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더탐사 ‘정치깡패’ 빗대…용팔이는 누구? [옛날신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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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더탐사 ‘정치깡패’ 빗대…용팔이는 누구? [옛날신문 보기]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2.11.30 17: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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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더탐사’에 “김의겸 등 주류 정치인 뒷배 믿고 정치깡패 역할해”
김의겸 “더탐사와 협업한 것 맞다…청담동 술자리 의혹, 심심한 유감”
김영삼·김대중‘대통령 직선제 개헌’ 강력 주장…‘통일민주당’ 창당 이르러
통민당 창당대회 방해 ‘용팔이 사건’…장세동 전 안기부장 연루 드러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28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로 출근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28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로 출근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동의 없이 자신의 자택을 찾아온 유튜브 매체 ‘시민언론더탐사’(이하 더탐사)를 ‘과거 이정재, 임화수, 용팔이 같은 정치 깡패’에 비유했다.

임화수·이정재는 이승만 정권을 도운 정치깡패다. ‘용팔이 사건’은 전두환 정부 당시 안기부가 개입해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한 사건이다. 조직폭력배였던 김용남의 별명 ‘용팔이’에서 비롯됐다. <시사오늘>은 더탐사가 한 장관에게 한 일과 한 장관이 언급한 정치 깡패 용팔이에 대해 알아봤다.

 

더탐사, 한동훈 퇴근길 미행부터 청담동 술자리 의혹·자택서 중계까지


지난 28일 한 장관은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출근길에서 “과거에는 이정재, 임화수, 용팔이 같은 정치깡패들이 정치인이 나서서 하기 어려운 불법을 대행했다”며 “더탐사 같은 데가 김의겸 같은 주류 정치인과 협업하거나 그 뒷배를 믿고 과거 정치 깡패들이 했던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는 지난 27일 더탐사 취재진 5명이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거주하는 아파트를 찾아가 현관문 앞에서 벨을 누르고 택배물을 살펴보는 등 전 과정을 실시간 중계로 방송한 데 따른 발언이다.

당시 자택에는 한 장관의 부인과 자녀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장관 측은 더탐사 취재진을 공동주거침입과 보복범죄 등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한 더탐사 취재진은 자택에 들어서거 전 방송을 통해 “우리가 강제 수사권은 없지만 경찰 수사관들이 기습적으로 압수수색한 기자들의 마음이 어떤 건지를 한 장관도 공감해 보라는 차원에서 취재해 볼까 한다”는 발언도 했다. 

더탐사는 지난 9월 한 달간 한 장관의 퇴근길을 자동차로 미행한 혐의로 입건돼 경찰 수사를 받았다. 이외에도 지난달 서울 청담동 한 술집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한 장관, 김앤장 변호사들이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청담동 술자리 의혹과 관련해 ‘한 장관과 윤 대통령을 봤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첼리스트 A씨는 경찰에 ‘남자친구 속이려 거짓말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민주당 김의겸 대변인은 지난 10월 2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종합 국정감사에서 청담동 술자리 의혹 근거로 첼리스트 A씨가 남자친구와 통화한 녹음파일, 이세창 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권한대행과 더탐사 기자 통화 녹음 파일을 제시했다. 당시 “자세한 내용은 더탐사에서 보도될 예정”이라고도 말했다.

한 장관이 “나를 스토킹 한 매체와 야합한 것이냐”고 묻자 김 의원은 당시 “내가 더탐사와 같이 협업을 한 것은 맞다”고 답한 바 있다. 김 의원은 의혹 제시 한 달만인 지난 24일 ‘첼리스트 A씨 거짓 진술’이 드러나자 기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청담동 술자리’를 봤다고 말한 당사자가 경찰에서 ‘거짓말이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 의혹을 공개적으로 처음 제기한 사람으로서 윤석열 대통령 등 관련된 분들에게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1987년 5월, 통일민주당 창당대회에 나타난 조직폭력배 ‘용팔이’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재조사…안기부 장세동 연루 밝혀져 


1987년 4월 25일 자 조선일보 ‘무법의 각목 부대’ 기사. 사진은 24일 통일민주당 서울관악지구당을 점거한 청년들이 각목을 들고 건물 밖으로 뛰어나와 지나던 챠량들을 막은 채 통일민주당원들을 뒤쫓는 모습이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87년 4월 25일 자 <조선일보> ‘무법의 각목 부대’ 기사. 사진은 24일 통일민주당 서울관악지구당을 점거한 청년들이 각목을 들고 건물 밖으로 뛰어나와 지나던 챠량들을 막은 채 통일민주당원들을 뒤쫓는 모습이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에서 김영삼이 깃발을 올린 신민당이 67석(24.27%)을 확보해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체제 순응적 관제 야당으로 기능하던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을 제친 것이다. 때문에 12대 총선 결과는 민심이 ‘신민당’에 일정 부분 기울었단 확신을 가능케했다. 

이후 YS와 DJ의 신민당은 ‘민주제 개헌 1000만 명 서명 운동’을 전개하는 등 본격적으로 대통령 직선제 요구에 나섰다.

그러던 와중 1986년 12월 24일, 영수회담을 하고 나온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갑자기 ‘내각제 수용’ 의사를 밝혔다. ‘내각제 개헌’ 은 당시 전두환 정권이 염두에 둔 방향이었기에, YS와 DJ는 강하게 반대한다.

결국 1987년 5월 YS의 상도동계 의원 35명과 DJ의 동교동계 의원 32명이 신민당을 탈당하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기 이른다. 통일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가 바로 ‘용팔이 사건’이다. 

1987년 4월 24일, 창당대회가 예정됐던 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사무실에 조직폭력배 100여 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4월 20일부터 통일민주당 20여 개 지구당에 난입해 창당대회를 방해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 1987년 4월 25일 자 <조선일보> ‘“각목부대” 정체는 누구냐 잇따르는 신당지구당 폭력사태’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5월 1일 중앙당창당대회를 앞두고 있는 통일민주당이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통일민주당은 24일까지 전국적으로 47개 지구당 창당을 마쳤는데, 이중 18군데의 지구당창당대회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청년들이 대회 장소를 점거, 대회를 방해하거나 당원들을 마구 구타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중략)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대회를 둘러싼 폭력사태의 공통된 특징은 ‘괴청년’들이 쇠파이프나 망치 각목, 심지어 못을 박은 각목, 쇠톱 등 흉기를 소지하고 집단적으로 대회장소를 사전에 점거해 당원 출입을 봉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당원·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한다는 점. (중략)

수원·화성에선 창당대회가 끝난 후에도 괴청년들이 가두로 진출, 당원·시민에게 행패를 부리고 사복경찰관까지 실신시킬 정도로 구타하는 등 무법천지를 만들어 10명이 경찰에 연행됐으나 곧 풀려난다는 것이 통일민주당 측 주장이다. 

서울 관악에서도 괴청년들이 사진기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차량 소통이 많은 차도를 종횡으로 마구 뛰어다녀도 경찰은 이미 신고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중략) 

콧수염을 기른 전주 출신 ‘용팔이’라 불리는 청년이 청주, 인천 중남구 및 인천동 북구에 차례로 나타나 폭력에 관여했으며, 마지막 장소인 인천동 북구에 나타났을 때는 콧수염을 깎은 상태였다고 통일민주당 관계자가 전했다. 

- 1987년 4월 25일 자 <조선일보> ‘“각목부대” 정체는 누구냐 잇따르는 신당지구당 폭력사태’

당시 사건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가 1993년 YS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진상이 밝혀진다. 검찰 조사 결과 안기부 부장이었던 장세동이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장세동이 ‘통일민주당’ 출현을 저지하기 위해 이택희·이택돈 전 신민당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사주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택돈 전 신한민주당 원내총무는 양김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할 때 반대했다. 이택희 전 신한민주당 정책위의장도 양김에 반기를 들고 이철승, 이택돈과 이민우 구상을 지지한 인물이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93년 3월 8일 자 <동아일보> ‘장세동 씨 “두 李 씨에게 돈 줬다” 용팔이 사건 수사’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을 배후조종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검찰에 출두하기에 앞서 8일 오전 본사 기자에게 사건 발생 전부터 이택돈·이택희 두 전 의원을 만나 통상적인 자금 지원을 해왔으며 이 돈은 안기부 은행계좌를 통해 정식으로 지출됐다고 밝혔다. (중략)

검찰 수사결과 장 씨는 평소 친분관계를 맺어왔던 이택희 전 의원과 사건 발생 1년 전인 86년 4월부터 안기부 궁정동 안가 등에서 수시로 만나 정치 현안에 대해 논의했으며 이때마다 이 전 의원에게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정치자금을 건네준 것으로 밝혀졌다. 

장 씨는 86년 12월부터는 삼청동과 궁정동 안가에서 두 이 전 의원을 만나 강성야당의 출현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을 협의했으며 창당방해 사건  발생 직전인 87년 4월 초에는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 실행내용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 1993년 3월 8일 자 <동아일보> ‘장세동 씨 “두 李 씨에게 돈 줬다” 용팔이 사건 수사’

비주류 일부가 깡패들을 동원하여 지구당 창당 작업을 방해했다.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한 용역 깡패들을 동원하여 지구당 창당 작업을 방해했다.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한 용역 깡패들이 행사장에 난입했다. 세칭 ‘용팔이 사건’이다.

물론 백주의 난동 뒤에는 안기부 등 정부 기관이 있었다. 창당 방해 사건은 부패한 정치인을 앞에 내세운 공작 정치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집요한 방해 공작에도 우리는 5월 1일 신당을 창당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13쪽.

장세동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 헌신적이었으며 ‘대통령의 신변뿐 아니라 기분도 경호해야 한다’는 일명 ‘심기 경호’까지 펼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장세동은 당시 단독행동이라 주장해 징역형을 살았다. 

당시 재판부는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에 대한 판결문에서 “이번 사건은 권력기관에 의한 공작정치가 실제 있었음을 입증한 사례로 과거 우리 정치의 부끄러운 부분을 단죄하기 위해 실형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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