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서석재를 통해 본 ‘정치공동체’…당신 생각은? [옛날신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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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서석재를 통해 본 ‘정치공동체’…당신 생각은? [옛날신문 보기]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2.12.13 0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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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계 2인자 서석재, 정치 위기서 책임지고 총장직 사퇴·탈당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 시사오늘(그래픽 = 김유종 기자)
<시사오늘>은 과거 정치적 공동체로 묶여 위기를 겪은 사례 중 하나로 1989년 4월 있었던 동해 후보 매수 사건을 살펴봤다. ⓒ 시사오늘(그래픽 = 김유종 기자)

최근 검찰이 사용한 ‘정치적 공동체’ 표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해당 표현은 법률상에 규정된 바 없고, 기존 판례 또한 찾아보기 어려워서다.

검찰은 지난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최측근인 정진상 전 당대표 정무조정실장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정치적 공동체’로 규정했다.

일각에선 과거 검찰이 국정농단 사태 때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 씨를 ‘경제공동체’로 규정하고 유죄 판결로 이어졌던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의견도 나왔다. 정 전 실장 수사를 발판 삼아 이 대표와 엮어 수사를 확대하려는 시도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지난달 22일 YTN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에 출연한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은 ‘법에 정치공동체라는 용어가 있냐’는 진행자 질문에 “나도 처음 들어본다”고 말했다. 

반면 같은 당 정청래 최고위원은 지난달 23일 페이스북에 ‘#나는 이재명 대표와 정치공동체다’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릴레이에 동참해달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틀 뒤인 지난달 25일 정 위원은 최고위원회의 공식 석상에서 “민주당 정치인과 당원은 당연히 (이재명) 당대표와 정치공동체다”라고 말했다.

‘공동체’는 ‘생활, 행동, 목적 등을 같이하는 집단’을 말한다. ‘운명 공동체’는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를 같이하는 집단’을 내포한다. 그런 뜻에서 보면 핵심 측근을 자처하는 정 의원의 공동체 발언은 이 대표를 지키고자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치적 공동체라 하면 정치 초창기부터 끝까지 공통의 철학과 가치를 공유하고 이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며 동고동락할 때 쓰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례로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서석재 전 의원의 관계처럼 말이다. <시사오늘>은 정치공동체의 ‘찐’ 의미를 조명해보자는 차원에서 YS와 서석재 전 의원이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위기의 순간을 돌파했는지, ‘동해 후보 매수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봤다. 

 

중간평가 유보로 궁지 몰린 민주당, 동해 재보궐 당력 쏟다 치명타
조직의 귀재로 불린 서석재지만 ‘공화당 후보 매수 사건’서 물러나


서석재 전 의원은 YS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최형우 전 의원과 함께 상도동계 2인자로 불렸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나라사랑실천본부를 이끌며 문민정부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해 상도동 내에서 조직의 귀재라 불렸다. 

YS와 서석재의 인연은 7대 총선을 앞둔 1967년부터 시작됐다. YS가 부산 서구에서 4선에 도전할 당시였다. 경쟁자는 공화당의 박규상이었다. 당시 YS는 야당인 데다 당선된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었다. 서 전 의원은 4·19 혁명 당시 동아대 학생회장을 지내 동문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인물이기에 정치권에서 영입의 손길이 이어졌다.

서석재는 미래를 책임져주겠다던 박규상을 돕기로 했지만, 부산중 1년 후배였던 이기택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린다.

이기택은 서석재에게 “김영삼 당선되면 국회 비서 자리를 약조 받도록 하겠다”고 설득했고, 실제로 YS에게 ‘서석재에게 국회 비서 자리를 약속하라’고 조언한다. YS는 선거를 5개월 앞둔 1월, 서석재를 만나 영입한다. 

상도동에 몸담게 된 서 전 의원은 캠프에서 조직 부장을 맡아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정치 공동체가 된다. 그는 11대 국회에서 민한당 소속으로 당선됐지만, 12대 총선에서 YS가 신민당을 창당할 때 탈당하고 당적을 옮길만큼 끈끈한 관계였다.

YS의 최측근이자 통일민주당 내 핵심 인물인 서석재였지만 당의 위기 앞에선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날 줄 알았다. 1989년 발생한 동해 후보 매수 사건 때 일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 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지만, 곧 분열된다. 민주화 세력 양대 거목이었던 YS와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서다. 반년 뒤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민정당의 노태우가 36.64%를 얻어 당선된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야권 통합 논의는 지지부진하게 진행됐다. 소선거구제 시행의 영향으로 통일민주당은 59석을 차지해 제1야당에서 제2야당으로 밀려나고, 평화민주당은 70석을 확보해 제1야당으로 올라선다. 야권의 갈등은 다음 해 ‘노태우 정부 중간평가’를 두고서도 이어졌다. 

김영삼은 1989년 초부터 13대 대선 때 노태우가 공약한 ‘중간평가’ 실시 여부를 두고 대여 투쟁을 벌인다. 통일민주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시 ‘올림픽을 치른 뒤 6·29 선언 및 선거공약 실행 여부와 관련한 중간평가를 받기로 한 약속’을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는 당론을 정했다. 

반면 여권 핵심부는 박철언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을 중심으로 1988년 말부터 평민당, 신민주공화당과 접촉하며 중간평가를 실시하지 않고 넘어가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1988년 3월 10일, 노태우와 김대중이 청와대 영수회담을 갖고 ‘중간평가를 신임과 연계하지 않기로 한다’고 발표한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89년 3월 11일 자 <동아일보> ‘중간 평가 3野 이견’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노태우 대통령과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가 10일 청와대 회담에서 “중간평가를 둘러싼 여야 극한대결이나 정국 경색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원만하고 조용한 가운데 치러질 수 있도록” 단순 정책 평가로 하자는데 합의했고 공화당 측도 이에 동조하는 입장임에 반해 민주당 측이 크게 반발하고 나서 중간평가 정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 1989년 3월 11일 <동아일보> ‘중간 평가 3野 이견’


YS와 통일민주당은 강경하게 주장하던 중간평가가 유보됨에 따라 사면초가에 빠진다. 4당 체제 하 정국 주도 방안을 찾는데 골몰하던 중, 4월 14일 있을 강원도 동해시 보궐선거를 ‘축소판 중간평가’로 의미부여하고 당력을 집중시키기로 한다. 여야 지도부가 수시로 동해를 방문해 정당 연설회를 갖는 등 선거전은 과열 양상을 띠었다. 그러던 중 YS와 통일민주당에 치명상을 입힌 동해 후보 매수 사건이 터진다. 

서석재 당시 통일민주당 사무총장이 이홍섭 공화당 후보에게 5000만 원의 수표를 제공하고 1억 원을 추가 제공하는 조건으로 후보 사퇴를 시켰다는 내용이다. 

공화당 측에서 이홍섭 씨의 진술을 토대로 밝힌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다. 평소 친분이 있는 동해시 거주 민주당원 장모 씨를 통해 은밀히 후보 사퇴 교섭을 받아온 이홍섭 씨는 12일 오전 10시 반경 인근 망상 해수욕장 내 솔밭에서 민주당 서석재 총장, 김일동 의원, 장 씨 등과 만나 매수 자금을 건네받았다는 것. 

이 자리에서 서 총장은 장 씨를 통해 수표 5000만 원을 전달하며 “선거후 이 씨 채무 1억 원을 추가로 정리해 준다”고 확약, 총 매수 액수는 1억5000만 원이라는 것.

- 1989년 4월 13일 <동아일보> ‘매수설·인신공격·진흙밭 싸움’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89년 4월 13일 자 <동아일보> ‘공화 李 후보 “순간의 실수로 엄청난 파문 온 것 같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최각규 공화당 사무총장은 이홍섭 후보로부터 압수한 수표 41장과 그의 자술서를 공개하며 “공당의 사무총장이 이런 더러운 공작에나 가담할 수 있느냐. 이 후보 주장에 의하면 서석재 총장이 ‘민주당 총재도 내용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하므로 그것도 조사해 자료가 나오면 고발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김영삼 민주 총재와 서석재 총장, 김일동 의원을 성토. (중략)

최 총장 발표가 있은 뒤 13일 새벽 서울로 압송돼 온 이 후보는 기자회견을 자청, “동해 선거구민과 친지들에게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순간의 실수로 엄청난 파문이 온 것 같다”고 심경을 피력. 

-1989년 4월 13일 <동아일보> ‘공화 李 후보 “순간의 실수로 엄청난 파문 온 것 같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YS는 서석재에게 즉시 서울 상경을 지시한다. 그리고 이틑날 아침 총재의 대국민 사과성명 발표, 서석재의 총장직 사퇴 및 통일민주당 탈당 방침을 정한다. 서석재를 탈당조처함으로써 민정당, 공화당에서 제기하는 총재 개입설을 비켜나간다는 전략도 포함됐다. 

김영삼 총재는 이날 마포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 후보 매수와 관련한 사과 성명을 발표,

“동해시 재선거 후보 사퇴 문제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커다란 심려를 끼쳐드리게 된 데 대해 진심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사죄드린다”고 말하고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며 동기와 내용이 어떠하든 우리 당의 서석재 사무총장이 관련된 데 대해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으며 그 책임을 통감한다”고 사과했다. 

- 1989년 4월 15일 <매일경제> ‘“책임 통감·사죄” 매수 시인 서석재 총장 탈당’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1989년 4월 15일 <동아일보> ‘김영삼 총재, 매수 파동 사과’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민주당은 15일 동해시 재선거의 이홍섭 공화당 후보 매수 파동과 관련, 김영삼 총재가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한편 선거대책 본부장이었던 서석재 사무총장이 매수를 자신의 책임하에 했다고 시인한 뒤 모든 책임을 지고 탈당하는 등 당 차원의 수습 조치에 나섰다. 

- 1989년 4월 15일 <동아일보> ‘김영삼 총재, 매수 파동 사과’

 

서 전 의원은 구속 40일 만인 5월 30일에 풀려난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동해 후보 매수 사건에 대한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하지만 문민정부 2년차인 1994년 12월 총무처 장관에 임명돼 실세로 자리했다.

이처럼 풍파와 질곡의 과정이 있었지만, YS와 서 전 의원 간 끈끈한 신의가 있었기에 고난의 파도를 넘어 영광의 순간까지 정치적 여정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서석재 전 의원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한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은 9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정치공동체’라면 정치철학을 긴밀히 공유하며 이를 목표로 함께 일해야 하는데 현재는 소수가 ‘핵심 측근’이란 이름으로 정치권에 목소리를 낸다. 이익에 따라 계파가 나뉘며 싸움에 치우쳐진 문제가 있다”고 전했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정치적 공동체’라는 표현은 정치 입문 초기부터 친분을 맺고 정치 성향, 방향에 대해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을 때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닐까싶다. 현재는 정치적 소명보다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가깝다”며 “친윤·비윤, 비명·친명, 과거 친박·진박·비박 등 논쟁도 당내 ‘주류’냐 ‘비주류’냐로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라 본다. 정청래 의원의 릴레이 캠페인도 ‘친문’이라는 주류에서 ‘친명’이라는 주류로 옮겨간 것이라고 본다”고 짚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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