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열차, 떠오르는 추억 [일상스케치(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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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열차, 떠오르는 추억 [일상스케치(70)]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3.02.05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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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에 몸을 싣고 청운의 꿈을 안고
소녀는 어느덧 흰머리 희끗희끗
빨라진 교통 문화, 느림의 미학은 사라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한동안 여행은 꿈도 못 꾸던 시간이 지났다. 요 근래 봇물 터지듯 해외여행을 나서는 관광객들이 줄을 이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닫혀있던 문고리가 열리면서 설날 연휴 등를 이용해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또 그만큼 어디론가 떠나기 좋은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은 다양한 교통수단을 통해 여행 천국인 세상이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여행의 최고봉은 열차를 통해서가 아닐까. 승용차 버스 비행기 등보다 정겹고 아스라이 그때 그 시절 추억이 떠오르는….

정동진행 야간열차

친구는 떠나도 기차는 달린다. 무정하기 짝이 없는…. 황량하고 쓸쓸한 맘이 든다. ⓒ연합뉴스
친구는 떠나도 기차는 달린다. 무정하기 짝이 없는…. 황량하고 쓸쓸한 맘이 든다. ⓒ연합뉴스

과거, 겨울엔 차창 밖 설원의 풍경과 동해 바다를 볼 겸 정동진행 무궁화호 밤 열차를 수차례 이용했다. 밤 12시 청량리역에서 출발하여 새벽 일출을 보고 강원도 산간 지역을 돌아 나오며 설경을 바라보는 코스는 기차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라는 동요가 절로 떠오르는 산간 지방 작은 마을을 지날 땐 왠지 모를 슬픔과 향수가 느껴졌다. 때론 속세를 벗어나 잠시 숨어버리고 싶은 곳이었다.  

봄기운이 올라오면 홀로 동해안이나 산간벽지로 기차여행을 떠나고 싶다. ⓒ연합뉴스
봄기운이 올라오면 홀로 동해안이나 산간벽지로 기차여행을 떠나고 싶다. ⓒ연합뉴스

이제 해동하고 봄기운이 모락모락 올라오면 전국 산야를 찾아 달려갈 태세로 상춘객들은 대기 중이다. 난 홀로 기차에 몸을 싣고 동해남부선이라도 타보고 싶다. 학창 시절 강릉 경포대 양양 하조대 등을 찾아 같이 신나게 누비던 친구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함께 마음 달랠 길 없다. 

경전선 개통 화동(花童)으로

1966년도 진주-순천 간 경전선 개통 모습. ⓒ연합뉴스
1966년도 진주-순천 간 경전선 개통 모습. ⓒ연합뉴스

오랜 세월 열차 애용자로서 내가 탄 최초의 기차는 경전선이다.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역에서 출발하여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일대의 시·군을 경유하여 광주광역시와 연결되는 남부 지방의 간선 철도 노선.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한다는 뜻에서 경전선이라 이름 붙여졌다.

1966년 진주-순천 간 약 80.5㎞ 가 개통되면서 경전선이 완공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난 경전선 개통 기념으로 한복을 입고 '화동'으로 하동역 개통 현장에 참석한 경험이 있다. 이 당시는 몰랐다. 이 열차를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이 나이까지 날 태워줄지는.

문화적 풍토가 빈약한 시골 소녀였던 나에게 기차는 신기한 대상이었다. 외지로 미지의 세계로 나간다는 기대와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매개물인 셈이다.

비포장 먼지 가득 버스로만 다니던 친척 집 부산행은 경전선이 개통되면서 이동이 용이해졌다. 고향마을에서 도회지로 나갈 궁리 가득했던, 호기심 충만 어린 소녀는 처음엔 할머니 부모님 따라 타지 콧바람을 쏘이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혼자라도 가겠다고 엄마 졸라 떠났으니 나 홀로 여행의 서막이었다. 근심 어린 얼굴로 손을 흔들던 엄마, 설렘 가득 신나서 손을 흔들던 나. 물론 부산역에선 사촌 오빠랑 친척들이 어린 나그네를 맞았다.

부산 가던 중 지금은 아예 없어진 매점 수레 차를 끌고 다니며 팔던 먹거리 사 먹던 모습이 떠오른다. 기차 안 능금이랑 삶은 계란, 사이다는 유달리 맛있었다. 중간에 삼랑진역인가에서 잠시 판매상이 들고 다니며 도시락도 팔았다. 아! 그 도시락의 꿀맛. 오성급 호텔 뷔페 이상의 맛으로 느껴진 여행의 풍미 가득했던 어린 시절 풍광이다. 이 또한 그 시절 기차여행의 묘미였다.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고향역

그 후 여중 시절 하동역과 진주역 간 통학을 했던 추억의 구간이기도 한 경전선. 한동안 눈 비비며 새벽같이 일어나 첫 열차를 타고 오가던 시절이 있었다. 등하굣길은 진주로 통학을 하던 중고등학생들의 유일하고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큰 역할을 했다. 그 당시엔 하동 진주 간 1시간 10분이 소요됐다.

그리고 경전선과 쌍두마차로 활용했던 순환열차. 고속철이 생기기 오래전 서울에서 호남 전라선, 경전선을 거쳐 다시 서울로 상경하는 경부선, 순환열차라고 있었다. 여고시절 방학을 이용해 귀향할 땐 친구들이랑 함께 밤새우며 날이 새는 정치를 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역에 내렸다.

이 열차는 자정에 출발해 밤새 아침까지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에 긴 여행의 고단한 승객을 위해 침대칸이 있었다. 지금은 국내 열차에 침대칸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할 것이다. 여고시절부터 결혼해 첫아이를 안고 타고 다니기도 했으니 참 친근한 노선이었다.

전남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복선 첫 열차가 경남 하동군 하동 철교를 지나고 있다. 이 복선화 작업으로 73분이 소요됐던 진주-광양 구간의 소요시간이 31분 단축됐다. 2016년 7월 14일. ⓒ연합뉴스
전남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복선 첫 열차가 경남 하동군 하동 철교를 지나고 있다. 이 복선화 작업으로 73분이 소요됐던 진주-광양 구간의 소요시간이 31분 단축됐다. 2016년 7월 14일. ⓒ연합뉴스

이토록 추억 어린 경전선이 환골탈태하는 계기가 발생했다. 최초 완공 후 50년 만인 2016년에 경남 진주-전남 광양 51.5㎞ 구간의 복선화 사업이 마무리되면서다. 그 과정에서 정든 고향역은 아쉽게도 폐역이 되어 50년 역사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수많은 추억이 가득했던 역사였는데…. 빛바랜 오랜 앨범처럼 뇌리에 가득 채워져 남아있다.

새역사는 아주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지만 아직도 왠지 발에 맞지 않는 새 신발처럼 어색하고 낯설다. 그렇지만 어떡하리. 세월 따라 시대 따라 받아들여야지.

열차는 추억을 싣고 끝없이 여정을 함께 한다. ⓒ연합뉴스
열차는 추억을 싣고 끝없이 여정을 함께 한다. ⓒ연합뉴스

기차가 오가던 추억의 길목

'코스모스 피어있는 그리운 고향역'라는 대중가요 가사가 떠오르게 만드는 게 그 시절 역사 풍경이었다. 역사 부근 그 많던 가을 코스모스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듯 철도도 달라졌다.

예전 기차 정차 시 대전역이나 동대구역에 잠시 내려 가락국수를 사 먹을 수도 있었다. 요즈음 KTX 환경에선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현대의 고속 열차들은 이런 틈이 없이 빨리 달리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건 없을까. KTX의 등장과 함께 우리의 이야기와 추억도 쏜살같이 실려 간다. 느림과 여유로움이 사라진 시대가 아닐는지.

현대는 열차가 주는 여행의 즐거움보다 효율성, 빠르게 빠르게. 왁자지껄했던 객실내 분위기는 침묵이 지배해 정적만이 흐른다. 서울역에서 3시간도 안 걸려 부산역에 도착하니 세상 편리해졌지만 지난 열차 여행이 주던 매력과 낭만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역에서 알프스까지

'젊은 시절 여행은 평생을 가지고 간다'라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명언이다. 삶의 질곡 속에서 그나마 위로가 되고 친구가 되는 게 학창 시절 여행의 추억이다. 그 중심에 열차가 자리한다.

수많은 공간 중에 아마도 역보다 많은 이야기와 추억들을 담고 있는 장소는 드물 것이다. 그중에서도 서울역만큼 많은 사람들의 인생사를 함께한 역도 없을 게다.

서울역은 본래 만주와 바이칼 너머까지 이어진 철로를 안고 있었다. 아울러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장대한 꿈을 꿀 수 있는 기착점이기도 했다.

은퇴를 하면, 일상의 멍에에서 자유로워지면 떠나고 싶은 꿈같은 여정이 있었다. 학창 시절처럼 서울역에서 친구들이 모여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지나 알프스로. 아마도 내 생애엔 이루지 못할 꿈이지 싶다. 서글프지만 그저 상상만으로 즐겨야겠다.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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