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공정위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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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공정위 [기자수첩]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3.02.20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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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6일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기준 개선 방안에 관한 연구' 용역 입찰 공고를 내고 대기업집단 지정기준 상향화 작업에 착수했다. 기존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기준인 자산총액 5조 원을 '7조 원'으로 높이거나, 지정기준을 GDP와 연동하는 방식으로 상향 조정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공시대상기업집단이 되면 회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까발려야 하고, 기업 입장에선 상당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지정기준을 높이겠다는 건 기업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셈이다.

공정위가 내세운 명분은 '기업 부담 경감'과 '법 집행 역량 집중'이다. 공정위 기업집단정책과는 해당 연구용역 과업지시서에서 "2009년 공시제도 도입 이후 공시 규제를 적용받는 기업집단의 지정기준이 자산총액 5조 원으로 계속 유지돼 중견집단들이 대거 공시집단으로 편입되고 있으며, 공시대상기업집단 수가 해마다 늘고 있다"며 "중견집단의 부담을 완화하고, 대규모 집단에 대해 법 집행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기준을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행보로 여겨진다. 공시제도 도입 후 14년 동안 국민경제 규모와 지정집단 자산규모가 지속 확대됐고, 특히 문재인 전(前)정권 하에서 집값과 땅값이 폭등하면서 기업들이 보유한 부동산 자산가치가 크게 뛰었다.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될 위기(?)에 처한 회사들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실질적 가치와 위상은 아직 대기업이 아닌데, 갖고 있는 부동산은 제조·물류 시설 따위가 대부분인데 왜 대기업 수준의 공시 의무를 부과해 경영활동에 부담을 주느냐는 논리였다.

하지만 최근 시대적 흐름을 감안하면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사태를 겪는 과정에서 ESG는 본격적으로 세계 경제무대 중심에 진입했다. 미중 무역분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표되는 지정학적 리스크들이 불거지면서 다소 퇴보되긴 했으나, 중장기적으로는 결국 ESG가 시대정신으로 정립될 것이라는 데에 토를 다는 이들은 많지 않다. 국내 기업들도 ESG 대응에 분주한 상황이다. 이 가운데 글로벌 시장 내 ESG 경영의 중심축은 '환경'(E)에서 '거버넌스'(G)로 차츰 옮겨 가고 있다. 핵심은 '투명경영'이다. 단순 지배구조 측면이 아닌 이사회의 투명한 운영, 투명한 리스크 관리, 조세 투명성 제고 등을 통해 기업과 사회 전반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공정위의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기준 완화는 분명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국내 기업들이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에 손사래를 치는 주된 이유는 인적·물적자원 부담이 아니라 '리스크'다. 오너일가와 특수관계자들이 보유한 회사들의 지분구조, 이사회의 부실 운영, 차입·대여금의 경로와 흐름, 대주주의 사익편취, 내부거래와 일감 몰아주기 등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편법·불법적 행위로 판단될 만한 사항들이 공개될 여지가 상당해서다. 기업 입장에선 '공개하기 싫은 경영 리스크'라지만 해당 업체의 이해관계자들을 비롯한 사회 구성원들에겐 보다 공정하고 윤리적인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마땅히 '해소해야 할 사회적 리스크'다. 이 같은 시대적 흐름에 맞춰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기준을 낮춰도 모자랄 판에 이를 상향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누구보다 사회적 리스크를 해소하는 데에 앞장서야 할 공정위가 말이다.

최근 경제 상황과도 역행하는 꼴로 판단된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고, 특히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경제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이른바 3고 현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자본은 지속적으로 유출되고 있으며, 기업들의 수익성은 악화일로다. 자산가치 하락이 불 보듯 뻔하다. 굳이 공정위에서 지정기준을 인위적으로 낮추지 않더라도 공시대상기업집단 수는 향후 수년 내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이런 경제 위기 상황에선 오너일가의 배임·사익편취와 편법적 증여, 임직원들의 횡령,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 등 사건·사고가 들끓기 마련이다. 경제활동의 기본질서가 흔들리지 않도록 보다 엄격하게 감시·감독해야 하는 공정위가 '법 집행 역량 집중'을 명분으로 앞세워 '감시·감독 사각지대'를 확대시키겠다고 하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공정위는 얼마 전 '공정위 법집행 시스템 개선 방안'을 발표하고, 사건처리 절차·기준 정비, 사건처리 역량 강화, 조직개편 등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부터 윤석열 대통령이 '경제사법기관'으로서의 공정위 역할을 지속적으로 강조한 데 따른 결정이다. 윤 대통령은 올해 초 업무보고 자리에서도 "공정위와 법무부, 검찰은 책임을 위반하는 반칙 행위를 바로잡아 자유로운 시장과 공정한 질서를 지키는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공정위의 역할은 규제를 완화해 기업 부담을 경감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의 반칙 행위를 바로잡아 시장경제체제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어야 한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공정위의 종착지가 공정을 낳기 위한 산란지가 아니라 천민자본주의라는 곰의 아가리가 되진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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