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9.25 월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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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산되짚기(20)>신용선, 김동영 전 의원 보좌관
˝민산 절정은 YS단식과 신한민주당 돌풍˝
˝민추협 준비와 투쟁은 YS계가 도맡아…민산이 주축˝
2012년 10월 15일 (월) 윤종희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종희 기자)

고(故) 김동영 전 의원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정치역정에서 가장 중심에 서 있었으며 민주산악회(민산)를 태동시킨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초란 아호와 거창불곰이란 별칭으로도 많이 불려졌으며 최형우 전 의원과 함께 '좌동영 우형우' 불리며 상도동계를 이끌었다. 하지만, 김 전 의원은 YS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 지병으로 그의 일생의 꿈이었던 'YS의 대통령 당선'을 보지 못한 채 타계했다. YS의 대통령 임기 후반, 연속되는 악재가 이어질 때 많은 상도동계 사람들은 '김동영 의원이 살아 있었으면…'하면서 그의 정치력을 아쉬워했었다. 2001년 8월19일 김동영 의원 10주기를 맞아 상도동계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을 때 YS가 추도사에서 '김동영 의원이 살아 있었으면…"하고 울먹이자 장내가 숙연해지면서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들이 들리기도 했다.

'민산 되짚기' 20번째 주인공은 김 전 의원을 20대 후반부터 보좌하면서 그가 타계할 때까지 평생을 함께 했던 신용선 고문이다. 그는 직접적으로는 YS를 보좌하지 않았으나 고 김동영 의원이 생전에 상도동계에서 차지하던 비중으로 인해 상도동계의 내면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정치의 이면을 잘 알고 있었다. 신 고문은 김동영 의원 보좌관, 신민당 전문위원, 통일민주당 선전국장, 3당 합당추진 실무위원, 민주자유당 선전국장과 교수실장 그리고 교육원부원장을 역임한 후, 국민체육진흥공단 부이사장, 체육진흥기금 집행위원장 등을 지내고 현재는 모기업 고문으로 있다. 그와의 인터뷰는 2012년 9월 4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 신용선 고문은 김동영 전 의원을 뚝심있는 명 원내총무로 기억했다. ⓒ시사오늘 신원재 기자
-김동영 전 의원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고인은 이웃 마을 출신으로 제 부친과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습니다. 제 부친이 거창읍 한복판에서 자그마한 사업을 하셨고 저희 집은 어머니의 후한 접대로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어요. 또, 저희 거창 신씨 문중의 신도성 장관, 신중목 장관, 신중하 의원 등이 거창 지역 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을 하다 보니 저희 집은 자연스레 지역 야당인사들의 거점이 되다시피 했고 김동영 의원도 귀향하면 저희 집 출입이 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대학생이었는데 정치에 관심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연결이 됐습니다."  

-YS와 처음 만난 건 언제입니까. 그리고 어떤 느낌이었나요.

"박정희 대통령 재임2기 후반, YS가 전국을 누비면서 '3선 개헌반대 유세활동'을 벌일 때였습니다. YS가 거창에도 들렀습니다. 김동영 의원은 고향이다 보니 당연히 함께 했지요. 이때 고 장준하선생도 동행을 하셨더군요. 저희 집에서 점심을 모셨습니다. 서울 사람인 저희 어머님의 음식솜씨가 입맛에 맞았던지 YS와 그 일행들은 모처럼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면서 고마워 했습니다. 저는 밥 차려준 집의 아들이란 자격으로 YS와 겸상하는 영광을 누렸어요. 장준하 선생도 같이요. 이때가 YS와의 첫 상면이었지요. 그때의 YS는 야당인 신민당 원내총무로 명망을 날리고 있었고 젊고 잘생긴 촉망받는 정치인이어서 당시 대학생들에게는 우상이었습니다."

-김동영 전 의원 보좌관은 언제 했나요.

"1973년, 유신 후 이루어진 임기 6년의 제9대 국회였습니다. 김동영 의원은 거창 함양 산청의 3개군이 포함된 선거구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습니다. 당시 고인의 나이는 약관 39세였고 저는 27세였습니다. 당시에는 국회가 인정하는 등록된 보좌관은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정부 질문 준비 등 정책업무, 지역민들의 민원업무, 지역활동 그리고 언론인들까지 상대해야하는 정말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습니다."

"김동영, 고문 받은 사실에 침묵…자존심 강해"

신 고문은 김 전 의원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것에 대해서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1979년 김동영 의원이 재선된 후, 10·26사태가 났고 이듬해 5·17이 발생,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김동영 의원은 7월 초에 최형우 의원 등과 함께 잡혀갔습니다. 저도 예감이 이상해서 그때부터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해 8월말, 김동영 의원을 돌려보낸다는 모처의 연락을 받고 해가 막 지려는 초저녁, 명륜동 김 의원 집 앞 골목길에서 기다렸습니다. 작은 승용차에서 수사관 같은 사람들과 잠바 차림의 김 의원이 작은 옷 보따리를 들고 내리더군요. 무척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차에서 내린 김 의원은 막 지려는 태양을 잠시 망연하게 올려본 후, 우리와 반갑게 상봉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는 말하더군요. '자네가 잡혀올까 무척 걱정했네. 몸이 다칠까 싶어서야…'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 안에서 '고문'이 있었구나 하고요."

김 전 의원은 1979년 10·26사태로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1980년 봄, 민주화에 들뜬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민주헌법으로의 개정을 위해 국회헌법개정심의위원회가 구성되고 야당 측 대표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5·17과 함께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정치활동마저 규제됐다.

-김 전 의원이 당시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받은 고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요.

"본인은 그런 것에 대해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함께 끌려갔던 분들이 고문에 대해 많이 언급했지만 고인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가족들을 비롯 어느 누구에게도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어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YS, 김동영 공천 위해 탁자 뒤엎어˝

-YS가 김 전 의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특별한 일화가 있을까요.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선거 신민당 공천 과정 얘깁니다. 그 때는 일종의 중선거구제였기 때문에 공천을 받으면 당선은 떼 놓은 당상이었습니다. 당시 야당은 유진산 당수가 전권을 쥐고 있었고 YS는 공천심사위원이었지만 자기 사람을 심기에는 역부족인 소수 계파의 수장에 불과했습니다. YS는 다른 희생이 따르더라도 김동영 의원 공천에 올인을 했습니다. 거창 지역 공천을 놓고 타 심사위원들이 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의하자 YS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심사서류와 물잔들이 널려있는 탁자를 뒤엎어 버렸습니다. 결국 김동영 의원 공천을 관철시켰습니다."

YS는 선거과정에서도 반나절이나 걸리는 거창을 수 차례 방문, 김 전 의원의 당선을 도왔다.

"YS가 김동영 의원 당선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했습니다. 숙소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전화벨이 울렸고 YS의 목소리가 힘차게 들려왔습니다. '동영이 있어요?'"
 
"민산, 김동영 한옥 사랑방에서 태동"

-민주산악회 출범 당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시사오늘 신원재 기자
"민주산악회는 김동영 의원의 명륜동 한옥 자택 사랑방에서 태동했습니다. 정치규제에 묶인 후, 항상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 속에 살았던 김 의원이 독서 등으로 소일을 하면서 '화'를 삭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지인 몇 분이 산에나 다니면서 마음을 달래자고 하여 인근 북한산 등을 오르기 시작했고 가끔 저도 동참을 했습니다. 이때 북한산 중턱에 '민초샘'을 만들었고 이 샘은 그 후에도 많은 분들이 김 의원의 '혼'이 담긴 샘이라며 자주 찾곤 했습니다."

신 고문이 이 당시 김 전 의원과 등산을 함께 한 시점은 1981년 봄이 시작되는 3월인 듯싶다. 민산 시발을 1981년 6월 9일 김 전 의원이 YS에게 산행을 권유해 삼각산에 오른 것으로 보는 시각에 비춰서다.

"그러던 어느 날, 김동영 의원이 마침 자택연금이 해제되어 운신이 자유로웠던 YS에게 산에나 가자고 권유했고, 자연스럽게 김덕룡 홍인길 최기선 등 YS 비서진들도 동참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 두 사람 동참을 하면서 참여 인원이 많아지다 보니 식사를 할 때 준비물 분담과 연락 등의 필요성으로 인해 ‘조’를 편성했고 조별 책임자를 뽑았지요. 조직이 더 커지면서 명칭, 임원선정, 조별이름, 회칙, 선언문, 회가까지 만들어지는 등, 마치 정규 군대와 같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 때 독립군과 빨치산 조직이 연상됐습니다. 민주산악회 회가를 가만히 들어보면 어떤 느낌이 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민주산악회가' 작곡 작사를 한때 베스트셀러가 된, 6·25 이후 지리산에 고립되었던 공산당 잔당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씨가 했더군요. 하긴 세계 역사를 보면 빨치산은 공산당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독립군도 상대편에서 보면 빨치산이겠지요.(웃음)"

-산악회 활동에 필요한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회비는 특별찬조 외에 산행을 마칠 즈음에 총무가 등산모자 속에 받았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맘껏 '타도! 전두환!'을 외치면서 마음의 '화'들을 발산시켰어요. 당시 민주산악회원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이 많아서 자기가 먹을 것도 못 가져오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저렴한 반찬이나 상추 등을 분담시켰어요. 또 당시만 해도 평일 등산 간다는 게 낯선 때라서 배낭을 메고 나서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그 때야말로 정말 '동지애'란 것이 있었고 이때가 민주산악회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신 고문은 이 대목에서 이민우 신민당 전 총재에 대해 얘기했다.

"인석(고 이민우 총재의 아호)이 민산 회장을 맡았던 시절이었습니다. YS는 자택연금 되고 5공정권의 민주산악회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가장 심했던 여름철이었습니다. 모두가 지치고 힘들어 할 때였지요. 산행에 참석하는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어느 날 산행 때였습니다. 참여 인원이 10여 명에 불과했는데, 어느 회원이 우리도 '방학기간'을 갖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석은 단호했습니다. 그러면 민주산악회는 다시는 재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의 인석 선생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후 인석이 신한민주당 총재 시절, 민정당과 내각책임제 밀약설이 터졌고 이때 YS와 이민우 총재는 결별했습니다."

신 고문은 김동영 전 의원이 이민우 전 총재의 관계에 대해서도 술회했다. 

"YS의 문민정권이 탄생하고 이듬해 신년 초, 불현듯 인석 선생 생각이 나서 삼양동 언덕에 있는 인석의 낡은 집을 찾았습니다. 적막강산이더라고요. 상도동계에서도 소외된 듯한 노 선배 두 분이 인석과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동영이 형이 계셨으면 이렇지는 않았을텐데'라고 했어요. 인석 선생 아들이 끓여준 차를 마시고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허망한 생각이 들었어요. 저로서는 그때가 인석을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비록 과오가 있었더라도 그렇게 쓸쓸한 모습을 보니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도 김동영 의원이 있었다면 이 분을 이렇게 외롭게 해 드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동영 의원이 인석이 YS와 결별을 한 이후에도 자주 찾아 뵙고 용채도 드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YS, 단식 중 '물에 뭐 타서 마신다'는 모함에 병원 복도 물만 마셔"

-민산활동에 대해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듯 싶은데요.

"저는 민산이 가장 큰 역할을 한 시점은 '민주화를 위한 YS의 단식' 때라고 봅니다. 단식에 임하는 YS의 결의는 비장했습니다. 하면 한다는 상당히 단순한 어른이기에 아마도 목숨까지 담보를 하고 임했던 것 같았습니다. (1983년) 어느 날 저녁, 김덕룡(당시 YS비서실장, 원외)이 불러 가까운 동지 3명과 함께 삼각지에 있는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YS의 성명서를 내놓더군요. 직접 수기로 쓴 복사본이었습니다. 비밀을 요하는 내용이었기에 타자도 피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YS의 단식은 이루어졌고 단식 장소는 상도동 자택이었습니다. 내부의 일은 홍인길 의원이 맡았고 바깥 일은 김덕룡 의원이 분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국은 YS의 단식을 언론이 기사화하는 것을 일체 봉쇄했습니다. 4~5일이 지난 후부터 주요언론에 '최근의 관심사'라는 간단한 기사가 실리더군요. 궁금도 하고 해서 하루는 J신문의 K기자를 만나려고 편집국을 방문했습니다. 제가 잠시 있는 동안에도 '최근의 관심사'가 무엇이냐는 독자들의 문의전화가 빗발치더군요. 기자들이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요즘 같은 IT시대에서 보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요."

신 고문은 홍인길 전 의원의 칼춤 사건도 자세히 기억했다.

"YS 단식이 일주일째에 접어들자, '혹시나 YS의 건강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하는 권력당국의 우려에 기관원들이 상도동 자택에 난입, 허약해진 YS를 납치, 서울대병원으로 강제 이송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YS를 돌보던 홍인길 의원이 자택 앞 식육점에서 고기 자르는 커다란 칼을 들고나와 기관원들에게 저항한 사건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런데 서울대 병원에 강제 입원된 YS의 결의는 강경했습니다. 물 이외 일체의 음식물도 거절하고 '링거' 주사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시는 물도 '물에 무얼 타서 마신다'는 모함을 일소하기 위해서 병원 복도에서 누르면 나오는 음료를 사용했습니다.(요즘은 이 시설이 없어졌음) 그러다보니 YS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갔고 몸무게가 근 30kg까지 빠졌습니다."

-YS 단식 당시 민주산악회는 어떻게 활동했나요.

"언론보도가 봉쇄된 가운데 언론들은 제목을 '최근의 관심사'에서 '현안', '모 인사의 식사 문제' 등으로 바꿔서 게재, 국민들의 관심을 증폭시켰습니다. 이때 YS의 민주화를 위한 목숨을 건 단식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민주산악회원들은 우리나라 '민주사'에 길이 남을 만큼 눈물겨운 활동들을 펼쳤습니다. 골목길에서 버스 안에서 등산길 입구에서 경찰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다니면서 국민들에게 알리는데 전력들을 다했습니다. 본부에서 성명서를 만들지 못하다 보니 복사된 성명서 한 장을 주면 이것을 가지고 문방구 등에서 몰래 복사를 하다가 들키면 도망을 가는 등의 과정에서 체포되어 많은 민주산악회원들이 구류를 살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YS의 단식이 국민들에게 서서히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권력당국은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이었던 권익현 씨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보내 YS에게 완화 조건 등을 제시하며 단식 중단을 종용했지만 YS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YS의 건강이 우려할 정도로 악화된 것은 물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단식 중단을 간곡히 권유하자, YS는 자신의 단식이 잠자고 있던 민주화 열기를 다시 일으킨 것을 위안 삼아 후일을 기약하며 단식을 중단했습니다."

신 고문은 YS·DJ의 합작품이었던 '민주화추진협의회'에 대해서도 그 태동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민주산악회의 전국조직화의 성공 후, 전두환 독재에 대한 국내외의 저항열기 등을 읽은 YS는 민주화운동을 전 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DJ와의 연대가 필수임을 인식하고 양인을 묶을 수 있는 조직의 결성을 서둘렀습니다. 그 때 해외에 있던 DJ를 대신해 김상현 씨가 대리역을 맡았어요. 양측에서 5인씩 10인으로 기획위원을 뽑아 민주협 결성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김덕룡 이원종 홍인길 최기선 그리고 제가 포함되었습니다. 은밀히 사무실을 물색했는데, 이 당시 모든 일은 김덕룡 홍인길 두 분이 도맡았습니다. 건물 주인을 속이고 천신만고 끝에 종로 보신각 뒤의 13층 건물 제일 꼭대기 층을 예약했습니다. 그러나 정보기관이 어떻게 알았는지 건물주 측에 압력을 넣어 일방적인 계약해지를 통보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엘리베이트를 사용하지도 못한 채, 사무실 집기를 13층까지 짊어지고 옮겼지요. 무더운 여름 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짐을 옮기던 당시 동지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고생은 헛수고였다. 

"이튿날 나와보니 집기는 모두 내려놓아져 있고 사무실 문은 거대한 자물통으로 잠겨져 있었습니다. 며칠 후, YS로부터 종로2가 한일관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30~40명의 동지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식사를 끝내자 아무 말이 없던 YS가 일어서면서 자기를 따르라고 해요. 짐작이 가더군요. YS는 입을 꽉 다문채 힘차게 걸었고 우리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습니다. YS를 비롯한 우리 일행은 13층까지 걸어올라 갔습니다. YS는 준비해간 커다란 망치로 채워져 있는 자물통을 사정없이 내리쳐서 문을 열었습니다. 이 장면을 찍은 국내 언론은 없었습니다. 외신기자 몇 사람이 촬영을 했고 외신에 보도된 이 사진을 며칠 후 복사본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YS, 독재정권의 민추협사무실 봉쇄에 망치로 일격"

신 고문은 이 즈음 고 김근태 전 의원과 인연을 맺는다.

   
▲ ⓒ시사오늘 신원재 기자
"그 날부터 우리는 조를 편성, 텅빈 사무실에 돗자리를 깔고 연좌 농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13층에서 이러한 사실을 프린트한 내용을 뿌렸습니다. 이 때 인근에 사무실(민주청년연합)을 두고 있던 고 김근태 의원이 응원을 왔어요. 이때부터 저는 김근태 의원과 교분을 맺고 김 의원이 구류를 살 때마다 면회를 가서 몇 푼 안 되는 영치금을 넣곤 했습니다. 이렇게 돗자리 농성을 한 열흘쯤 했을까,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몽땅 종로경찰서로 끌려갔고 며칠 간 구류를 살았지요. 그 후 우리는 결국 사무실에 입주하는데 성공했으며 '민주화추진협의회'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 당시 모든 준비와 투쟁은 YS쪽 사람들이 도맡아 했아요. 물론 비용도요. 민주화추진협의회도 민주산악회가 주축이 되어 설립이 된 것입니다."
 
신 고문은 1985년 2·12 총선 당시, '신한민주당 돌풍'에서의 민주산악회 역할도 간과할 수 없는 민주화의 업적이라고 술회했다.

"5공 전두환 정권 시절, 야당은 제2중대라고 불리웠던 어용 야당 민한당이 들러리를 서고 있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이 연합해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는데, 이때 YS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어요. 당시 이민우 민주산악회 회장을 정치1번지 종로구에 출마시켰습니다. 모든 준비는 YS 지시 하에 움직였어요. 사실 민주산악회가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종로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신한민주당 돌풍'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신한민주당은 불과 보름만에 제1야당이란 기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총선 후, 어용야당이었던 민한당은 무너졌습니다. 민한당 당선자 대부분은 매일 시간대별로 한 두명씩 투항(신한민주당 당사에 와서 입당선언)하던 모습은 정말 코미디였습니다. 국민의 힘이 무섭다는 것을 실감했지요. 그렇게 하여 사상 초유의 103석 거대야당 '신한민주당'이 탄생한 것입니다."

-신한민주당 시절 김동영 원내총무의 활동이 궁금합니다.

"김동영 의원은 이때 야당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뚝심 있는 명 원내총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김 의원이 겉모습은 투사형으로 보이지만 상황을 보는 안목과 판단, 밀고 당기며 때로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 뚝심있는 협상력과 돌파력, 그리고 당내 내부 조율(당시 총재는 이민우 씨였지만 실질적인 당 오너는 당 밖에 있는 YS와 DJ였음)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주요 현안 때마다 세 사람에게 보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특히 향후 실제적인 '적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 DJ에게는 늦은 밤에라도 직접 찾아가서 설명을 하는 성실성을 보였습니다. 늦은 밤, 본회의장 로비에 있던 공중전화 부스 안(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었음)에 서서 세 사람에게 장시간 보고하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신 고문은 원내총무실 전문위원 직함으로 실질적인 비서실장 역을 했다. 살림살이는 물론 언론대책, 의원들의 실태파악 그리고 여당의 동향 파악 등으로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허다했다. 양말을 며칠 씩 신고 다녔고 창 밖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서야 계절의 변화를 알 정도였다.

-그 후의 민주산악회의 역할에 대해 평가해 주십시오.

"YS의 1987년 대선출마 시, 그리고 1992년 대통령 당선과정에서의 민산의 크나 큰 역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민주산악회의 방점은 ‘YS 단식’과 ‘신한민주당 돌풍’, 이 두 사건에 두고 싶습니다. 물론 그 이후 민주산악회원들의 역할도 지대했지만 조직이 너무 비대해지면 ‘초심’을 잃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권력’이란 마약이 옆에 존재하게 되면 어려웠던 시절의 동지애와 열정은 빛을 바라게 되지요. 그래서 권력이 주어진 이후의 민주산악회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향후 민주산악회의 역할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저는 민주산악회는 한국정치사의 한 역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했던 동지애가 사라진다면 그 조직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그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옛 동지들끼리 우정을 나누는 '민주산악회 동창회'로 존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좀 진취적인 역할을 찾는다면 향후 건립되는 'YS 민주센터'에서 '민주산악회의 역사'를 논하고 '한국정치발전을 위한 세미나' 등을 활성화시키는 데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날 신용선 고문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꼬박 꼬박 '어른'라고 호칭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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