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 “정몽준 대권, 도난당했다…조사 결과, 미스터리” [時代散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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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 “정몽준 대권, 도난당했다…조사 결과, 미스터리” [時代散策]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3.03.29 10:0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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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연구소 모태 사회개발연구소 창립 멤버…화양연화 시절”
“정치여론조사 최초 세팅, 선거판 224개소 모래알 들여다보듯”
“정몽준-노무현 후보단일화 여론조사, 로데이터 아직도 못 봐”
“과학여론조사 아닌 정치적 … 朴 대통령 탄핵 때도 정치재판”
“이준석, 대선에 도움 됐다 생각 안 해… 혹평으로 기록될 것”
“尹대통령, 정권교체하고 한일정상회담 성과, 최대 치적될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와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국민의힘 김행 전 비대위원이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파기된 내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은 김 전 위원이 22일 광화문에서 본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민의힘 김행 전 비대위원이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파기된 내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은 김 전 위원이 22일 광화문에서 본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시대산책 ‖ 김행 편 

  • 국내 첫 정치여론조사 도입 
  • 민정당계 토사구팽당한 일
  • 정몽준-노무현 후단협 비화
  • 단일화 합의 후 파기까지 
  • 막판 조사기관 합의 내막
  • 일산-명동 유세 무슨 일 
  • 靑 대변인 발탁된 배경은  
  • 尹 대통령과 20대 대선 후 

 

1959년 서울 출생. 연세대 졸업, 동대학원 사회학 박사 수료, 한국사회개발연구소 연구원, 중앙일보 전문위원, 국민통합21 대변인, 위키트리 공동 창립, 대통령비서실 대변인,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 대변인, 비상대책위원, 메타캔버스 대표이사(현).

김행 전 비대위원(국민의힘, 이하 김행)은 우리나라에서 정치여론조사를 세팅한 원조격이다. 첫 여성 대변인이라는 수식어도 갖고 있다. 한국사회개발연구소 창립 멤버다. 1985년 민정당(민주정의당)은 국책연구소를 만들어 여론을 분석했다. 고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가 부소장을, 김행이 연구원을 맡았다. 연세대와 동대학원 사회학을 수료한 그에게는 사회생활 시작이자 정계 입문인 셈. 

 

12대 총선 후 생긴 여론조사연구소  


“민정당은 3일 국책연구소 부소장에 지갑종·최병렬 의원을 각각 임명하고 박준병 의원을 신설한 국책조정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일부 당인사를 단행했다. 
심명보 대변인은 이날 당직 개편과 관련, ‘이번 인사는 전두환 총재의 후반기 통치기반의 안정 및 공고화를 위해 단행됐다’고 밝히고 ‘이번 인사를 통해 창당 이후 오늘에까지 구현, 구축해온 5대 이념과 당세를 더한층 높은 단계로 발전시켜 80년대 국가적정치대사에 대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85년 9월 3일 <경향신문> 기사 중-

 

민정당 국책연구소에서 김행은 국내 처음으로 정치여론조사 기법을 도입. 자료는 1985년 9월 3일 경향신문 기사ⓒ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민정당 국책연구소에서 김행은 국내 처음으로 정치여론조사 기법을 도입. 자료는 1985년 9월 3일 경향신문 기사ⓒ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민정당이 연구소를 설립하고, 정세분석에 공을 들이게 된 데에는 2·12 12대 총선의 쇼크 때문이었을 거로 짐작된다. 

반독재 범정치결사체인 민주화추진협의회 출범에 이어 김영삼(YS)이 이끄는 신민당은 창당 한 달 만에 돌풍을 일으켰다. 12대 총선서 제1 야당으로 치고 올라섰다. 전두환 정권을 위협할 만한 대이변이었다. 

이후 생긴 연구소에서 최 부소장과 김행은 국내 처음으로 정치여론조사 기법을 도입했다. 지금처럼 퍼스널컴퓨터가 없을 때였다. 한 층 전체를 전산실로 쓰고 OCR(광학식 문자인식) 장치를 펀칭해서 통계를 뽑아나갔다.

여론조사 방법론을 어떻게 정립하는가가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 사무실 알아보는 것부터 컴퓨터 세팅에 분석툴을 구조화하고 디엠 발송하기, 청와대에 보낼 판세분석 보고서 만들고 대통령 정책을 설명하는 홍보 문구 작성, 공천에 필요한 기초자료 제작까지 모두 그의 손을 안 거쳐 간 것이 없었다.

- 조사는 잘 맞던가요? 

“엄청나게 잘 맞았죠.”

지난 22일 광화문 연합뉴스 빌딩에서 만났을 때다. 

“3당 합당하기 전 김현철 교수(YS 차남, 동국대 석좌교수)가 우리 당(민정당)에서 가장 탐나는 기관이 사회개발연구소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자신감이 느껴졌다. 

- 김현철 교수는 중앙조사연구소라고 광화문에서 따로 했죠.

“별도로 했다고는 알아요.”

국책연구소는 1980년대 후반 사회개발연구소로 명칭을 바꿨다. 1990년 삼당합당 후에는 민자당 산하연구소로 정식 출범했다. 배성동·조경목·김종인 전 의원 등이 소장을 맡았다. 기자들이 연구소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자료를 빼내려고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그만큼 과학적이었어요. 대한민국 선거판인 224개 지역을 조사 안 한 지역이 없고 내 발이 안 닿은 곳이 없었어요. 모래알 하나하나 들여다보듯 봤으니까….”
자부심이 컸다. 
“어떻게 보면 화양연화 시절이었죠.”
잠시 아련. 

 

“민정당계 부장 이상 대기발령”


국민의힘 김행 전 비대위원이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파기된 내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은 김 전 위원이 22일 광화문에서 본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민의힘 김행 전 비대위원이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파기된 내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은 김 전 위원이 22일 광화문에서 본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92년 대선에서는 YS 당선을 예측했다. 선거 전략에도 관여했다. 공로가 커서 30대 최연소 여성 국회의원이 출현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무성했다. 

-한자리했을 법한데 말이죠. 

“모조리 토사구팽당하지 않았습니까? 민정계 부장 이상은 다 대기 발령했어요.”
그는 당시 조사부장이었다. 
“사회개발연구소가 여의도연구소로 바뀌고 김현철 교수가 주도했죠. 완전히 민주계가 장악하고….”

참고로, 김행은 사회개발연구소가 지금의 여의도연구소의 모태라고 했으나, 여연 소장을 역임한 김 교수는 자신이 1988년 세운 중앙조사연구소가 공식적인 전신이라고 말해 양측의 차이가 있다. 

민정계는 3당합당 전의 민정당 계보를, 민주계는 YS계보를 말한다. 

-스카우트 안 했나요? 했을 것 같은데. 

“대기 발령 상태에서 민주계인 강삼재 사무총장이 찾아오긴 왔었어요. ‘공기업 어디 가고 싶냐.’ 이랬는데 아주 호기롭게 ‘당신네가 해주는 자리에 갈 생각 없다. 전화도 하지 말아라.’ 하면서 딱 나왔어요.”

십 년간의 연구소 생활을 마치고 나왔다. 첫 번째 정치적 좌절인 셈. 

- 이후 중앙일보에는 어떻게 들어간 건가요.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냐면 신문 가판대 <중앙일보> 일면에 전문기자 공채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온 거예요.”

후배의 권유로 공채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1996년 15대 총선이 돌아왔다. 다른 곳에서는 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회의)이 압승한다고 전망했다. “<중앙일보>만 신한국당 승리를 예측했어요.”김행이 쓴 기사였다. 적중했다. 

 

“이번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전국구 18석을 포함해 139석, 국민회의는 전국구 13석을 합쳐 79석, 자민련은 전국구 9석을 보태 50석, 민주당은 전국구 6석을 포함해 15석 그리고 무소속은 16석을 차지했습니다. 신한국당은 최대 격전지인 서울에서 예상을 뒤엎고 절반이 넘는 27석을 차지해 여당으로써는 사상 처음으로 서울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고전이 예상됐던 경북에서도 19개 의석 가운데 11석을 차지하는 등 선전했습니다.”
-1996년 4월 12일 MBC 뉴스데스크 김동섭 앵커 발언 중-

 

 

“정몽준 대통령 꼭 만들고 싶었다”


김행은 정몽준을 통해 정치개혁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진은 정치권에 있을 시절의 정 의원ⓒ뉴시스
김행은 정몽준을 통해 정치개혁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진은 정치권에 있을 시절의 정 의원ⓒ뉴시스

- 16대 대선을 앞두고 정몽준 캠프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된 겁니까.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죠.” 

<중앙일보>에서 8년 정도 근무했을 무렵이었다. 지금이야 여성 편집국장도 많지만, 그때만 해도 여기자들 승진에 어떤 벽이 있을 때였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2002년 11월 10일 무소속 정몽준 의원이 창당한 국민통합21은 여론조사전문가 김행을 선대위 대변인으로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정 의원이 9월 1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두 달여 뒤였다. 

-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이회창 후보는 절대 안 된다고 봤어요.”

- 표의 확장력 때문인가요.

“여론조사해 보니까 (확장력이)너무 없는 거예요.”

김행은 한나라당(신한국당 후신) 대선주자로 두 번째 도전 중이던 이회창 총재의 면전에 대고 “대통령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한 바도 있다. ‘마의 38%’ 벽을 넘어서지 못하자, 판단한 분석이었다. 

반면에 “정몽준 후보의 상품력에 굉장히 빠져 있을 때였어요. 보수를 대변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될 수 있겠다, 확신이 있었어요. 꼭 대통령을 만들고 싶었어요.”

- 막상 캠프 가보니까 민주당(새천년민주당)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아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숨이 나오네.”
듣고 있던 일동 웃음. 

“낮에는 국민통합21, 밤에는 민주당하는 박쥐들이 너무 많았어요. 날아다니더라고요.”
혀를 찼다. 

- 정 후보가 뱃심이 좀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

무슨 말인지 갸우뚱했다. 

- 정주영 회장(정몽준 부친, 현대그룹 창업주) 대선 출마할 때 보면 막 몇십 억씩 줘서라도 신한국당 당협위원장들 끌어들이고 했잖습니까. 마찬가지로 한나라당 인사들도 영입했어야 승산이 있지 않았을까 싶단 말이죠. (1992년 대선 당시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영입된 정치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자금 지원을 적잖게 받았다) 

“선대 회장과는 결이 다른 분이잖아요.”

- 어쨌거나 돈 쓰는 데 인색하다는 평이 있었지요. 

“글쎄요.”
동의하기 어려운 듯했다.
“거꾸로 얘기하면 정치개혁 할 수 있었던 분이라는 말 아닐까요. 돈 쓰는 게 구정치의 악습이잖습니까.”

- 스킨십도 있어야지 않나. 이 말이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스킨십이 있습니까. 다들 스킨십 없다고 하던데….”

불현듯 이 대표를 예로 들었다. 

- 큰 뜻을 품으려면 사람도 많이 만나야 하고 그런 거 있잖습니까.

“스킨십이 있으면 더 좋겠죠.”

마지못해 끄덕끄덕. 곰곰이 생각하듯 “암튼 (대통령이 못 돼) 아쉽다는 생각이 큽니다.”, “왜요.”, “정몽준 후보는 저평가된 부분이 있어요.”

- 어떤 점에서요. 

“새로운 정치를 하려는 열망이 강했던 분이었어요. 나 또한 그래서 지지했던 거고요.”

- 하지만 졌죠.

“꿈이 무너졌죠.”
잠시 침울한 빛이 흘렀다.
“잘 보필했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의 미약함을 탓했다. 

 

“단일화 직전까지 이기고 있었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후보단일화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가 선출된 뒤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와 공동유세를 벌이고 있다ⓒ연합뉴스
16대 대선을 앞두고 후보단일화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가 선출된 뒤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와 공동유세를 벌이고 있다ⓒ연합뉴스

- 단일화 경선에서 진 결정적 원인은 뭐라고 봅니까. 

“거칠게 얘기하면 소매치기당했다고 생각해요.”

민주당(새천년민주당)을 두고 말했다.

“그때까지(단일화 직전) 쭉 이기고 있었잖습니까?”

정 후보가 바람을 일으킬 무렵인 가을께 노무현 후보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역부족 아니냐는 우려에 휩싸여 있었다. 3월 있던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에서 광주 돌풍을 시작으로 ‘이인제-한화갑’ 경쟁자를 물리치고 본선 후보에 선출됐을 때만 해도 노풍은 유효했다. 그렇지만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고 주춤했다. 설상가상으로 새천년민주당은 8·8재보선마저 참패했다.

대한축구협회장이던 정 후보의 인기는 고공행진하고 있었다. 월드컵 유치에 성공한 뒤 대한민국은 4강 신화를 써 내려갔고 전국은 들썩였다. 
 

“SBS가 8일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TN소프레스 공동조사, 1200명,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8% 포인트)에 따르면 정 의원은 노무현-이회창-정몽준 3자대결에서 32%를 얻어 노 후보(23.7%)와 이 후보(31.6%)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이회창 후보와의 양자대결에서도 44.3%를 얻어 이 후보(39.6%)를 4.7% 포인트 차로 앞섰다.”
- 2002년 8월 8일 <오마이뉴스> 기사 중-


여론조사에서 정 후보의 경쟁력이 더 높게 나오자, 민주당에서조차 ‘노무현 대신 정몽준’이라는 대안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내 비노(노무현)와 반노 세력들은 이대로 가면 꼼짝없이 패한다며 반창(이회창) 연대를 명분으로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추진협의회’를 출범했다.

2002년 10월 4일의 일이었다. 위원장에 김영배 상임고문이 선정됐고 김근태, 심재권, 이창복, 김민석 등 34명의 의원이 참여했다. 후보 단일화 취지에 서명한 민주당 의원만 70명이 넘었다. 

우여곡절 끝에 노 후보 제안으로 양측은 11월 7일 후보단일화 협상단을 구성했다. 파행도 있었지만, 15일 여의도 포장마차 심야회동에서 깜짝 소주샷도 나눴다. 다음날에는 국민여론조사 방식에 전격 합의했다. 대선 D-33일을 앞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다시 또 합의 내용 유출 논란 등을 겪으며 협상은 표류했다. 1차에서 실패하자 2차 협상팀이 꾸려졌다. 정 후보 측에서는 민창기‧김민석·김행이, 노 후보 측에서는 신계륜‧김한길‧홍석기 등이 나섰다. 후보 등록(11월 27, 28)일일주일 전이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민주당에 소매치기당했다”는 것이 김행 주장. 

다시 그의 이야기. 
여론조사기관 선정에 관한 회고다.

“처음에는 <한국갤럽>을 몇 번 찾아갔어요. 박무익 소장(갤럽 창립자)도 만났어요. ‘정치판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거절하더라고요. 다른 기관에서도 다 못한다 하고…”

그때로 돌아간 듯 막막함이 전해졌다. 한나라당은 “후보 단일화 시도는 야합”이라며 두 후보를 불법선거운동 혐의로 선관위에 고발한다고 난리였다. 주요 대형 여론조사기관들에서 꺼리는 이유가 된 듯했다.

국민의힘 김행 전 비대위원이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파기된 내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은 김 전 위원이 22일 광화문에서 본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민의힘 김행 전 비대위원이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파기된 내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은 김 전 위원이 22일 광화문에서 본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단일화 마지노선이 임박할 무렵. 
“민주당에서 여론조사 기관 두 개를 보내왔어요.”
R과 W 기관이었다. 
“방법이 없었어.”
받을 수밖에 없다는 듯 자조 섞인 목소리. 11월 24일. 후보 등록을 불과 4일여 앞둔 시점이었다. 
사실상 당일치기로 여론조사를 진행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르네상스 호텔에서 결과를 발표했다.

“한 군데서는 무효가 되고 다른 한 군데에서는 정몽준 후보가 졌죠.”
W 기관에서는 특정 후보 지지율이 기준치보다 낮아 무효처리됐고, R 기관 조사가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노 후보(46.8%)가 정 후보(42.2%)보다 4.6%포인트 앞서 단일후보로 선출. 
 
“졌는데….”
답답해 오는지 마른 침을 삼켰다. 
“사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어요.”

- 왜인가요. 

“친민주당 쪽 기관인데다… 나는 진짜 이 얘기는 남기고 싶어요.”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는, 

“끝나자마자 우리 당 주요 당직자들이 단일화 결과를 발표한 그 여론조사기관을 찾아갔어요. 이게 웬걸. 안에 있으면서도 창문 할 것 없이 모조리 걸어 잠근 거야. 열어 달라고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통하지 않자, “옥상에서부터 내려가 창문을 깨려고까지 했어요.” 문을 사이에 두고 피 말리는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은 새벽에 문을 열어줬어요. 문제는 수거한 설문 답안지를 다 폐기하고 난 뒤인 거예요. 우리는 아직도 로데이터(미가공 원자료)를 못 봤어요.”

- 아직도요?

 “그걸 다 폐기했대.”

다시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때 여론조사는 정말 미스터리야.” ‘정말’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처음 여론조사로 결정됐을 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이해찬(노 후보 측) 단장이 우리와 합의하고 나서 울었잖아요. 졌다고.” 반대로 이쪽서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상황이 역전됐다. 
“민주당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속았다는 거예요.” 

- 그런데 왜 받았냐는 거죠. 

“과학으로서의 여론조사만 알았으니까.” 

낯빛에서 씁쓸함이 흘렀다. 뼈아픈 대목이라는 듯 “정치적으로 얼마든지 왜곡되고 장난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거예요.” 자신을 책망했다.

 

“선거 D-2부터 공동유세 배제”


대선 선거일 직전 정몽준 측 김행 대변인이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하는 입장문을 밝힌 뒤 퇴장하고 있다ⓒ연합뉴스
대선 선거일 직전 정몽준 측 김행 대변인이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하는 입장문을 밝힌 뒤 퇴장하고 있다ⓒ연합뉴스

- 단일화는 왜 깨진 겁니까. (정 후보는 선거일(12월 19일) 하루 전날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선거 이틀 전부터 확 바뀌더라고. 공동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는데 일산 유세(17일) 때 깨더니, 마지막 종로 유세(18일)에서 완전히 뒤집고….” 

설명이 필요했다.

“명동에 사람들이 엄청 모였는데 우리 후보를 연단에 못 올라오게 하는 거예요. 우리도 그 전에는 같이 다녔는데 못 올라오게 하는 거야.”

- 누가요.

“그쪽 지지자들이요.” 

급기야 “우리 지지자들이 억지로 대표(정몽준) 올라가게 하고, 나는 대변인이라 얼굴을 아니까 밑에서부터 받쳐서 올리고….”

겨우 올라갔다고 했다. 

- 왜 못 올라가게 했을까요. 

“단일화 후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앞서기 시작하니까 돌변한 거예요. 갑자기 공동유세를 원치 않더라고.”
지난날을 되씹었다. 

“우리 대표야 단일화 경선에서 졌으니까 얼마나 뼈아파요. 애초에 공동유세도 그쪽(노 후보 측)에서 요구한 거였거든. 우리는 원치 않았어요.”

12월 13일 노 후보는 정 대표와 국회에서 만나 회동을 갖고 국정 전반을 협의하는 정례회동과 정책공조, 당정협의회를 갖는 등 공동정부 형태로 운영할 것에 합의했다. 노 후보 측은 대변인 이낙연, 정 대표 측은 대변인 김행 등이 배석했다. 이후 작성된 5개항 합의문에는 공동유세할 것도 포함돼 있었다고 전했다. 

- 유세에서 배제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해서 공동정부 구성을 깨려했다고 보는 게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명동 유세 때 기억 안 나나요.”

되물어왔다. 노 후보가 ‘한미 발언’부터 ‘정동영·추미애’ 씨를 언급했을 때였다. 그 자체가 공동정부를 파기한 게 아니고 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일(12월 18일) 저녁 무대 위에 올라간 노 후보는 정 대표를 뒷전에 두고는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고 한 데 이어 “다음 대통령은 경쟁을 통해 올라와야지 그냥 주는 게 아니다. 내 주변에는 ‘대찬 여자’ 추미애 최고위원도 있고 나와 함께 끝까지 국민경선을 치러준 정동영 의원도 있다”고 연설했다. 

순간 정 대표의 얼굴이 경직됐다. 이후 국민통합21 주요 당직자들과 긴급회의를 마친 뒤 동대문 유세 일정을 취소하고 자택(평창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식 철회했다. 여의도당사에서 정 대표의 입장문을 대독한 이는 김행이었다. 다음은 회견 전문.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는 18일 명동 합동유세에 참석,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연설을 들었다. 노 후보는 이 자리에서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했다. 정 대표는 ‘이 같은 표현은 부적절하며 양당간 합의된 정책공조 정신에 어긋난 발언’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지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게 우리의 시각이다.

후보단일화 정신의 큰 원칙은 정책공조와 상호존중이나 이날 합동유세에서 이 같은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우리는 단일화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우리 정치에서 가장 나쁜 병폐는 배신과 변절이며, 이런 현상이 더이상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이에 정 대표는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며, 국민 여러분께서 각자 현명한 판단을 하시기를 바란다.”
- 2002년 12월 18일 김행 발표 전문-
 


- 그런데 한미 발언 때문보다는 차기 대권을 안 줄 것처럼 말한 것이 철회의 결정타 아닙니까.

“이거는 나의 해석인데요.”

전제하며 말을 이었다. 

“정 대표는 국회 상임위부터 외교 분야에 오래 있었어요. 한미동맹과 안보를 굉장히 중요히 여겼습니다. 유세 기간 중 미국에 맞서 싸우겠다는 취지의 노 후보 발언을 여러 번 듣게 된 거예요.” 

이것이 쌓이면서 막판 터졌다는 얘기였다.
“‘저 사람은 대통령 되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거라고 봐요.”
가늠했다. 

 

“패잔병 신세로 여의도 떠나”


- 정치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잘 참았어야 했다?”

넘겨짚었다.
 

정몽준 지지철회 소식을 들은 노무현 대선후보가 정 대표의 자택을 찾아가고 있다ⓒ연합뉴스
정몽준 지지철회 소식을 들은 노무현 대선후보가 정 대표의 자택을 찾아가고 있다ⓒ연합뉴스

- 지지 철회 소식을 들은 노 후보가 자정께 정 대표 집에 찾아갔을 때만 해도 1~ 2시간 문밖에서 기다리다 왔잖습니까. 당시 상황이 신문마다 대서특필되고…. 

“본인들이 기자들 대동하고 와서 한 거잖아요.”

- 그 장면을 기획한 사람이 정대철 대표(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당시 선대위원장)라고 하더라고요. 그분이야 노련하니까 일부러라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자 한 건데 정몽준 측 또한, 노 후보가 완전히 판을 깼다, 대여론전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우리가 순진했고 저쪽이 노회했던 것은 맞아요. 근데 우리도 노회했어야 했을까요. 그랬다면 처음부터 단일화 자체도 안 됐을 거예요.”

- 결국, 자존심 상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자존심 상하게도 많이 했죠.”
기자의 말에 다 동의하지 않았지만, 자존심 부분에는 공감했다. 

- 일부러 (단일화 파기를) 유도했다고 보는 건가요. 

“그렇죠.”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해도 어디에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냐면, 아까 국회에서 공동정부 합의문을 발표했다고 했잖아요?”

-네. 

“(노 후보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집사람이 김행 대변인은 우리 당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기가 찬 듯 “그게 공동정부 선언문 발표하는 자리에서 할 얘긴가요. 사람을 희롱하는 거예요. 뭐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생각한 게 아닌 이상 그럴 수 없는 거죠.”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어요.” 운을 뗐다. “단일화 여론조사 문항 합의할 땐데 끝나고 보도되기를 ‘김민석 선거대책본부장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고 했다. “실제 우리는 서로 좋게 악수하고 헤어졌거든요.” 이렇듯 노 후보 측에서 잘못된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는 전언이었다. “우리가 너무 순진했나 봐.” 

- 정 대표는 이후에도 대권을 계속 생각한 거 아닌가요. 

“그 후로는 제대로 못 봤어요.” 

- 왜인가요.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심정이 어땠냐면 일종의 패잔병 신세 같았어요. 대선이라는 큰 전쟁에서 진 뒤 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굉장했을 때예요.”

‘모든 걸 끊고 여의도를 떠나겠다’는 모 매체와의 인터뷰를 끝으로 청주대학교에 내려갔다. 거기서 정치사회과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중앙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거죠. 정치권과 담을 쌓고 살면서 정 대표와도 인연이 닿지 못했어요.” 회한으로 남겨진 듯했다. “개인적으로는 참 아쉬운 부분이에요. 정말 대통령 만들고 싶었는데….” 두고두고 걸리는지, 인터뷰 초반부터 했던 그 말을 몇 번이고 거듭했다.

 

“탄핵 날, 집 TV 두 대 모두 떼”


박근혜 대통령이 낙점한 김행 초대 대변인이 청와대에서 브리핑에 임하고 있다.ⓒ뉴시스
박근혜 대통령이 낙점한 김행 초대 대변인이 청와대에서 브리핑에 임하고 있다.ⓒ뉴시스

- 박근혜 정부 들어서면서는 청와대 초대 대변인을 맡게 되잖아요.

“12월(2012년) 말에 이정현 홍보수석이 연락을 해왔더라고요. 대변인으로 내정됐다고.”

발표는 2월 25일 보도됐다. “남편도 모를 정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죠(웃음).”

- 어떤 계기로 발탁된 건가요. 

“이명박 정부 당시 어디선가 강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광우병 사태 때 악성 괴담이 돌았는데 보수당에서 잘 대처하지 못해서 유모차 부대까지 나온 거 아닙니까.”

여론은 악화일로였다. 

“왜 엄마들까지 광장으로 나왔을까. 결국, 정치는 국민 행복을 책임지는 거다. 민생을 해결하고 내 아이들의 먹거리를 책임져주지 못하면 집권 못 한다. 커다란 담론이 아닌 정치의 일상화, 생활 정치, 소프트파워가 필요한 시대라고 강연했죠. 그것을 (박근혜)대통령께서 깊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이를 영감으로 해서 나온 게 2012년 박근혜 대선 캠프의 캐치프레이즈였다. 일명 ‘국민행복시대’다. 재임 기간에도 박 대통령은 “국민 행복을 위한 일 외에는 모두 번뇌”라고 자주 말한 바 있다. 

- 박근혜 대통령과 대면한 적은 있나요. 친박도 못 만났다, 그런 말들이 있잖습니까. 

“대변인 위치상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옆에 앉아 있었어요. 잘 모시려고 애썼는데…. 마음이 아프죠.” 
 

국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에 대한 안건을 상정하고 표결을 앞두고 있다.ⓒ뉴시스
국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에 대한 안건을 상정하고 표결을 앞두고 있다.ⓒ뉴시스

탄핵 정국을 돌이켰다. 국회 탄핵은 2016년 12월 9일 234명 의원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이듬해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만장일치로 탄핵을 선고했다. 

“사법적 판단이 아니고, 정치적 판단이었어요.” 개탄했다. 그러면서 “당시 집에 있던 TV 두 대를 다 떼어버렸어요.” 화가 너무 났다고 했다. “도저히 볼 수가 없겠더라고요. 지금까지 집에 TV가 없어요.”

또, 이런 말도 했다. “탄핵 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을 길에서 만났어요. ‘박 대통령 돈 안 받은 건 우리도 알아요.’ 그래서 내가 ‘아니, 그런데도 탄핵시켰습니까’ 물었죠. (기자를 보며) 일 원 한 장 안 받은 건 국민도 알지 않습니까.” 동의를 구했다. “이분은 늘 잠 안 자고 보고서 받고 읽고…. 당신은 깨끗하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 ‘소통이 안 되는 대통령’은 맞잖습니까.

“탄핵에 앞장섰던 김무성·유승민 이런 분들과 좀 더 대화했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있긴 해요.”

-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 때도 논란이 엄청났는데 청와대는 수비 위주였잖아요. 

“정치적 위기였는데 컨트롤 안 된 건 사실이죠.”

부정하지는 않았다. 

 

“尹대통령 정치개혁 완수할 적임자” 


탄핵 이후 보수당은 네 번의 전국단위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했다. 

“악담이 아니고, 여하튼 우리 당이 헤맸듯 민주당도 십 년 헤맬 거예요. 정권재창출 못하면 그 대가는 클 수밖에 없어요. 문재인 정권은 재창출에 실패한 정권 아닙니까.

이재명 대표를 두고 ‘이회창 시즌2’라는 얘기들이 많아요.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내기가 그만큼 어려운 겁니다. 우리 당은 어땠냐. 제대로 된 대선후보조차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윤 대통령은 꿔 온 거잖아요. 그제야 희망을 본 거죠. 기적같이 만들어낸 대통령이에요.”

그는 친윤(윤석열)계로 불린다.
 

2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윤석열 당선인이 꽃을 든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국민의힘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뉴시스
2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윤석열 당선인이 꽃을 든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국민의힘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뉴시스

- 언제부터 지지했던 겁니까.

“2021년 5월 사석에서 정진석 의원을 만났어요. 윤 대통령이 출마를 결심하기 전이에요.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정 의원이 그러더라고요. ‘윤석열 만한 후보가 없다. 영입해야 한다.’”

- 본인 페이스북에 썼지만 대선 기간 이준석 전 대표가 두 번이나 가출하고 판 깨질까 조마조마했다고 했는데 당시 상황이 그 정도였습니까. 

“대선 치르면서 어려웠던 것이 대통령 후보가 있는데도 당 대표가 두 번이나 가출하고 또 울산까지 내려오게 하고, 지하철에서 인사해라, 연습문제 풀어라, 젠더 갈라치기해서 표 잃고….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이 전 대표는 본인 아니었으면 정권교체하지 못했을 거라고 하던데, 과연 도와준 게 맞는지 의문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워낙에 정치를 못했기 때문에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 바람이 20%나 앞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단일화해서도, 겨우 0.73%포인트 차로 이기지 않았습니까. 상황이 이런데도 선거 전날까지 판세 분석을 잘못해 압승한다고 오판해 지지층 결집 와해나 시키고….”

- 왜 그랬다고 봅니까. 

“정권재창출보다 본인을 앞세웠던 것 같아요. 실패해도 계속 당대표 했을 테고 차기 유력 대선주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 

뒤이어 “이 전 대표의 선거 전략은 옳지 않았다고 봅니다. 역사에서 혹독한 평가를 받을 거라고 봐요.”

-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평가하기 어렵지만, 플러스지 마이너스 됐겠습니까. (당 일각에서 효과 없다고 했던 것에 대해서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 버리고 단일화한 후보를 폄훼하면 안 되죠. 앞으로도 당에서 할 역할이 많을 거로 봅니다.”

화제를 돌렸다.

- 정몽준 대선 실패, 박근혜 탄핵을 반면교사 삼아 윤 정부를 대하는 각오는 또 다를 듯한데요.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기를 바랍니다. 정치의 새로운 이정표를 긋는 지도자가 될 거예요.”

- 그렇게 보는 근거는요. 

“지난 1년간의 정치적 결단에서 봤습니다. 가장 잘한 것 중 하나는 정권교체 해서 이재명 대표를 떨어뜨린 겁니다. 죽창가만 부르며 구한말 시대를 사는 듯한 모습을 보세요. 대한민국은 깊은 나락으로 빠졌을 겁니다.

또 가장 잘한 점은 한일 정상회담 성과를 통해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겁니다. 북중러 체제를 억제할, 한미일 대만까지의 블록화를 구축했어요. 미래로 가는 이니셔티브를 쥔 거예요. 윤 정부의 최대 치적이 될 겁니다.”

- 정작 대통령 지지율은 낮습니다. 

“정부 성과에 대한 대국민 홍보전을 해야 한다고 봐요. 당과 대통령실, 정부 부처가 합심해 총력을 기울일 때입니다. 필요하다면 나부터 거리에 나설 겁니다.”

무엇이든 할 기세였다. 
인터뷰 후반부, 윤 정부에 바라는 점도 물었다. 

“대통령께서 정치개혁을 완수했으면 좋겠어요.”

- 정치개혁의 핵심은 공천이잖습니까. 김기현 대표는 전당대회 때 상향식 공천을 약속했는데 말이죠. 

“상향식 공천에 나는 반대해요. 정말 잘못된 거라고 봅니다.”

의외였다. 이유를 묻자, “상향식 공천은 정치 속임수와 같아요. 지금의 정당 구조상 기득권인 현역과 당협위원장한테 유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신인들이 당원 명부 가진 이들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후퇴나 다름없죠.”

-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내리꽂기식 공천은 파열음 날 수밖에 없을 듯싶어요. 공천파동이 될 수 있죠. 

“맨 날 그러니 지금도 공천헌금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만년 당협위원장이라는 말이 있어요. 직업이 당협위원장인…. 떨어질 거 뻔히 알면서 공천권 행사하려고 놓지를 못하죠.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 당의 하영제 의원이 지난 지방선거 때 공천헌금 받아 국회로 체포동의안이 넘어온다는 거 아닙니까.”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영장이 청구됨에 따라 이달 30일 표결을 앞두고 있다. 

- 이를 관행으로 보는 시각도 있더라고요?

“그리 생각하면 안 되죠. 나는 윤 대통령이 강력한 지도체제를 구축해서 과감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제대로 된 후보들을 공천해서 호소해야 한다고 봅니다.” 

갑자기 지난 3·8 전당대회 때가 생각난 듯 “당하고 대통령실이 어떻게 분리가 됩니까.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이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우려했던 일각의 시선을 의식한 듯 이 점을 강조했다.

- 힘이 생기려면 내년 총선이 관건 아니겠습니까. 보통 40~70대까지는 표심 바꾸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2030은 다릅니다. 이들 스윙보터층을 잡으려면 전략이 필요할 텐데요. 

“공감해요. 강구해야죠.”
 

국민의힘 김행 전 비대위원이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파기된 내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은 김 전 위원이 22일 광화문에서 본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국민의힘 김행 전 비대위원이 정몽준-노무현 단일화 파기된 내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은 김 전 위원이 22일 광화문에서 본지 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마무리하면서는 이 점을 짚었다.

- 상품성도 높은데 정작 본인 정치에는 좀 미흡했던 것 같습니다.

“내 정치하겠다고 막 뛰어다니거나 이런 적은 없던 듯요.”

끝으로 “내년 총선에 출마합니까” 아리송한 표정이다. 본지와의 인터뷰를 몇 번 고사했던 그다. 정치 현안이나 시대 얘기는 에너자이저(건전지) 급인데 (이날도 3시간 가까이 말했다) 인물 인터뷰는 꺼렸다고도 해왔다.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뭐라고’. 

개인 관련해 물을라치면 “윤 대통령은….” 말을 돌렸다. “정권교체의 완성은 정권재창출에 성공했을 때입니다.” 이 말도 강조. 차기 대선주자로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 관심을 둔 듯(?). 

다만, 일어나면서는 “대학 다닐 때 김형석 교수(104세·연세대 명예교수) 강의를 많이 들었는데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 뭐라던가요. 

“60·70대가 정말 국가를 위해 봉사할 시기다. 왜냐면 그때는 애들 다 키우고 자유롭잖아요.” 

김행의 올해 나이 63세.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미래 세대를 위해 뭐라도 해야지 않을까.” 
잊고 있었던 뭔가를 기억해 낸 듯 “낸시 펠로시를 롤모델로 삼아볼까.” 혼잣말처럼 잠겨 들어갔다.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그의 책을 사겠다고도 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을 지낸 펠로시 의원은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달아라>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낸 바 있다. 펠로시는 최근 정치나 일터에 있는 여성들을 위해 이 점도 조언했다. “주먹 날리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오래전 정계 입문했지만 정작 자기 정치에는 머뭇거림이 커 보였다. 어떤 도전이든, 의지를 드러낼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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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호 2023-04-11 21:03:20
얘머니?모든 사건에서 사사건건 말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너무나 대단하다.ㅎㅎㅎ선거유언비어는 끝내주게 잘 만들듯~

대깨윤들꺼지삼 2023-04-13 15:43:58
김행의 말같지도 않는 인터뷰 같군요 윤석열 평가는 이미 끝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