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허연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하나님을 상상하면 그것은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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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 “허연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하나님을 상상하면 그것은 우상”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0.2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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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성경을 어떻게 읽을까-3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로마서는 낡은 책이다. 고문서다. 그러나 고문서라고 해서 반드시 소용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바울의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에는 그만큼 깊은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간격을 메운 상태에서 로마서를 읽자는 말이다. 다시 함석헌의 말을 들어보자.

“평면적인 사진으로는 참 모양을 알 수 없듯이 말(言)에서 시대를 빼버리면 그 산 뜻을 알 수 없다. 낡았다 함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이 이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기를 힘써보는 것이다.

혹은 바울을 지금 사람으로 만들어보려 애쓰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만 입체적인 이해에 들어갈 수 있다. 종교경전은 영원한 진리라 하지만 그것처럼 평면 사진의 대접을 받는 것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상이다.

존경은 받으면서 실력은 없다. 그렇게 시키는 것은, 그렇게 민중을 만들어놓고  중간에서 제물을 취해먹자는 직업 종교가의 일이다. 로마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영원의 테두리 밑에서 보아야 알게 된다.

영원의 테두리는 시간차원(時間次元)에 서지 않고는 보이지 않는다. 로마서를 낡은 책이라 함은 그것을 시간차원에 서서 보자는 말이다. 영원의 내다봄(通景) 속에 놓을 때 거기서는 모든 시간의 제약(制約) 아래서 된 것은 다 뒤로 물러간다. 바울의 인간성이(인간적 한계가) 분명해져야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드러난다.

바울을 영원화하면, 발 앞에 서있는 나무로 저 앞 경치를 가리는 것 같아,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 뵈고 만다. 나무는 뒤로 물러나게 되어야 나는 영원을 본다. 로마서가 낡았다 함은 바울을 시간 안에서 죽임으로써 영원 속에 살리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로마서는 바울이 산 특수한 시대상항에서 그 시대의 패러다임에 따라 그의 인격으로 쓴 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잔 말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당시의 패러다임인 신화적 세계관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신화적 세계관을 떠나서는 로마서는 물론이고 다른 어떠한 글도 쓸 수 없었다.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신화적 세계관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설사 바울이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로마서를 썼다 하더라도, 물론 바울이 현대적 세계관을 알고 있었을 리도 없지만, 독자들은 그 글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쓴 글이 아니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시대가 달라지고 패러다임이 달라진 현대에 와서는 로마서도 현대의 패러다임에 따라 현대인의 인격으로 쓴 책으로 고쳐 읽자는 말이다. 그래야 현대인에게 로마서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함석헌은 <하나로 통일하는 힘-로마서 연구>를 쓴지 14년 후인 1970년 4월에 ‘어떻게 새로워질 것인가’(5-278)라는 제목의 글을 잡지 <새 생명>에 싣는데, 이 글에서 다시 한 번 세계관의 성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 말씀은 산 생명이지만 인간이 그것을 그대로는 이해하는 수가 없습니다. 이해되려면 그 말씀이 육(肉)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것이 말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어서 말이 있게 된 것이지만, 말은 해놓으면 자라지 못하고 고정이 되어버립니다. 문제가 여기서 일어납니다.

책으로 된 성경은 고정된 말인데 인간의 세계 이해는 자꾸 자랐습니다. 이미 2천 년 전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2천 년 전의 그대로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영원한 진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원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자라는 데 따라 그 쓰는 상징도 달라져야 할 터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것이라 변함없다 하는 생각에 감히 새 상징을 쓸 생각을 못 합니다. 이것이 생명인 말씀과 그 말씀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의 말과 혼동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올라갔던 삼층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때 쓰였던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때 사람은 삼층천을 가지는 세계구조 속에 살았겠지만 오늘 우리는 그보다는 훨씬 더 크고 깊은 구조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천당· 지옥을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좋았습니다.

단테만 해도 칠층 지옥만 가지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세계는 훨씬 더 넓고 깊고 정신화 됐습니다. 그때 사람은 눈 하나만 가지면 살 수 있었지만 오늘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눈으로 보는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의 세계와 극대의 세계와 극소의 세계입니다. 그만입니까? 누구의 말과 같이 5차원의 세계에 사는지도 모릅니다. 길이와 넓이와 높이의 옛날부터 있는 3차원에다가 아인슈타인으로 인하여 생긴 시간=공간의 4차원, 그리고 그것과는 엉뚱한 ‘사랑’의 다섯째 차원입니다.

그렇다면 천당 지옥도 좀 더 깊이 좀 더 정신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세계에 죄악이 넘치고 악을 행하는 권력자들이 방약무인한 것은 낡은 지옥은 깨져버리고 새 지옥은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권위 있는 지옥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할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어디다가 지을 것입니까? 어떻게 근대화한 기술을 가지고도 못 벗어나는 지옥, 어떤 철학을 가지고 죽었다고 선언해도 자꾸만 살아나는 하나님을 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천지는 옷처럼 낡아질 것이요 두루마리처럼 말려갈 것이라 한 성경말씀을 잊었습니까? 낡은 세계의 천당 지옥에 말라붙어 있는 크리스천 그 세계가 함께 없어질 것입니다.”

함석헌은 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의 ‘머리말’(9-20)에서 창세기도 신화의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기자가 오늘날에 났다면 이 시대의 대표적 지식인 진화론의 옷을 입혀 썼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서의 문구는 영계의 진리의 인사적(人事的) 표현이다. 진리가 본래의 모양 그대로 우리에게 올 수는 없고, 우리에게 전해질 때는 우리가 생활하는 그 사회 그 역사의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항상 그 시대의 최고 지식을 표현의 의상으로 삼는다. 창세기는 당시의 인류가 가지는 지식을 빌어 우주의 정신적 역사를 쓴 것이다. 창세기 안에 당시 인근 민족의 신화의 영향이 들어있다고 하면 매우 모욕이라도 당하는 것 같이 분개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럴 것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교도할 때는 마치 워싱턴의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천지의 창조주인 하나님의 존재함을 가르치기 위하여 일부러 비밀히 종자로써 워싱턴의 이름을 써서 밭에 뿌리고, 그것이 난 후 누구든지 반드시 이것을 심은 사람이 있을 것이요 우연히 된 것이 아닌 것 같이, 이 천지 만물도 그 지으신 주인이 계시다고 말해주었다는 것과 같이, 저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사물로써 하는 것이고, 당초부터 최고의 형상 그대로를 주지 않는다.

어린 아이에게는 철학적 어귀나 시로써 하는 것보다 우루루 울리는 뇌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르치는 데 더 효과가 있다. 창세기는 그 쓰던 당시에 있어서 최고의 의상을 빌어서 한 것이다. 창세기 기자가 만일 오늘날에 났다면 그는 진화론의 말을 빌어서 쓸 것이다.”

앞에서 “책으로 된 성경은 고정된 말인데 인간의 세계 이해는 자꾸 자랐다”고 말했는데, 함석헌은 인간의 세계 이해가 자라듯이 하나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자란다고 말한다. <씨알의 소리> 1976년 1·2월호에 쓴 ‘세계구원의 꿈’(9-268)에서 그의 말을 발췌해보자.

“하나님은 다된 하나님이 아니요 영원히 자라는 영원한 미완성이다. 인간을 구원하러 인간 속에 내려와서 같이 짐을 지는 하나님이 자라는 하나님이 아니고 될 수 있을까?

이 생각이 정통적인지 이단적인지 그것은 상관 아니 하지만, 이것이 종교를 역사적인 자리, 더구나 동양적인 자리에서 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진 것만은 사실이요, 그럼으로써 문제를 풀어가는 데 좀 더 힘을 얻었다고 자신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형상을 입혀서 이해하곤 한다. 예를 들면 하늘에 설치한 보좌에 허연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앉아있는 형상으로 하나님을 상상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상은 우상이다. 시대가 흐르고 인간이 자람을 따라 하나님 관념에서 이러한 형상을 계속해서 제거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을 영적 관념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그 영적 관념도 시대가 나감을 따라 자란다. 모세의 하나님이 율법에 중심을 두었다면 예수의 하나님은 사랑에 중심을 두었듯이.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란다고 하는 함석헌의 말은 옳다.
 
역사의 흐름을 따라 사람도 자라고 하나님도 자란다면 역사적으로는 사람이요 영적으로는 하나님인 예수가 자라지 않을 리 없다. 함석헌이 <씨알의 소리> 1978넌 10월호에 쓴 ‘예수의 비폭력투쟁’(3-319)에서 이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다.

“참 의미에서는 나는 성경 안에 갇힌 예수도 믿고 싶지 않다. 또 성경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계시라 한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성경에 갇힌 것 아니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분석 비판하여서 예수의 사실을 다 밝힐 수도 없을 것이고, 또 밝힌다 해도 예수는 그것으로 다가 아니다.

예수라는 인격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 예수가 인류를 건지기도 했지만, 또 역사 건지는 생명이기 때문에, 역사는 또 예수의 인격을 키우고 있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인격이 있다. 그것은 영원한 미완성이다. 역사적인 예수는 그것의 그때의 나타남뿐이다. 그러므로 죽었다고 했고, 죽은 가운데에서 부활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그러한 영원한 한 사람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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