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20 목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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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산되짚기(21)>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민산은 민주화 운동의 본류이자 본산˝
˝YS 용기와 결단은 알아줘야…누가 뭐래도 훌륭한 정치 지도자˝
2012년 11월 12일 (월) 정세운 윤종희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윤종희 기자)

'민산되짚기' 21번째 주인공은 서청원 전 미래희망연대 대표다. 6선 관록의 서청원 전 대표는 충남 천안 출신으로 민주산악회 회보 '자유의 종' 편집위원장을 맡으며 소위 상도동계 직계가 됐다. 이후 13대 총선에서 김영삼(YS)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 당 대변인 등을 맡으며 스타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3당 합당 전에는 김영삼 총재 비서실장을 맡으며 명실상부한 YS 최측근으로 통했다. 이런 서 전 대표와의 인터뷰는 2012년 11월 6일 여의도 대하빌딩 미래전략개발연구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그는 이날 "민주산악회는 민주화운동의 본류이고 본산"이라고 말했다. 또 "난 누가 뭐래도 YS가 훌륭한 정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서 전 대표는 자신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부터 말했다.

"원래 제가 정치에 꿈이 있었습니다. 아마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때문에 대학 때는 정치외교학과를 다녔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학생회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6·3 시위' 때는 몇 개월 간 감옥에서 고생했고…, 그러다가 제가 81년도에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 후보로 나서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야당에서 공천을 받는 것은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유리했죠.”

-어떻게 해서 공천을 받게 됐나요.

“제가 사는 집이 민한당 초대 총재인 유치송 선생 집과 150m 거리에 있었습니다. YS 집과는 500m 거리에 있었는데 그 유명한 이화약국 옆에 제가 살았습니다."

-민한당에 몸담은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있는데요.

"제가 한광옥, 홍사덕 등과 같이 민한당에서 활동했는데, 비록 민한당이 '민정당 2중대'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때 민한당은 강하게 야당 역할을 했습니다."

-민한당에서 나와 민주산악회에 가입할 당시 서석재, 김덕룡 전 의원의 권유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YS가 단식투쟁 후에 연금에서 풀려났고, 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이 승리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민한당에서 나갔습니다. 저는 그 때 총선에서 낙선했는데, 마침 YS를 모셨던 김덕룡 선배가 저와 6·3 시위 때 감옥에서부터 알 던 사이이고, 장학노는 제 후배인데, 이 사람을 통해서 홍인길도 만나고 했습니다. 홍인길, 장학노, 김덕룡, 서석재 등과 모두 가까웠으니 친구 따라 강남 간 것이죠. 또 제 집도 상도동에 있다보니까…, 그렇게 민주산악회에 가입하게 된 것입니다."

-민주산악회 회보인 '자유의 종' 편집위원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산에 가입하고 그해 4월 말이나 5월 초에 YS를 모시고 수락산 도봉산 관악산 등을 다녔는데 그 때는 인원이 늘어나서 한 50명~100명이 산에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저보고 민주산악회 '자유의 종' 기관지를 맡아달라고 해서 편집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사실상 저 혼자서 편집하고 기사도 쓰고, 사진도 올리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쇄는 누가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김영춘이나 이성헌이 맡은 것 같은데…, 하여튼 그 만큼 인쇄는 비밀리에 했었습니다. '자유의 종'은 이슈가 있을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발행됐고 데모할 때 길거리에 뿌리거나 지방 민산 조직에 보내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간혹 중요한 사건 기사의 경우 제목이나 전체 윤곽을 잡아서 YS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렇다보니 YS와 자주 만나게 됐습니다."

"부천 성고문 판결문 전문 실었다는 이유로 유치장 신세"

-'자유의 종' 편집위원장을 하면서 '필화'를 겪은 것으로 아는데요.

"86년 발생한 부천 성고문 사건이 당시 언론에는 보도가 제대로 안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법원 판결문 전문을 구해서 '자유의 종' 전면에 실었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뒤에 노량진 경찰서 소속 형사 2명이 찾아와서는 '같이 가자'고 해요. 그래서 따라갔더니 노량진 경찰서가 아닌 남대문 경찰서로 저를 데리고 가더라고요. 거기서 저를 유언비어 배포 혐의로 직결심판에 넘겼고 그래서 1주일 간 유치장에 갇혀있었습니다. 이런 것 말고도 민주화 운동하면서 닭장차에 실려 다니기도 하고 정말 눈이 빠지는 것처럼 고통스런 최루탄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민산 활동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4~5명이 한 조가 돼서 '당신은 찌개, 나는 쌀, 너는 김치' 이런 식으로 분담해서 함께 모여 식사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돈이 얼마 안 듭니다. 저는 전직 국회의원이니까 삼겹살을 담당했는데, 이 방법이 아주 효과적이었어요. 그리고 등산을 하는 것이니 별 돈이 안 들었어요. 가까운 산에는 각자가 알아서 찾아오면 되는 것이고, 좀 먼 곳에 갈 때는 버스를 대절했는데 가다가 중간에서 누군가가 모자를 벗어서 '자, 적선하십시오' 하고 돈을 거뒀는데 있는 사람은 내고 없는 사람은 못 내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걸 가지고 산에서 내려온 뒤 막걸리를 한 잔 마시기도 하고 YS가 먼저 간 뒤에 몇 명이 남아서 소주 한 잔을 하면서 끈끈한 동지애를 이어갔습니다. 민산 회원들은 누가 지시해서 한 게 아니라 본인들 스스로가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YS를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상도동계에만 있는 게 아니라 동교동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산 회원들, 시키지 않았는데도 YS 대통령 만들기에 주력"

 -산을 오를 때 YS의 특별한 점이 있었나요.

"산행하면서 YS는 절대로 어디에 걸터앉지 않아요. 그냥 나무에 기대고 서 있어요. 그리고 식사를 빨리하고는 돌아다니면서 '니는 왜 밥을 그렇게 많이 먹노, 술을 많이 마시노'하면서 농담을 했는데,  그게 끈끈한 유대를 쌓는 계기가 됐습니다."

-독재정권이 민산 회원들을 상대로 유혹한 것으로 아는데요.

"민산 초기에는 유혹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없었습니다. 워낙 YS계가 끈끈하게 뭉쳐 있다보니 회원들을 빼 갈 엄두를 못 냈죠. 또, 2·12 총선에서 전두환 정권이 졌기 때문에 민산 회원들에 대한 유혹이 먹혀들지도 않았습니다."
 
-민산의 성격과 의의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민산은 민주화 운동의 본류이고 본산이었다고 봅니다. 캄캄했던 그 당시 그나마 민주산악회가 만들어져서 민주화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성명을 내도 단 한 줄도 보도가 안 됐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 장을 복사해서 돌렸어요. 당시 정의구현사제단 성명에는 국민들이  상상할 수 없는 민주화 요구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제 지역구인 동작구에 뿌렸습니다. 그 만큼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우리가 알렸고 결정적으로 민주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어려울 때 민주화 횃불을 지핀 게 민주산악회입니다. 그리고 YS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원동력이 됐습니다."

-YS가 집권 후 민산을 해체한 것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저는 그건 잘 했다고 봅니다. 민주화라는 우리가 추구해온 가치가 달성된 만큼 해체가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민산 회원 중 일부가 조그만 잘못을 저지르면 민산 전체가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언론에서 보도했습니다. 정확한 시점이 기억이 안 나는데,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강원도 어느 산에서 민산 회원들 입장료를 봐줬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실제는 별것 아니데 엄청나게 크게 보도가 됐어요. 이런 걸 봤을 때 민산이 계속 유지됐다면 YS가 국정운영을 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민산 해체는 잘 한 일"

-그래도, 민산을 해체하지 않았다면 정권 재창출이 가능했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민주산악회가 다시 집권 활동에 나서는 걸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그때 그때의 시대정신과 국민의 갈망 등과 맞아야 되는 겁니다. 어떤 조직이 민다고 그냥 되는게 아니지요."

-서청원 전 대표가 주도하는 청산회가 민산을 모델로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청산회는 제가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 저를 따르던 후배 20여 명이 제안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민산이 모델이 됐지요. 제가 정치를 오래한 만큼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그렇게 하다가 2007년 4월에 제가 박근혜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그 때 제가 '박근혜에게 빚 갚으러 왔다'면서 지지선언을 했습니다.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가 패배하고 당이 어려웠는데 그 시기에 박근혜가 대표를 맡아 총선에서 121석을 건지며 한나라당을 살렸다. 그래서 전직 대표로서 박근혜에게 빚이 있다' 그런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지지선언을 하니까 청산회 회원들이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지금도 청산회가 7만 명 정도 되는데, 제가 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하면서 유명해지고 전국적 조직이 됐습니다. 지금도 청산회를 통해 몇천 명 모으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YS에 무릎 꿇고 박근혜 지지 밝혀"

이날 서 전 대표는 지난 2007년 4월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기 직전에 YS를 만난 얘기도 털어놨다. 

"제가 YS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각하 용서해주십시오. 박근혜가 저희 집에 와서 도와달라고 해서 약속했습니다. 제가 한 번도 각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는데 여자와 한 약속을 깰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는지 모르겠지만 각하가 이명박을 도와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YS가 '니는 와이리 고집이 쎄노'라고 해요. 그렇게 하고 나오는데 YS가 문 앞까지 따라나왔고 분위기 좋게 헤어졌습니다. 나중에 '서청원은 배신자'라는 얘기들도 나오고 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저는 가신은 아니었지만 YS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손명순 여사가 YS에게 '서청원이 왜 배신자예요. 당신한테 충성을 제일 잘 했는데…'라고 했대요."

-서 전 대표가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사람 말은 신뢰가 갑니다. 박근혜는 부정부패는 안 할 사람입니다. 박근혜 '트레이드마크'가 그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는 억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3당 합당 당시 입장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일생에서 몇 번 괴로운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그랬습니다. 당시 제가 YS 총재 비서실장이었는데, YS가 제게 아무런 말도 안 했습니다. 합당하기 보름 전에 YS 차를 타고 당사로 가는데 YS가 갑자기 '서 실장, 3당 합당 어떻게 생각해, 보수대통합을 어떻게 생각해'하고 물었어요. 저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고는 제가 일주일을 잠을 못 잤습니다.

"3당 합당…섶을 지고 불구덩이 들어가는 심경으로 YS 따라"

   
▲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정당을 살인정권이라고 비판해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는데 합당을 한다는 건 도저히…, 그런 고민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집 창가에서 문을 열고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러다가 정치적으로 저의 길을 가는 것도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그건 인간적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겠다'는 심경으로 YS를 따랐습니다. 그게 비서실장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YS는 당시 서청원 실장에게 3당 합당에 불참한 이기택, 노무현, 김광일 등에게 전화 연락을 지시했다. '서 실장, 이기택 전화 연결해'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겨우 전화가 연결되면 그냥 이기택 등은 '예예, 알겠습니다'라고만 답했다고 한다.

-3당 합당 후 내각제 각서 파동이 일자 최형우, 강삼재, 최기선 등과 함께 탈당파로 분류됐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저쪽(민정계)에서 박철언을 시켜서 YS를 흠집 내려고 했습니다. 대통령을 안 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강삼재, 최기선이 주도해서 탈당이라는 배수진을 친거죠. 실제로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정말 탈당하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노태우 정권에서 그냥 '쇼'로 봤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니까 당황을 했어요. 때마침 최형우 의원이 중진 중에서 유일하게 탈당 서명을 했습니다. 우리는 만약 YS가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 할 경우를 대비해 바깥에 조그만 둥지를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YS가 '내가 죽어도 니들하고 같이 죽는다. 조금 기다려봐라'고 했어요. 그래서 탈당까지 안 간 겁니다."

"3당 합당 후 YS에 위기 오자 몇몇 동지들과 탈당 시도"

-3당 합당에 대한 평가는 무엇인가요.
 
"어쨌든 크게 보면 YS가 대통령이 되어서 정치군인들을 일소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은 것입니다. 청와대 안가를 철거하고 금융실명제도 실시했는데, 3당 합당을 안 했으면 이런 개혁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금융실명제를 간단히 봐서는 안 됩니다. YS가 아니면 못 했습니다. 또, 며칠 만에 정치군인들을 잘라냈는데, YS의 용기와 결단은 알아줘야 합니다. 정치군인들이 숨 못쉬게 한 것은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3당 합당에 대한 비판을 많이 받는데, 결과적으로 민주화가 되면서 상쇄가 됐다고 봅니다. 국가가 발전되고 민주주의가 잘 굴러가는데 YS의 공이 일정부분 인정돼야 합니다."

-1997년 서석재 등과 정발협을 이끌며 ‘이회창 대권 불가론’을 내세웠습니다. 당시 상황이 궁금합니다.

"정발협은 공정한 대통령 후보 경선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동지들을 규합했고 YS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YS가 대통령 힘으로 당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공정하게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비록, 정발협이 큰 힘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해체했습니다. 그 정도로만 얘기하겠습니다."

"YS, 1997년 대선 때 당에 영향력 행사 안 해"

-현재 YS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라고 봅니까.

"YS가 대한민국의 큰 어른인데 나라를 위해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게 좋다고 말하면 상당한 힘이 될 것입니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후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당 대표 선거에 나온 것에 대한 심경이 궁금합니다.

"일생일대의 실수한 부분입니다. 결국, 정치는 용기와 결단인데, 저는 나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못 견딜 정도로 '나와야 됩니다. 나와야 됩니다'하고 계속 그랬어요. 지금도 후회합니다."

서 전 대표는 이날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각각 이인제 의원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손잡아야 한다고 권유했지만, 이회창 후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도 전했다. 그러면서 "이회창 후보가 내 말을 들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윤종희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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