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역할론①>‘YS 정신’ 계승자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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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역할론①>‘YS 정신’ 계승자는 누구?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2.09.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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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 YS의 역할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김영삼(YS)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상도동계’는 우리 헌정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YS계’, ‘민주계’ 등으로 불리는 이들은 YS가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숱한 사선을 넘나들며 군사정부와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대통령을 만든 첫 정치적 조직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YS 퇴임이후 이들의 존재감은 거의 없어졌다. YS가 생존해 있는데도 불구하고서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주자들은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등을 앞에 내세운다. 하지만 ‘김영삼의 정치적 자산을 이어 받겠다’는 대권주자는 아직 없다. 

상도동계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이른바 ‘친이와 친박’으로 갈라졌고, 2012년 대선에서는 지지후보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40여 년간 군사정부와 싸우며 마침내 이뤄냈던 ‘군정종식.’ YS의 정신을 이어받을 정치세력은 이제 없어진 걸까? YS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편집자 주>

박정희 전두환과 목숨을 건 대결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김영삼은 박정희 전두환과 집요하게 싸워 마침내 ‘군정종식’을 이뤄냈다. 그 싸움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YS의 맞은 편엔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YS가 눈엣가시였다. YS를 구속시키기도 했고, YS를 향해‘초산테러’ 등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정치공작을 일삼아 YS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YS는 끊임없이 싸웠다. 이를 보다 못한 박정희 정권은 1979년 ‘YS제거’를 위해 융단폭격을 가했다. YS의 오른팔이었던 김덕룡 문부식 등이 구속됐고, 서석재 문정수는 지명 수배됐다. YS가 이에도 굴하지 않자 신민당 총재직을 빼앗고, 의원직마저 박탈시켰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태는 부메랑이 돼 박정희 자신이 죽임을 당했다.

박정희 죽음 이후 전두환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YS는 1983년 5월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인다.
그리고 이 단식투쟁이 밑거름이 돼 ‘민주산악회’와 ‘민추협’, 그리고 신민당 창당을 통한 2·12 선거돌풍을 일으키며 전두환 정권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6·10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 83년 5월 YS는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인다. ⓒ김영삼 회고록

정당민주주의와 군정종식 사이 갈등

대통령 직선제 이후 집권여당인 민정당은 노태우 후보를 내세웠다. 야권이던 통일민주당에서는 갈등이 생겨났다. YS와 김대중(DJ)사이의 후보단일화 문제였다. YS는 DJ와 당내 경선을 통해 후보를 결정하자고 제의했다. DJ는 YS세력(지구당위원장)이 많다며 미창당지구당 중 많은 수의 위원장 임명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통일민주당은 56곳의 창당지구당과 36곳의 미창당지구당으로 나눠져 있었다. 통일민주당이 대선후보 경선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36곳의 미창당지구당 위원장을 선임해야 했다. YS 측은 김동영이, DJ 측은 이용희가 협상자로 나섰다.

김동영은  50대50으로 하자며 18곳씩 나눠서 임명하자고 했고, 이용희는 창당지구당의 지구당위원장 수가 YS 측이 많다며 23곳을 달라고 했다.

주장이 엇갈리자 양측 간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러나 1987년 10월 22일 후보단일화를 위한 경선을 담판짓기 위해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난 YS는 동교동 측 안을 수용해 버렸다. 상도동 내부에서는 “YS가 후보를 양보했구나”라는 탄식이 흘러나왔고, YS도 “이번 경선에서 지면 다음 기회가 있다”며 측근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DJ가 ‘4자필승론’을 들고 나오며 경선불참을 선언했다. 결국 1987년 대선은 노태우의 승리로 끝났고, YS가 염원하던 ‘군정종식’은 물 건너가는 듯했다.

군정종식을 위한 DJ와 담판…실패

1987년 대선에서 패한 YS는 총재직을 버리고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YS가 2선으로 물러나자 민주당과 평민당의 야권통합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최형우가 주도해 나갔고 평민당은 이중재 등이 나섰다. 통합논의의 핵심쟁점은 소선거구제 도입과 DJ의 2선후퇴였다.

당시는 한 지역구에서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호남과 수도권 일부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는 평민당은 소선거구제를 고집했다. 전국에서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던 민정당이나 민주당은 당연히 중선거구제를 고집했다.

때문에 평민당은 야권통합의 1순위로 소선거구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YS는 2선으로 후퇴했는데 DJ가 계속해서 총재직을 유지하고 있으면 야권통합이 될 수 없다며 DJ의 2선 후퇴를 요구했다.

이로 인해 야권통합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YS는 13대 총선을 2개월 앞둔 시점인 1987년 2월 23일 DJ와 만나 전격적으로 소선거구제를 수용해 버렸다.

당시 중앙조사연구소 소장이자 YS 차남인 현철씨 등이 나서서 “소선거구제로 선거를 치르면 제2야당으로 추락할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때 YS는 “군정종식을 하기 위해서는 야권통합이 제일 중요하고, 소선거구제를 수용하면 야권이 통합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걸 왜 못하냐”며 오히려 이들에게 핀잔을 줬다.

하지만 YS 생각은 순진했다. 소선거구제를 얻어낸 DJ는 총재직 사퇴대신 통합야당의 양김 공동대표제를 요구하는 등 핑계를 대며 통합을 미뤘다.

화가 난 YS는 평민당과의 야권통합을 잠시 미루고 재야세력들이 뭉친 한겨레민주당과의 통합을 서둘렀다.
그러자 다급해진 DJ는 총재직을 사퇴하며 민주당-평민당-한계레 민주당 등 3당이 통합할 것을 제안했다.
다시 야권통합에 불이 붙기 시작했고, 협상자로 민주당은 최형우 김수한 평민당은 허경만 김영배 한겨레민주당은 제정구 김재훈 등이 나섰다.

YS는 민주당 협상 실무자인 최형우에게 “이번에는 진짜 되는 거지”라며 되물었고, 최형우는 “3월 19일 서교호텔에서 만나 도장까지 찍기로 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최종 도장을 찍기로한 날, 통합 최종안을 들고 DJ에게 결재를 받으러 간 평민당 협상대표는 돌아오지 않았고, 괴청년들이 달려들어 최형우 손바닥에 담뱃불을 지지며 ‘통합불가’라고 외쳤다. 결국 이날 폭력사태로 야권통합은 물 건너가게 됐다.

3당통합으로 마침내 군정종식

야권통합은 물 건너가고 소선거구제 안을 수용해 버린 민주당은 그해 13대 총선에서 제2야당으로 추락했다.
13대 국회는 여소야대였으나, 이 같은 4당체제에서는 도저히 군정종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YS는 민정-민주-공화 등이 합하는 3당통합을 추진한다.

YS는 “이제 어쩔 수 없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내가 직접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수밖에…”라고 되새겼다.
3당통합 후 YS가 여당의 대통령 후보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숱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1990년 10월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내각제 합의각서가 민정계에 의해 언론에 유포돼 곤란을 겪었고, 당시 실세이던 박철언이 월계수회를 만들어 YS 주저앉히기 나섰다.

이런 풍랑을 헤쳐온 YS는 마침내 1992년 집권여당인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그해 12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YS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등을 실시해 정치개혁을 서둘렀다.
하지만 정권 말 잇딴 측근비리와 IMF 등으로 인해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YS 존재는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YS의 저평가와 관련, “우리나라의 문화 정서 탓이다. 우선 살아있는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좋지 못하다. 특히 망자의 향수가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문화가 권위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이어 “YS가 저평가 돼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우리문화의 정서를 감안할 때 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전했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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