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전설 ①> 삼학소주와 박정희 유신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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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전설 ①> 삼학소주와 박정희 유신헌법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2.10.22 0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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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돕다가 미움받아 몰락했다는 설, 그해 10월 유신체제 수립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유신 전설>은 故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기간 민간에서 떠돌며 전해 내려온 미확인 뒷얘기들을 다룬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삼학소주 사장이 유신 정권에 맞아 죽었대."

최근 한 시민이 전해준 이야기다. 이 말은 사실일까?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삼학소주(회장 김상두)는 부도가 난 것이지 삼학소주 사장이 어딘가로 끌려가 맞아 죽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젊은 시절 유신 시대를 경험한 시민에게는 이런 기억으로 남은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남은 것일까. 아마도 삼학소주가 문을 닫고 소주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자 관련 소문들이 떠돌다 그만, "삼학소주 사장이 죽었다"는 것으로 와전된 것은 아닌지.

1960년대 소주 맛을 아는 이들 중에는 "애주가의 애심" "소주도 삼학, 청주도 삼학"이라는 문구 또한 기억할 것이다.

ⓒ시사오늘
이 무렵은 세 마리 학(삼학소주)대 두꺼비(진로)의 싸움이었다.

일본강점기 때만 해도 귀족 술로 불렸던 소주는 1960년대부터 서민의 술로 자리 잡게 된다. 그 길을 함께 한 소주가 바로 삼학소주와 진로 등이었다.

특히 삼학소주의 발전은 눈부셨다. 1957년 전남 목포에서부터 생산한 삼학은 진로보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1966년부터 소주 업계 1위를 차지한다.

1970년 고액의 세금을 낸 법인 순위만 봐도 삼학의 자산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다. 1970년 3월 3일자 경향매일에 난 관련 순위를 보면, 진로주조는 20위인데 반해 삼학산업과 삼학양조는 각각 15위(6억5천2백만 원), 27위(4억4천9백만 원)에 올라있다.

하지만 삼학소주는 1972년 5월 29일 문을 닫으면서 애주가의 곁에서 멀어지게 된다. 또 그 뒤로 "순곡주에 대한 삼학의 자부심"이라는 광고 문구와 함께 삼학소주 맛을 더는 맛볼 수 없게 됐다.

소주 시장을 평정하며 연평균 5억 여 원의 세금을 내던 굴지의 기업이었지만 1971년 11월 일명 삼학소주 탈세 사건 혐의로 김상두 회장이 긴급 구속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설에 의하면, 삼학소주 부도의 진짜 배경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호남에 기반을 뒀던 삼학은 1971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댔고, 이에 노한 박정희 정권이 보복정치를 했다는 설이 많다.

71년 대선에 나갈 당시, 박 대통령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라고 호소까지 했지만, 야당 후보의 돌풍에 근소한 차이로 어렵사리 당선하게 된다.

마지막 선거라고 하면서까지 고군분투했던 공포가 너무나 컸든 탓일까. 그해 10월 박 대통령은 사실상의 영구집권을 가능케 하는 유신헌법을 공포한다.

대통령 간접선거, 대통령 중임제한조항 철폐, 대통령 임기 연장 등은 물론 반대세력을 원천 봉쇄할 수 있는 개헌이었다.

민주주의 요구가 거세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유신체제를 수립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그래서인지 야당으로 흘러가는 돈줄을 막고자 삼학소주의 숨통을 끊어놓았다는 흉흉한 얘기가 설득력을 얻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삼학소주 맛은 진로 맛과는 다르다고 전해진다. 그 맛을 경험해 본 소주 애호가 중에는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삼학소주 맛을 종종 그리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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