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부동산 잔혹사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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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부동산 잔혹사 [기자수첩]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2.10.13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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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1.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한 대형 포털 사이트 인기 카페에선 최근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해당 카페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된 부동산 중개업자와 일부 회원들 사이에서 수십억 원 규모 '폰지 사기'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10여 명의 피해자들은 '투자금에 대한 이자 5~6%를 매월 받을 수 있다', '연 20% 금리 투자상품이 있으며 원금의 80~90%가 보장된다', '공공기관이 시행하는 확실한 투자처가 있다'는 회원 A씨와 그의 지인인 B씨의 말을 믿고 그들에게 총 45억 원 가량을 송금·교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A씨와 B씨는 이를 활용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투자금 원금·수익을 순차 상환하거나 개인적으로 편취했다는 게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또한 A씨는 대부업체를 창업해 부동산 투자자, 일반인들을 상대로 투자 설명회를 개최해 투자금을 모집하고 이와 같은 사기 행각을 벌였다고도 피해자들은 강조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금전적 피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피해자들은 지난 7월 A씨·B씨를 상대로 고소장을 접수했으며, 현재 경기부천원미경찰서 지능범죄수사1팀에서 해당 사안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2. 수년 전 수도권 아파트를 실거주 목적으로 분양받은 C씨는 최근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시행사·시공사가 정한 입주 지정기간이 만료됐음에도 현재 거주 중인 집이 팔리지 않아 잔금을 치르지 못해 불가피하게 입주를 미루고 있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 입주예정자인 D씨도 비슷한 사정이다. 몇 달 전부터 계약 해지 의사를 밝혔지만 현재 살고 있는 집 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렵다며 배째라 태도를 고수하고 있어서다. 세입자를 직접 구해서 나가든지, 법대로 하라는 식이다. D씨 입장에선 당장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소송전으로 가면 최대 1년 이상 시간이 소요돼 부담스럽고, 전세 가격이 크게 떨어져 적절한 새 세입자를 찾기도 힘들다. 일단 집 주인에게 내용증명만 보낸 상태다. C씨, D씨와 같은 입주예정자들이 많은지 해당 아파트 시행사는 입주 지정기간을 1달 정도 연장하기로 했다고 한다.


국내 정치권과 언론에선 '부동산 잔혹사'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정부 내각 인선 과정, 인사 청문회 등에서 유명 정치인·학자·고위공직자들이 부동산 투기 또는 위장전입 의혹을 받아 줄줄이 낙마한다든지, 전(前)정권처럼 부동산 실책을 거듭해 정부가 오히려 시장 혼란을 부추기는 상황이 계속 펼쳐질 때 주로 사용한다. 부동산이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경제사회적·역사적 비중이 얼마나 큰 지 보여주는 말이기도 한 것 같다. 하지만 특정 개인, 특정 세력이 정치적 타격을 입는 것에 '역사 사'(史)까지 붙여 가며 부동산 잔혹사라 칭하는 게 과연 타당한 걸까.

요즘 부동산 시장에선 '진짜' 부동산 잔혹사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 실착에 글로벌 유동성 파티까지 겹치며 단기간에 폭등한 집값이 고금리·고물가 영향으로 단기간에 하락하는 흐름이 나타면서다. 건설사 연쇄 부도, 투자자 파산 등 주요 시장 구성원들 위주로 잔혹사가 전개된 IMF와 금융위기 당시와는 양상이 사뭇 다르다. 사상 초유의 제로 기준금리 속 부동산 광풍, 연령 불문 영끌 러시,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인해 최근 수년 동안 가계 자산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폭 확대됐기 때문이다. 부동산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있어서 경제활동의 근간이자 삶의 터전인데, 어느 순간 경제활동과 삶의 모든 것이 돼 버렸다. 그리고 돌연 고금리·고물가 시기에 진입하다 보니, 특정 개인과 세력이 아니라 불특정다수의 수많은 국민들이 잔인하고 혹독한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앞선 사례에서 C씨와 D씨는 오로지 내 집 하나 마련하는 게 꿈인 실수요자들이다. 혹자들이 비판하는 투기세력도 아니고, 아파트를 분양받는 과정에서 어떠한 위법 행위도 저지른 바 없다. 평범하고 선량한 국민이다. 죄가 있다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예측하지 못하고 2019~2020년께 청약 접수에 나섰다는 것이다. 첫 번째 사례는 부동산 시장 내에서 펼쳐진 잔혹사가 시장 바깥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폰지 사기 피해를 주장하는 고소인들이 피고소인인 A씨와 B씨에게 금전을 보낸 날짜는 2021년 중하반기에 집중돼 있다. 한국은행은 그해 8월과 11월 기준금리를 각각 0.25%p씩 올렸다. 고소인과 피고소인이 만난 공간은 부동산 공부를 하고, 부동산 정보를 공유하는 유명 온라인 공인중개사 스터디 카페다. 부동산 시장이 급격히 침체되니 부동산에 업을 둔 사람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정도로 흔들리고, 또 일부는 돈에 눈이 멀어 범죄의 길로 빠진 셈이다. 

지난 12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기준금리 0.5%p 인상 방침을 밝히면서 "2~3년간 집값이 크게 뛰고 가계부채가 늘어나면서 금융 불안의 한 원인이 됐다. 금리 인상으로 집값과 가계부채가 조정돼 빚을 내 집을 산 많은 국민들이 고통스러운 게 죄송스럽다. 하지만 거시경제 전반에 걸쳐서 보면 안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잔인하고 혹독한 일이지만 약소국인 우리나라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며, 국민들이 감내할 수밖에 없는 역사라는 거다. 경제·통화·금융 수장으로서 할 말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아쉬운 건 정부여당의 행보다. 미국발(發) 금리 인상에 따른 우리나라 국민들의 부동산 잔혹사는 일찍이 예견된 사안인데, 윤석열 대통령은 해외에서 스스로 잔인하고 혹독한 역사를 쓰느라 여념이 없었고, 국민의힘은 젊은 당대표를 잔인하고 혹독한 벼랑 끝에 몰아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무부처 장관은 집값 2억~3억 원 하락은 경착륙 수준이 아니라는 안이한 말을 늘어놨다. 2년이나 남은 미국 대선, 언제 끝날지 모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막을 내릴 때까지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릴 셈이었는지 진짜 잔혹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친일, 빨갱이 등 철 지난 구시대적 유물을 메만지는 일에만 집중했다.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해 죄송하다'는 발언은 행정부와 정치권에서 나올 말이었지, 경제·통화·금융 수장의 입에서 나올 게 아니었다.

글로벌 장기 경기 침체 가능성, 고금리·고환율·고물가 장기화 흐름, 현 우리나라 국민소득 등을 감안했을 때 부동산 시장은 마땅히 하락 안정화돼야 한다. 그러나 '급락'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여당은, 그리고 거대야당은 잔인하고 혹독한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국민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다행히도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6일 국회 국토부 국정감사에서 "경착륙은 막아야 한다. 급격하고 난폭한 강제적인 조정 과정이 되지 않도록 금융을 유예하거나 완화하는 지원책을 펴겠다"고 공언했다. 허언이 아니길 바란다. 진짜 부동산 잔혹사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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