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왜 당정분리를 외쳤나 [옛날신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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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왜 당정분리를 외쳤나 [옛날신문보기]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02.13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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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무 좌지우지하는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원인이라는 인식…책임정치 원리 어긋난다는 비판 만만찮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장 먼저 당정분리를 시도했던 대통령이다. ⓒ노무현사료관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장 먼저 당정분리를 시도했던 대통령이다. ⓒ노무현사료관

윤석열 대통령의 당무개입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나경원 전 의원에 대한 불출마 압박에서부터 안철수 의원 비판까지,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대통령실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듯한 모습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일각에서는 윤 대통령이 ‘당정분리’ 원칙을 무너뜨려 정당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국민의힘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여전히 당적을 갖고 있는 윤 대통령이 당무에 개입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지?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이려면 어차피 국회 도움이 필요한데, 당정이 일체화되면 더 효율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잖아?’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시간을 참여정부 출범 이전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1987년 우리나라에는 민주화가 찾아왔지만, 여전히 정당 운영은 비민주적이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과 싸우는 과정에서 특정 리더를 중심으로 한 수직적 당 운영이 자리 잡았고, 이런 문화가 민주화 이후에도 이어졌던 까닭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만 해도 공개적으로 직접 당의 공천에 개입할 정도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회의 수술작업이 본격화하고 있다. 김 대통령의 당 개혁 구상은 한마디로 사람과 조직을 21세기형으로 완전히 ‘환골탈태’시키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대대적인 젊은 피 수혈을 통해 이른바 ‘전례없는 물갈이’를 하겠다는 것이고, 이에 대한 김 대통령의 결심은 ‘비장할 정도’라는 것이 청와대 핵심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관계자는 “대대적인 물갈이를 위해 현역 의원에 대해서도 별도의 평가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며 “현역이라 하더라도 유권자들의 변화된 정서에 부합하지 못하면 공천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후략)

1999년 5월 10일 <한겨레> 김 대통령, 당 쇄신 발벗고 나선다

이러다 보니 대통령은 말 그대로 ‘제왕적’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대통령이 여당 공천을 쥐고 있으니 국회의원들은 대통령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정부를 향해 ‘쓴 소리’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죠. 효율적이기는 하나, 결코 민주적이라고 볼 수는 없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부정부패가 발생할 소지도 컸고요.

여기서 등장하는 이름이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가능한 이유를 당정일체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 후보 경선 때부터 당정분리를 정치개혁의 최우선 과제로 꼽았고, 임기 내내 당과 거리를 두려 노력했습니다. 다음은 <노무현 사료관>에 공개돼 있는 2001년 자전 구술기록입니다.

“내가 이 문제(당정분리)를 제기한 것은 원칙적으로 우리 (정치의) 지도 체제가 잘못됐다는 생각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동안에 우리가 국회에서의 자유투표제, 크로스보팅 제도를 많이 얘기해왔지 않습니까. 결국 대통령이 당을 장악하고 당의 장악력을 통해서 의회 의원들의 투표행위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것이 문제로 제기되고 그래서 제왕적 대통령제다, 대통령이 국회를 지배하는 비민주적 행태다, 이렇게 비판들을 해왔지 않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들 동의하거든요.

실제에 있어서 대통령제 국가의 모범인 미국에서는 의회는 대통령과 분리된, 대통령이 당을 지배하지도 않고 의회를 지배하지도 않거든요. 한국이 유독 이렇게 대통령이 당을 통해서 의회를 지배하는 것은 유신시대의 잔재거든요. 공화당 정권의 잔재거든요. 청산되어야 될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임하면서 당의 선거자금과 공천권, 인사권 등을 틀어쥐고 권력을 휘두른 것이 제왕적 대통령제가 탄생한 원인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당 구조가 이렇게 형성된 건 군사독재정권의 잔재이므로, 정치개혁을 위해서는 당정분리를 통해 이 문화를 청산해야 한다고 판단했죠.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인 2002년 12월 26일 새천년민주당 중앙선대위 연설에서도 당정분리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당정분리가 나오게 된 계기는 대통령이 당의 총재 또는 명예총재로서 당을 지배함으로써 빚어지는 하향식 정치문화, 수직적 정치문화 그래서 자율성과 창의성이 떨어져가는 이런 병폐를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당정분리라는 것은 당직임명권과 공천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확실하게 배제돼야 하고, 스스로 공천권을 가진 당직을 맡는 것도 맞지 않기 때문에 저는 평당원의 자격을 가지려고 합니다.”

2003년 1월 18일 양당 총무와 만난 자리에서는 당정을 분리해 국정을 운영해나가려는 노 전 대통령의 구체적 로드맵이 나타납니다. 이전처럼 청와대가 주도해 국회에 하달하는 형태가 아니라, 행정부와 입법부가 서로 협의해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해나가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과거엔 대통령이 정당을 통해 국회를 지배하려 했으나 이젠 당정분리가 됐고, 정당과 국회도 자율성이 강화돼야 합니다. 주요 국정이 국회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대통령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대통령의 역할을 해나가야 합니다. 입법부와 행정부 간에 정책중심의 대화가 이뤄지기 바라며, 정책은 일방통행하지 않고 대화로 협의해 나갈 것입니다. 국가적 운명이 걸린 대외문제나 통일안보정책 등에 대해서는 사전조율을 하면서 초당적 협력을 구하겠으며, 주요 국정이 국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대통령이 여당을 통솔하는 수직적 정치문화에서는 필연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이 등장할 수밖에 없으므로, 당정을 분리해 수평적인 권력구조를 만들겠다는 게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이었습니다. 아마도 노 전 대통령은 여당은 물론, 나아가 입법부까지 좌지우지했던 과거 대통령들의 모습을 보며 과대한 권력을 분산시키는 게 정치 발전의 첫걸음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의 이상과는 달리, 당정분리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우리 정치구조상 대통령의 국정운영 성패는 여당에 대한 평가와 직결될 수밖에 없는데요. 정작 여당은 당정분리로 인해 국정운영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여당은 ‘권한은 없고 책임만 지는’ 상황이라며 불만을 토로했고, 청와대는 청와대대로 여당이 국정운영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다고 날을 세웠습니다.

열린우리당이 당내 자중지란의 위기 극복을 위해 ‘당정관계 재정립’을 새로운 정치적 화두로 내세웠다.
여당 의원들은 31일 무주리조트에서 이틀째 진행 중인 워크숍에서, 4·30 재보선 참패 이후 위기상황의 해법을 새로운 당정관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정분리 원칙이 오히려 끊임없는 당정 간 엇박자를 낳아 결과적으로 ‘힘 없는 여당’의 빌미만 제공했다는 내부 진단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당정분리 이후 정책수립의 주도권은 이해찬 총리에게 내주고 정책실패의 정치적 책임만 떠안는 불공정하고 일방적인 게임을 치러왔다는 게 여당 의원들의 볼멘소리다. (후략)

2005년 6월 5일 <세계일보> 여당 집안싸움 갈수록 험악

학계에서도 비판이 나왔습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정분리로 나아간 것은 현실정치를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이상주의적 태도였다고 비판할 수밖에 없다. 한국정치에서 대통령과 집권당 간의 연계는 대통령에 대한 당의 복속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각제적 속성을 지닌 한국정치의 운영 특성상 그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며 “노무현 대통령은 당정분리의 원칙에 따라 열린우리당을 국정운영의 중요한 파트너로 간주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정치적 결정과정에서도 소외시켰다”고 꼬집었죠.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역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 후기를 통해 “대통령은 정당을 기반으로 선거에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당이 갖는 특정의 정치적 관점 내지 이념을 발전시키거나 그에 기초하여 사회의 갈등과 균열에 접근하는 정당의 지도자로서 행위하기보다, 사기업 조직의 CEO와 같이 정부조직의 혁신과 생산성을 높이는 관리자 혹은 파당적 쟁투로부터 벗어나 국가 전체의 지도자로서 행위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이후 대통령들은 다시 당정을 일체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심지어 문재인 전 대통령조차도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당정분리를 참여정부의 실책 중 하나로 꼽으며 ‘당정청 일체’ 노선을 내세웠죠. 물론 대통령이 총재를 겸하는 ‘대과거’로 돌아간 건 아니었지만, 당정분리가 국정운영을 어렵게 하고 책임정치 원리와도 어긋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정분리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다소간 해소했으나, 국정운영을 어렵게 하는 문제점을 노출했습니다. 반면 당정일체는 현실적으로 정무와 정책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결국 여당이 대통령의 ‘거수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어렵다는 분석입니다. 당정은 분리돼야 할까요 일체화돼야 할까요. 일체화돼야 한다면 그 정도는 어디까지여야 할까요. 윤 대통령의 당무개입 논란이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된 만큼, 이번 기회에 당정분리에 대한 국민적 논의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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