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 “민주공화국 헌법체계…구한말 지식인·농민의 혁명적 에너지서 싹터” [북악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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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진 “민주공화국 헌법체계…구한말 지식인·농민의 혁명적 에너지서 싹터” [북악포럼]
  • 고수현 기자
  • 승인 2023.03.08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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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서 만난 정치인(221) 조유진 처음헌법연구소 소장
“동학농민군·만민공동회, 하나의 헌법 기원 흐름으로 봐야”
“임시정부만큼 임시의정원 활동 매우 중요…임시헌정 제정”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고수현 기자]

지난 7일 조유진 처음헌법연구소 소장이 국민대 정치대학원 북악포럼에서 '대한민국 헌법의 기원과 제헌 전야'라는 강연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사오늘 고수현 기자 

“헌법에는 그 나라와 민족의 역사, 정치, 사회 모든 게 녹아들어가 있다. 우리나라 헌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야하는 이유다.”

지난 7일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학술회의장에서 열린 ‘북악정치포럼’ 강단에 선 조유진 처음헌법연구소 소장은 정치인은 물론 일반시민들이 헌법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 같이 설명했다.

조유진 소장은 이날 강연 주제인 ‘대한민국헌법의 기원과 제헌 전야’를 소개하며 “제목만 보면 엄청 무겁게 느껴지겠지만, 법학에서 중요한 건 법의 정당성과 법의 효력”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강연도 헌법 조문, 판례에 치중하기보다는 오늘날 헌법의 틀인 기본권 제정과 권력분립이 구체화되기까지의 역사, 3.1운동의 의미, 임시정부 활동에 가려진 임시의정원의 중요성 등 헌법 기원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되짚는 내용들로 꾸려졌다.

조 소장은 먼저 민주공화국 헌법체계는 해방 이전부터 자체적으로 싹이 움트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해방 이후 서양헌법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민주공화국 헌법체계가 자동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라면서 “구한말부터 지식인과 농민들의 혁명적 에너지 속에서 싹터온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 이후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면서 당연히 민주공화국으로 제도 틀이 바뀐 게 아니라는 설명이다.

여기서 말한 싹은 구한말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인 동학농민 운동 등을 말한다.

조 소장에 따르면 구한말 원시헌법문서의 ‘헌법성’ 판단은 기본권보장과 권력통제(분립) 여부를 통해 정해진다. 헌법이란 명칭을 사용한다고 헌법이 되는 게 아니라 앞서 말한 조건들을 충족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3.1운동과의 연계성도 헌법성 판단의 중요 잣대중 하나이다.

구한말 원시헌법문서는 크게 △정강14조 △폐정개혁안 △홍범14조 △헌의6조 △대한국국제 등이 있다.

먼저 정강14조는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개화파가 주도해 만들었으며, 문벌폐지와 인민평등권리 내용이 담겨있다. 지도층 내부의 정변형식이라는 데 의미가 있지만 일본에 의존했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헌법성 판단 기준으로 보면 문벌폐지 등을 통해 기본권보장을 담았지만, 권력통제는 빠져있다.

폐정개혁안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탄생했다. 노비문서 소각, 토지분작 등 인권사상과 사회경제적 개혁 추진을 담았다.

1894년 나온 홍범14조는 동학운동 진압 후 군국기무처 주도 하에 만들어졌다. 문벌폐지, 인민평등권리가 담겼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의 영향으로 신분제를 폐지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왕권을 옹호하며 권력통제 내용은 없었다.

왕권을 통제하는 내용이 담긴 최초의 원시헌법문서는 헌의6조이다. 1898년 독립협회 주도로 만들어진 헌의6조는 왕권과 관료를 통제하고 재판을 받을 권리를 명시했으며, 예결산 공개 조항도 담았다.

이어 1899년 나온 대한국국제는 내용적 면에서 헌의6조보다 후퇴했다. 고종황제 주도로 만들어진 대한국국제는 기본권보장은 물론 권력통제가 모두 빠졌다. 자주독립을 명시하되 군권무한과 전제정치를 옹호했다. 다만, 헌법 형식을 갖춘 최초 문서라는 점에서 헌법적 의미가 있다.

그는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만민공동회 등을 계기로 나온 원시헌법문서들은 결국 전체적으로 하나의 헌법 기원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조유진 소장이 구한말 원시헌법문서의 헌법성 판단 기준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시사오늘 고수현 기자

이후 일제치하 시절 3.1운동은 우리나라 헌법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 꼽힌다.

조 소장은 “왕정에 머물던 우리나라가 ‘민주공화’를 정치적 선언 의미로 사용한 것이 3.1운동 전후”라며 “국민주권과 법치주의, 헌법제정이 함께 강조됐다”고 설명했다.

3.1운동은 임시정부 설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 원장은 임시정부 활동에 가려진 임시의정원의 활동을 강조했다. 임시의정원은 오늘날의 국회 역할을 맡았던 당시 입법 기구이다.

임시의정원(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은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선출했으며 대만민국임시헌장도 제정했다. 이 임시헌장은 우리나라 공식적 최초의 헌법이다.

1919년 4월11일 제정된 임시헌장은 권력 구조를 국무총리제로 명시했으나 이후 같은 해 9월 11일 1차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임시헌법으로 명칭이 바뀌고 대통령제를 담았다.

이어 2차 개정(1925년 4월 7일)에서는 내각책임제, 3차 개정(1927년 3월 5일)에서는 대한민국임시약헌으로 명칭이 또 한번 바뀌며 권력 구조도 집단체제를 담았다. 4·5차 개정에서는 주석제를 명시했지만, 5차 개정에서는 명칭이 원래의 대한민국임시헌장으로 돌아왔다.

최초의 임시헌장은 제1조에 민주공화제를 명시하고 국회라는 용어도 처음 사용했지만, 당시 조항은 10개조 수준에 머물렀다.

5차 개정에서는 다양한 정치세력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조 소장은 “5차 개정 초안 작성에는 많은 정치세력이 참여했다. 당시 시대적으로 독립이 가까워졌고, 김구 선생의 한국독립당,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등 좌우 확장이 됐다”고 설명했다. 좌우 정치세력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개정 초안에도 다양한 의견이 반영됐다는 설명으로 풀이된다.

1945년 해방 이후 다양한 대한민국헌법안이 나왔다. 남북 구분없이 시기별로만 보면 △조선인민공화국임시약법시안(1946년 1월, 인공 중앙인민위) △한국헌법(1946년 3월, 행정연구위원회) △대한민국임시헌법(1946년 3월, 비상국민회의-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임시헌장 정부 및 행정기구 조직요강(1946년 4월, 민주주의민족전선) △남조선과도약법(1947년 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남조선과도행정조직법(1947년 2월) △조선민주임시약헌초안(1947년 4월) △조선임시약헌(1947년 8월) △헌법초안(1948년 5월, 군정청법전기초위제출) △한국헌법초안(1948년 5월, 국회헌법기초위 제출) △헌법초안(1948년 5월, 국회헌법기초위 제출) △대한민국헌법초안-의원내각제(1948년 6월, 국회헌법기초위) △대한민국헌법초안-대통령제(1948년 6월, 국회헌법기초위) △대한민국헌법(1948년 7월, 국회 본회의)이라는 흐름을 보인다.

조 소장은 “1948년 제헌헌법은 유진호 박사 등 몇몇 소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분들이 초안 작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라면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제헌헌법의 기틀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제헌헌법이 갖는 의미와 관련해서는 “생활의 기본적인 수요를 충족시킨다는 조항은 오늘날 기준으로,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이라고 덧붙였다.

조 소장에 따르면 제헌헌법에서 일관하고 있는 ‘균등’은 임시정부 때부터 있었던 삼균주의를 계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균주의는 독립운동가 조소앙이 강조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으로,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균등을 의미한다. 제헌헌법은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의 통치조직과 그 작용원리를 규정했다. 특히 전문에서 3.1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을 건립하고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규정하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헌법은 단편적으로 이뤄진 조각이 아니라,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하나의 산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게 이번 강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담당업무 : 경제부 기자입니다. (은행·카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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