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성경을 덮어놓고 읽기만 하지 않는 읽음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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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 “성경을 덮어놓고 읽기만 하지 않는 읽음이 필요”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0.2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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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성경을 어떻게 읽을까-2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함석헌은 성경은 낡은 글이므로 읽을 때는 글자에 붙잡히지 말고 그 글 속에 들어있는 현대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말씀>1956년 5~6월호에 “하나로 통일하는 힘-로마서 연구”(19-7)를 발표했는데, 거기에서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글을 그대로 다 믿는다면 차라리 글 없는 것만 못하다’ 한 맹자의 말은 성경을 읽을 때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만 또 사람의 심정과 경험을 통해서 온 사람의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 말씀인 편으로 하면 한 긋(劃)한 점도 잘못이 없고 길이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람의 말인 편으로 하면 시대가 나감을 따라 낡은 것이요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는 글자에 붙잡히지 말고 그 산 속뜻을 읽어내도록 끊임없는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변치 않는 영원 절대의 것이 변하는 일시적 상대인 (데)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영원 절대인 데 대하여는 이러구저러구 없이 믿고 받아드릴 것이지만, 그 일시적 상대인 데 대하여는 들을 줄을 알고 들어야 한다. 글은 굳어졌는데 뜻은 자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에 끊임없이 새 해석, 고쳐 씹음이 필요한 까닭이다. 덮어놓고 믿는 믿음에 이르기 위하여 덮어놓고 읽기만 하지 않는 읽음이 필요하다. 세상 모든 것을 덮어놓고 믿는 믿음은 열어젖힌 마음의 칼로 성경을 사정없이 두려움 없이 쪼개고 열어젖혀서만 얻을 수 있다.

성경은 덮어놓고 읽을 글이 아니요 열어놓고 읽을 글이다. …성경은 연구해야 하는 책이다. 연구하지 않고 믿으면 미신이다. 성경은 먹어 없앨 양식이다. 밥은 없어지고 생명이 깊어야(遺) 한다. 성경은 양식이라기보다 산 씨알이다. 씨알이기 때문에 그 첨 형상이 없어지도록(까지) 키워내야 한다.”

함석헌은 성경을 덮어놓고 읽기 때문에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예로 속죄에 관한 성경말씀을 든다.

“많은 열심 있는 사람들이 로마서는 성경 중에서도 가장 복음적인 글이라 하여 이것은 건드릴 수 없는, 건드리면 죄가 되는 것처럼 만들어, 덮어놓고 읽는 글로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욀지언정 감히 그것을 씹어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알고도 모른다. 이것이 속죄 소리 모르는 신자 없으면서도 사실 속죄 경험은 별로 없는 까닭이다.

그렇게 속죄는 다 된 듯 말하는 수많은 천도교도 신교도가 다 정말 속죄를 받은 사람이라면, 일반 신도는 내놓고 신부 목사만이라고만 해도, 우리나라에 큰일이 났을 것이다.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인 것은 (속죄 받았다는 말이) 다 거짓말인 증거다.”

함석헌은 그러므로 로마서를, (신약성경을, 구약성경도), 덮어놓고 읽지 말고 열어놓고 읽으라고 한다. 열어젖히고 보면 로마서는 낡은 글이라고 한다.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한 점도, 한 획도 틀림이 없다고 배워온 기독교인들에게 로마서는 고문서일 뿐이라고 하는 함석헌의 이 말은 엄청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는 쓰인 지가 이천년이나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상기해도 그 책이 고문서라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고문서이듯이 로마서도 고문서다.

바울과 우리 사이에는 이천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그 동안에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 함석헌의 말대로 하면 그 동안에 “인간의 사상은 그때보다는 훨씬 달라졌다.” 어떻게 달라졌나? 함석헌의 말을 따라가며 요약해보자.

첫째, 바울이 산 세계는 우리가 산 세계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은 것이었다. 바울이 경험한 로마제국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조그마한 지역에 불과하다. 세상의 끝은 스페인인 것으로 알았다.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와 호주 등 남양, 남북 아메리카와 북극의 에스키모, 아프리카의 부시맨, 포텐토트 같은 여러 나라가 있는 줄은 몰랐다. 따라서 그는 인도의 베다경과 브라만의 종교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사실도, 당시 낡아빠진 인도 사회에 새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불교에 대해서도, 노자나 공자 같은 성현들이 히브리인의 하나님과 거의 같은 하늘을 믿고 있는 줄도 몰랐다. 당시 바울이 이 모든 종교와 사상에 대해 알았더라면 로마서도 오늘의 그것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둘째, 종교 뒤에는 언제나 세계관이 서는데, 오늘의 세계관은 바울 당시의 세계관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당시의 세계관은 지구가 도는지 하늘이 도는지도 분명히 몰랐고, 땅속에는 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는 지옥이 있고 하늘 위에는 낙원이 있는 줄로 알았다. 바울이 삼층 하늘에 올라갔었다는 성경 기사가 있듯이 당시에는 하늘이 삼층 구조로 되어있는 줄 알았다. 태양계와 무수한 은하계로 구성된 억억 광년의 대우주와 성운(星雲)과 우주선(宇宙線)이 상식이 되고, 우주선(宇宙船)이 하늘을 나는 오늘날에는 바울 당시의 우주관은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바울 당시의 세계관에 따라 쓰인 성경의 천당과 지옥에 관련된 기사도 당연히 현대적인 패러다임에 따라 새로이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바울은 오늘의 과학을 도무지 몰랐다. 박테리아가 있는지 없는지, 어떤 병이 전염이 되며 어떤 성질이 유전이 되는지, 생리와 심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사회생활에 어떤 법칙이 들어있는지, 만유인력이 있는지 없는지, 바울이 지중해에서 만나 죽을 뻔했던 유라퀼로 태풍이 어떤 물리적 원인으로 왔는지 하나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초등학교 학생도 그것들을 다 알고 있다. 만일 바울이 이런 지식을 당시에 갖고 있었다면 로마서의 기사는 많이 달라졌을지 것이다.

또 바울은 요새 사람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준 진화론에 대해 전혀 몰랐다. 진화론이 옳으냐 그르냐는 딴 문제로 하고(나는 생물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러한 논쟁이 있다는 사실만 바울이 알았더라도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가 신화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영향이 로마서의 집필에 영향을 미쳤을지 누가 아는가?

바울이 살던 로마 시대의 살림과 우리가 사는 지금의 살림이 다른 또 하나의 차이는 지금은 극도로 발달한 기계문명의 시대라는 사실이다. 로마시대에는 기계라야 간단한 농기구와 연장, 칼과 활과 살창, 간단한 운반수단인 수레와 배 등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기계 속에 파묻혀, 기계의 한 부분이 되어 살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심리는 로마서를 쓰던 당시의 바울의 심리와는 매우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바울의 심리로 쓴 로마서를 오늘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오늘의 시대가 바울의 시대와 크게 다른 것은 인격 관념에서다.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 제도가 없다. 사람이면 누구나 “나는 나다” 하는 인격적 자각이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예수의 종’이라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예수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는 로마서의 기사를 글자 그대로 믿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에서 누누이 다뤘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상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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