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 신라와 그 발자취① 금관 편 [일상스케치(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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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 신라와 그 발자취① 금관 편 [일상스케치(60)]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2.11.1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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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유물 보유고 '국립경주박물관'
권력과 부의 상징 금관의 변천사와 특징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신라의 오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주에는 훌륭한 유물이 엄청나게 포진되어 있다. 시 전체가 문화재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진정 전국 학생들의 수학여행 성지답다.

막혀있던 숨통이 트였다고 할까. 옛 서라벌 수도인 경주 방문을 하니 새로운 향학열이 불타올랐다. 학창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 탐구와 호기심이 발동케 동기부여를 해, 고갈됐다고 느꼈던 에너지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왜 경주가 수십 년 동안 수학여행의 메카인지 충분히 납득이 갔다.

국립경주박물관, 생생한 역사적 현장

경주를 방문하면 반드시 가 봐야 할 곳이 있다. 바로 경주시 일정로 186 (인왕동)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크고 유물이 많다. 경주 및 경상북도 지역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경주는 수도였던 시대가 너무 오래전이라 건축물 등은 거의 소실됐기 때문에, 유적지는 많아도 상징적인 볼거리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금관 같은 화려한 세공 유물의 대부분이 출토되어 박물관에 있으니 관광객들이 경주를 찾으면 으레 찾는 대표적 관광 코스 중 하나다.

국립경주박물관은 크게 신라역사관과 신라미술관, 월지관(구 안압지관)과 옥외전시장으로 나뉘어 있다. 소장된 유물은 8만여 점으로 그중 3천여 점이 상설 전시 중이다.

옥외 전시장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 1962년 12월에 국보로 지정됨. ⓒ정명화 자유기고가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 1962년 12월에 국보로 지정됨. ⓒ정명화 자유기고가

먼저 통일신라시대의 동종.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완벽하게 한국종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8세기경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알려주는 예이다.

신라 경덕왕은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 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슬픈 설화로 인해 에밀레 종이라고도 불린다.

숭복사 터 쌍거북 비석받침. 통일신라 9~10세기. ⓒ정명화 자유기고가
숭복사 터 쌍거북 비석받침. 통일신라 9~10세기. ⓒ정명화 자유기고가

성덕대왕 신종 근처 옥외에 자리한 두 마리 거북이 붙어있는 '숭복사 터 쌍거북 비석받침'. 이 비석받침은 경주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 터에 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성왕(재위 785~798)의 능이 숭복사에 있었고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다. 이 비석받침 위에 최치원(857~?)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신라역사관

신라역사관은 기원전 57년에서 기원후 935년까지 천년왕국 신라를 만날 수 있는 전시관이다. 4개의 전시실이 있고, 선사시대의 도구부터 신라 시대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특히 국보 제188호 천마총 금관과 대릉원에서 출토된 다른 유물 등의 신라 시대 예술품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와 더불어 신라의 국제 관계를 암시하는 계림로 황금보검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서역풍 유리잔 등이 같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역사관 내부에서. ⓒ정명화 자유기고가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역사관 내부에서. ⓒ정명화 자유기고가

이번 회차에서는 신라역사관에서 유독 시선을 집중시킨 화려한 금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통일신라 시대의 융성함을 반영하는 유물로 그 시대 왕족의 생활상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익한 도구다.

신라시대 금관

한국의 왕관은 삼국시대까지는 상당히 독창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형태가 많았고, 특히 신라의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물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신라의 관은 재질에 따라 금관, 금동관, 은관, 동관으로 나누어진다. 은관은 초기에, 동관은 말기에만 일부 나타나는 점에서 금관과 금동관이 신라 전성기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관임을 알 수 있다.

신라 고분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금관은 공식적으로 5점이 출토되었고, 국가에서 압수한 도굴된 금관 1점을 합하면 모두 6점이 현존한다.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분산 소장중이다.

도굴 후 국가에서 압수한 금관 1점은 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경주시 교동의 폐고분에서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점의 신라 금관은 5~6세기에 제작된 것이며 약 100년의 시간 폭을 지닌다. 금관 출토 고분의 연대, 금관의 도안과 제작 기법에 주목해 보면, 황남대총 북분 금관 → 금관총 금관 → 서봉총 금관 → 천마총 금관 → 금령총 금관 순으로 금관 제작 순서를 추정케 된다.

(1)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보 제191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합뉴스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보 제191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합뉴스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신라시대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

현재 확인된 고신라 무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황남대총(皇南大塚)이다. 왕과 왕비의 둥근 무덤이 서로 잇대어져 있는 쌍분의 구조로서 길이는 120여 m에 달한다.

신라의 금관이 발견된 무덤은 대체로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금관이 왕을 포함한 왕비나 가족 등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한 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황남대총의 금관이다.

그중 왕의 무덤에서는 금동판을 오려서 만든 관이 5점 출토되었고,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왕비의 무덤[北墳]에서는 주검의 머리 부분에 씌워진 원형 그대로 금관이 출토되었다. 왕비의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出(출)’자 모양 세움 장식을 갖춘 금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파악된다.

이마에 닿는 머리띠 앞쪽에는 山 자형을 연속해서 3단으로 쌓아올린 장식을 3곳에 두었고, 뒤쪽 양 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다. 푸른빛을 내는 굽은 옥을 山 자형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는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달았다. 또한 원형의 금장식을 균형 있게 배치시켰고 어느 것보다도 굽은 옥을 많이 달아 금관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는 좌·우 각각 3개씩 대칭으로 굵은 고리에 매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바깥의 것이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가면서 짧아진다. 장식 끝부분 안쪽에는 머리띠 부분과 같은 푸른색 굽은 옥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매달았다. 발견 당시 금관과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들이 분리되어 있었다.

(2) 금관총 금관

경주 금관총 금관과 금제 과대. 신라 5세기경 왕관. 국보 제88호.(1962년 지정). ⓒ정명화 자유기고가
경주 금관총 금관과 금제 과대. 신라 5세기경 왕관. 국보 제88호.(1962년 지정). ⓒ정명화 자유기고가

금관총은 고신라 최고 지배층의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1921년 우연히 발견되어 그 존재가 알려졌으나 간단한 조사에 그쳐 고분의 구체적인 구조와 유물 부장 상태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많다.

고신라고분 중 최초로 금관이 발견되어 금관총이라 이름했으며, 이후 신라고분 발굴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전형적인 신라식 금관으로서 둥근 테 중앙과 좌우에 3개의 출자 모양 입식과, 뒤쪽에 2개의 사슴뿔 모양 입식을 부착했다. 표면에는 많은 점 무늬가 있으며 금제 달개와 곱은 옥을 매달아서 화려하게 장식했다. 관테의 양옆에는 금실과 금제 달개로 만든 드리개를 늘어뜨렸으며, 그 끝에는 금모를 씌운 옥을 매달았다.

널 내부에는 금관·귀걸이·팔찌·반지·허리띠·신발 등의 장신구로 치장하고 머리를 동쪽에 둔 유해가 1구 안치되어 있었으며, 관의 둘레에는 수백 개의 덩이쇠[鐵鋌]와 주조철도끼[鑄造鐵斧]가 부장되어 있었다.

이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외관은 신라금관의 전형이다. 이 외관 금관 외에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冠帽)가 관 밖에서 발견되었다.

또 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여 만든 허리띠를 말하며, 요패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 끝에 허리띠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인 교구를 달았으며, 과판에는 금실을 이용하여 원형 장식을 달았다.

(3) 서봉총 금관

서봉총 출토 금관. 보물 제339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연합뉴스
서봉총 출토 금관. 보물 제339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연합뉴스

경주시 노서동 신라 무덤인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 제339호로 지정되었다.

넓은 관테에 세 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과 두 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을 붙여 세운 관이다. 황남대총 북분이나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기본 형태는 같지만 안쪽에 길쭉한 금판을 십자형으로 교차시켜 모자 모양을 만든 후, 그 꼭대기에 세 가닥의 나뭇가지 모양과 나뭇가지 끝에 봉황 세 마리를 장식하였다. 관테에는 굵은 고리에 길쭉한 사슬 모양의 샛장식과 펜촉 모양의 드림이 붙은 드리개가 달려 있다.

山 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끝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된 사슴뿔 장식을 세웠고, 이곳에 원판과 옥으로 장식했다. 내부의 골격은 2개의 금 판대를 전후·좌우에서 관 테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교차시켰고, 그 위에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을 하나씩 붙였다. 관 테 좌·우에 길게 굵은 고리(태환식) 귀고리 드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4) 천마총 금관

경주 천마총 금관. 신라 6세기. 금 허리띠와 꾸미개. 국보 제188호.(1978년 12월 7일 국보로 지정). ⓒ정명화 자유기고가
경주 천마총 금관. 신라 6세기. 금 허리띠와 꾸미개. 국보 제188호.(1978년 12월 7일 국보로 지정). ⓒ정명화 자유기고가

천마총은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마총은 5세기 후반 혹은 6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릉급 무덤이다.

천마총 금관은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금관으로 유명하다. 아직 완전히 확정되진 않았지만 지증왕의 금관으로 추정한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높이 32.5㎝의 전형적인 신라 금관으로 묻힌 사람이 쓴 채로 발견되었다. 금관 안에 쓰는 내관이나 관을 쓰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널(관) 밖에서 다른 껴묻거리(부장품) 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그 화려함이 당시 팽창기에 있던 고신라(古新羅)의 국력과 강력해진 왕권을 상징한다. 천마총 관모, 천마총 금제 허리띠 등과 함께 세트로 구성되었다. 재밌는 것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재질을 조사한 결과 순도 83.5% 순금으로 판명되었다.

천마총 관모

천마총 금제 관모(금으로 만든 모자),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 국보 제189호, 1978년 국보로 지정. ⓒ정명화 자유기고가
천마총 금제 관모(금으로 만든 모자),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 국보 제189호, 1978년 국보로 지정. ⓒ정명화 자유기고가

이 관모는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내관으로 쓰였던 모자형 관이다. 금모(金帽)란 금으로 만든 관(冠) 안에 쓰는 모자의 일종이다. 이 금모는 널<관(棺)> 바깥 머리 쪽에 있던 껴묻거리(부장품) 구덩이와 널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자작나무껍질에 그린 천마도 장니(안장 부속품), 신라금관 및 금제 관모(금으로 만든 관리가 쓰던 모자), 금제 허리띠 등은 신라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다.

(5) 금령총 금관

금령총 금관(왼쪽)과 금 허리띠. ⓒ국립경주박물관
금령총 금관(왼쪽)과 금 허리띠. ⓒ국립경주박물관

금령총은 1924년에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에 의하여 발굴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부장품 가운데 특이한 금제 방울이 들어 있어서 ‘금령총’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고분의 연대는 6세기 초반에 조성된 걸로 추정된다.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 허리띠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가 출토됐는데, 피장자 머리맡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국보 제91호)가 특히 유명하다.

이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금령총 금관, 금제 허리띠, 감옥팔찌(嵌玉釧) 등의 장신구를 위시하여 1993년 국보로 지정된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채화칠기, 유리용기 등 많은 유물들이 있었다.

장신구가 대체로 소형인 점으로 보아 피장자는 나이 어린 왕족으로 추정된다. 15세를 전후한 아이의 무덤인데도 화려한 금관과 매우 많은 금제 장식품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6) 도굴된 교동 금관

금관. 신라 5세기, 교동 출토. 높이 12.8cm. ⓒ정명화 자유기고가
금관. 신라 5세기, 교동 출토. 높이 12.8cm. ⓒ정명화 자유기고가

이 금관은 정상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것이 아니라 교동의 폐고분에서 도굴된 것을 압수하였다.

신라 금관의 연원과 평가

위에 나열한 금관들은 구체적으로 어느 왕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왕의 관모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금관은 왕릉뿐만 아니라 왕비, 왕자와 왕족 여성의 무덤에서도 발굴되었다. 그 때문에 모든 금관이 곧 왕관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왕은 평소에는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신라 금관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 하늘이나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만 썼다. 그러다 왕이 사망하면 금관을 함께 매장했다.

신라금관의 연원에 대해서는 시베리아 유목 민족이 신라로 이주하면서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와 신라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타설이 많지만 신라인들이 북방의 황금문화를 수용하여 그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해온 도안에 접목, 금관을 창작하였던 것으로 보는 추정이 적합하지 않을까.

신라 금관은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매우 상징성이 강한 유물이다. 모두 신라의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 신라시대 금세공 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다음 편에서는 신라역사관에 소장된 금관 이외의 유물을 살펴볼 것이다. 천년 왕국 신라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신라 선조들의 우수성과 그 시대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심도 있게 산책해 보고자 한다.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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