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말과 글'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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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말과 글' 차이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2.11.0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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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성경을 어떻게 읽을까-4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이나 성경무오설(聖經無誤說)을 믿는 데 익숙해진 문자주의자들은 성경을 현대인의 패러다임에 따라 고쳐 읽자는 함석헌의 제안에 접하면 땅이 꺼지는 듯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분노하거나 절망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들은 함석헌 이전에도 여럿이 있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려 하지 말고 해석하면서 읽자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도 흥분하지 말고 곰곰이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독교에는 항상 해석학 문제가 있었다. 기독교는 하늘나라가 예수와 함께 우리에게 임했다고 하는 선포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선포는 글이 아니라 말이었다. 이 말이 시간상 간격을 두고 후에 글로 기록된 것이 신약성경이다. 여기에서 일차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말이 정확하게 글로 기록되었느냐 하는 문제다.

말과 글 사이에 차이가 없는가를 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을 읽는 데 해석이 필요한 첫째 이유다. 다음에는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하는 그 처음의 말을 지금의 말로 다시 살려야 한다.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복음 선포 당시의 말은 과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오늘에 와서는 그 의미도 현대적으로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을 읽는 데 해석이 필요한 둘째 이유다. 실제로도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성경 해석의 역사다. 기독교는 성경을 읽으며 그 글을 살아있는 말로 바꾸어 나오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독교 역사가 성경해석의 역사라는 사실은 겉으로 인식되지 않고 수면 아래 잠겨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와서야 이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체계적인 기독교 해석학이 태동했다. 그리고 이 기독교 해석학이 모태가 되어 해석학이 새로운 현대철학의 한 가지(枝)로 등장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1951년에 루돌프 불트만이 기독교 해석학 역사상 기념비적인 의미를 지니는 저서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론>을 내놓는다. 함석헌도 이 책이나, 아니면 적어도 그에 관한 해설서를 읽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씨알의 소리> 1973년 5월호에 ‘젊은 세대에게 주는 ’(5-27)을 썼는데 거기에 “비신화니, 하나님은 죽었느니, 하나님 없는 종교니 하는 말은 아마 이래서 나왔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읽은 시기는 그가 <하나로 통일하는 힘-로마서 연구>를 쓴 1956년 이후이지만. 이 두 사람의 주장은 성경을 해석의 과정을 거쳐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같다.

위에서는 함석헌을 따라 로마서를 중심으로 서신서의 해석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여기서는 불트만을 따라 복음서의 해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루돌프 불트만은 종말론을 해석했다. 종말론은 세상의 끝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이야기다. 성경은 이 세계와 역사는 시작이 있었듯이 끝이 온다고 말한다. 예수는 그때에 인자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그의 재림을 우주적 사건으로 묘사한다. 그때에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다. 심판의 날이 도래하여 의인들은 하늘나라를 맞이하게 될 것이며 악인들은 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 종말이 조만간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바울은 종말이 도래하고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까지 자기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습니다”(마가 9:1)라고.

그러나 예수와 초대교회의 이러한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바울이 죽고 예수와 동시대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데도 동일한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예수는 재림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종말론에 대해, 예수의 재림에, 대해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 작업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루돌프 불트만이다. 왜 예수와 초대교회의 종말론에 대한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을까? 그는 종말론이 자리 잡고 있는 기초가 신화적 세계관인 데 착안했다.

예수의 시대와 초대교회 시대의 패러다임은 신화였다. 티모시 프리크(Ti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는 1999년에 출간한 저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고대 지중해 지방의 밀의종교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와 똑 같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예수의 실재성까지 신화로 치부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증거들은 억지주장이라고 생각되지마는, 예수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당시 세계를 풍미하던 신화의 재판(再版)이라는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돌프 불트만의 설명을 들어봐도 신화는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었다. 신화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적 틀이었다. 고대인들에게 신화는 불가사의하거나 신비스럽거나 공포스럽게 보이는 현상과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이론적 틀이었다. 일종의 원시과학이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일식이나 월식 같은 자연현상을 만나면 어떠한 형태로든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사건과 현상들이 일어나는 원인을 초자연적 존재인 신들이나 귀신들에게 돌리는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은 통하지 않는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는 이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과학적 세계관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패러다임은 과학적 세계관이다.

종말론은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이 시대의 패러다임이었던 분위기 속에서 선포되었다. 그러니까 종말론은 당연히 신화의 옷을 입고 나왔다.

불트만의 의견에 따르면, 예수가 자기 자신을 오는 세대의 메시야이며 왕이라고 주장했는지, 또한 그가 자신을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人子)라고 믿었는지의 문제는 신약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뉘고 있다. 하지만 예수가 자신을 신화의 빛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그를 신화적 인물로 이해했던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예수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했다는 성경기사도 예수를 이러한 신화적 빛에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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