP(김종필)를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YS가 이인제 경기도지사를 점찍었다’고 대서특필했다."-<시사오늘>[6·2 지방선거]Review 지방선거(95년) 중에서-

언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중을 잘못 파악한 것이 이인제의 대선 시계를 앞당겼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계기로 이 대표는 1997년부터 대통령을 꿈꾸게 된다.

그에게는 중도개혁 정부 구성을 통한 세대교체, 서민·중산층 강화, 분권형 대통령제, 일자리 정부, 융합 시대, 지식경제 강국, 문화대국을 이끌겠다는 청사진이 있었다. 아울러 북한 정권에 끌려가지 않고 조건부 햇볕정책으로 미래지향적인 통일을 열겠다는 원대한 가치가 있었다.

특히 YS DJ JP를 두루 거친 이 대표는 3김시대를 하나로 통합해내는 동시에 낡은 지역 구도를 허물 수 있는 적임자로 기대를 모았다. 한 때 지지율 면에서도 장기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국민 신망도 두터웠다.

그럼에도 이인제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3번의 도전을 했지만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혹자는 그를 담아낼 시대적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적 및 패권세력의 이인제 죽이기 역시 혹독했다고 전해진다.

이인제 학습효과는 더는 불명예가 아니다?

ⓒ시사오늘
신한국당(현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에서 만들었다는 이인제 학습효과라는 말이 있다. 1997년 여당 내 유력 대선주자였던 이인제는 당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패한 뒤 신당을 창당, 끝까지 완주했다. 당시 그가 얻은 표는 500만 표였고 이중 영남에서만 260만 표를 획득했다.

독자 출마한 이인제 효과는 20%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YS를 지지했던 세력의 표도 상당수 포함됐다는 분석이다. 이인제-이회창이라는 갈라진 보수표로 인해 여당은 장기집권 40년 만에 사상 처음으로 야당연합인 김대중 후보에게 정권을 넘겨주게 된다.

신한국당은 이 같은 결과에 이인제 학습효과를 만들어낸다. ‘이인제(보수 분열 표) 찍으면 김대중(제3자) 된다’는 학습효과,  탈당 후 독자 출마한 철새 정치인은 국민이 외면한다는 학습 효과를 골자로 한 것이다. 정치권은 또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낸다. 경선에 불복한 자는 출마 할 수 없다는 제한 장치이다.

이와 관련, 이 대표는 억울한 심경을 밝힌 바 있다.

“(1997년)당시 경선에 참여해 완주 했다. 경선 룰에 대해 시비를 걸어 본 일이 없다. 경선 전 국민 지지에 있어서 경쟁자를 더블스코어 앞서 있었다. 경선 이후 병역문제로 당 공식 후보에 등을 돌린 민심이 이인제의 출마를 원했다”- 이인제. <개척자는 외롭다>라는 칼럼 중에서-

실제로 이 대표는 경선에 승복하고 경기도지사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이인제 바람은 가시지 않았고, 경선이 끝나고 나서도 지지율은 30%대를 기록할 정도였다.

앞서 신한국당 경선은 조직력이 우선시되는 폐쇄적인 경선규칙 때문에 불공정 경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쪽이 군부 세력 출신인 구 민정당 세력이었다는 점, 그리고 대기업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를 놓고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들이 많았다.

이러한 때 이회창 후보가 아들 병역 미필 논란에 휩싸였고, 하루아침에 지지율이 10% 아래로 떨어질 정도로 이 후보에 대한 민심은 싸늘했다. 상황이 이러했던 만큼 이인제 대표 말인즉슨 민심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뉴시스.
그는 시간이 지나 이런 평가를 한다.

"한나라당 사람들이 이인제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욕하고 저주했다. 이인제 때문에 정권을 뺏겼다.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욕했다. 저는 그 사람들한테 욕을 얻어먹어도 당당하다. 대통령이 되지 못했지만 역사의 신이 있다면 이인제를 통해 40년간 일당 독재를 해온 이 나라의 낡고 부패한 정치를 몰아내고 새롭게 투쟁해온 호남의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고 민주주의 시대를 활짝 열게 하지 않았는가. 이인제가 그때 출마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영남패권세력이 50년간 이 나라를 지배했을 텐데, 이게 정의롭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고 저는 생각한다."-이인제 칼럼 중-

1997년 대선 당시 이인제를 도왔던 박찬종 변호사도 얼마 전 모 종편 방송에 출연, "그때 김대중 정권이 되지 않았다면 호남 민심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현시점, 이인제 학습효과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각에서는 기득권 세력이 네거티브 선거 전략으로 이용한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한다.

개척자 관점에서 보면 그는 알을 깨고 나온 인물로도 볼 수 있다. 앞으로 나올 제3후보들은 이인제 학습 자료를 바탕으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릴 것이다. 그의 실패가 또 다른 제3후보에게는 성공적인 학습효과의 토대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인제 대표는 정말 철새정치인인가. 흔히들 철새 정치인 하면, 이익을 좇아 이곳저곳 자리를 옮겨 다니는 이를 말한다. 하지만, 조직과 계파가 없던 이 대표 경우는 패권 세력에 의해 광야로 떠밀리게 된 케이스라는 의견이다.

중도개혁 성향이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가 우리 정당정치의 문제점인데 이 대표를 품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존재감이 큰 인물이라 정적 세력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탈당한 것을 두고 철새, 철새 하는데 이 대표 말대로 영국의 처칠도 두 번 탈당했지만 성공했다. 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 굵직한 정치인들 역시 탈당한 사례가 있다.

부당함을 고발하거나 대의적 관점으로 탈당한 여러 사례가 있는데 유독 이 대표에 대해 철새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잘못됐다는 게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지적이다.

한편에서는 이 대표가 1997년 당시 신한국당을 탈당하지 않고 이회창 후보를 도왔다면 차기 대권은 떼놓은 단상이라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그건 이회창 후보 성향을 몰라서 그런다는 게 이 대표 측 한 인사의 얘기다. 그의 말인즉슨 차기 대권 주자로 밀어주기는커녕 정적 죽이기에 나섰을 거라는 관측이다.

ⓒ뉴시스.
2002년 대선 경선 패배 후…이인제 가스통, 그리고 무죄

이 대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아마도 2002년 대선 이후부터일 거라는 말들이 많다. 대선 초반 때만 해도 이 대표는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지율 1위를 달렸다. 그의 인기 배경에는 16대 총선 당시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새천년민주당을 전국정당으로 만드는데 공을 세웠다는 호평 때문이었다.

당시 변방에 머물던 노무현 후보 경우는 10% 미만의 낮은 지지율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DJ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또 민주화운동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감성정치 덕분에 386세대의 지지를 단숨에 이끌어내는 저력을 보였다.

당시 이 대표는 과거 이회창 후보가 그랬던 것처럼 대세론에 안주해 노풍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숨은 내막이 있나. 어쨌든 그는 당시 노풍에 맥없이 무너졌고 중도에 경선을 포기, 끝내 탈당하게 된다.

마치 패잔병처럼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노무현이라는 카드를 쓴 DJ에 대한 배신감이었을 수도 있겠고, 미리 짜놓은 판의 희생량으로 남기에는 그의 꿈이 너무 억울하게 여겨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아쉬움으로 남는 건 탈당 후 이 대표가 자신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것도 모자라 노무현 탄핵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는 갈등의 골이 깊었을 거라는 나름의 뼛속 깊은 속사정이 있을거라고 짐작은 하나 이런 점들이 노무현 정권을 자극하고 보복정치로 돌아온 것은 아닌지.

이와 관련, ‘이인제 가스통’이라는 말이 있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 이인제 대표는 5억 원 불법정치자금 혐의로 검찰 수사혐의를 받는다. 이 때 이 대표를 지지하던 자들은 공권력에 맞서 가스통 농성을 벌였고, 이 때 생긴 말이 이인제 가스통인 것.

당시 이를 두고 정치권의 한 인사는 “이인제는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보수 언론, 한나라당, 노무현 정권 할 것 없이 그의 정치적 숨통을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비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그간 여러 곳에서 노무현 정권이 자신을 박해해왔다고 술회했다.

"노무현 정권이 월드컵 휘장비리, 대선자금 등 모든 사안을 걸고 샅샅이 훑으며 이인제를 죽이려고 했다.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냈다."-이인제 칼럼 중-

이 대표는 2007년 대선 때도 열린우리당과 구 민주당 계열 인사들이 개편해 만든 민주당에 복당, 대선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그러나 예전의 명성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전국 득표율 0.7%를 획득하는데 그쳤다.

-불사조 이인제, 죽지 않은 꿈

ⓒ시사오늘.
이 대표는 그간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를 선택한 건 국민이었다. 국회의원만 해도 13대 통일민주당, 14대 민주자유당, 15대 국민신당, 16대 새천년민주당, 17대 자유민주연합, 18대 무소속, 19대 자유선진당까지. 그가 속했던 당이 사라진 적은 있어도 이인제는 살아남았다.

어쩌면, 그는 이 같은 저력에 대해 "청렴결백", "신념과 가치 면에서 타협하지 않았다", "노동부 장관과 경기도지사를 하면서 책상에 앉아있지 않았다" 등 여러 이유를 나열할지도 모르겠다.

대권 운은 없었지만 쉽게 죽지 않은 강인한 정치적 생명을 지닌 것만은 분명한 이인제 대표.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불사조 이인제라면, 통일 시대는 아직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내 꿈은 대한민국이 지식경제 강국이 되고 문화 대국이 되며 민족이 하나 되는 통일을 이루는 일이다. 시련이 닥칠 때마다 저를 지켜준 것은 바로 이 꿈이었다"-이인제 칼럼 중-

스스로 그간에 외쳐왔던 것처럼 선진통일 시대에 대한 소명의식을 여전한 초심인양 갖고 있다면 훗날을 기대하며 계속해서 꿈꾸기를 조심스럽게 권유해본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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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만 2012-09-25 16:09:41
"대한민국은 왜 - ?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가" ?
아직, 불사조 이인제가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신재영 2012-09-24 22:45:26
이인제 당신이 있어 한국 정치는 살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