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구 “어릴 적 장학금 받은 감사함, 함께 나누고파”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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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구 “어릴 적 장학금 받은 감사함, 함께 나누고파” [인터뷰]
  • 장홍대 기자, 김자영 기자
  • 승인 2023.04.03 1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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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구 지성주택건설 대표이사
돈 한푼없이 맨주먹으로 사업 뛰어들어
장학사업 등 활발히 진행해 사회에 환원
“번 돈의 3분의 1은 국가 위해 쓰고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장홍대 기자, 김자영 기자]

김영구 지성주택건설 대표이사가 지난 3월 30일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한 지성빌딩에서 시사오늘과 가진 인터뷰에서 발언하고 있다. ⓒ 시사오늘

김영구 지성주택건설 대표이사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책상과 책장, 벽면에 빼곡히 전시된 각종 표창장과 상패를 확인할 수 있다.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20대 후반~40대 초반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성주택건설을 일궜다. 2004년엔 비례대표로 16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전라북도 의정회 10대 회장, 대한적십자사 29대 전라북도지사 회장, 김영구 청소년재단 이사장으로서 각종 사회활동과 장학 사업에 적극 나섰다. 

김 대표가 사회에 봉사하고 지역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 등으로 받은 상패만 480여 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16기 전북부의장을 맡아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도 수훈했다. <시사오늘>은 지난달 30일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한 지성빌딩 사무실에서 김영구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영구 대표이사가 사회 봉사활동을 한 공로로 받은 표창장, 상패가 놓인 진열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시사오늘

- 전북대 농대를 나왔다. 전공과 무관한 건설업에 뛰어든 이유가 궁금하다. 

“고등학교는 전주공고 건축과를 나와서 건축에 대한 교육을 받은 바 있다. 건축자재 판매회사를 설립해서 본격적으로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전망이 좋을 것으로 보고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으로 지붕 개량 사업 등이 이뤄져서 필요한 건축자재가 많았다.”

- 창업에 어려움은 없었나. 

“1원 한 장 없이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사이 열정이 가득하던 시절, 용기와 노력으로 시멘트를 만들어 팔았다. 대리점을 얻기 위해 연합철강, 쌍용양회 등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부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부장이나 전무도 거치지 않고 회장실에 직접 들어가 애원도 했다. 그렇게 20만 포 팔 수 있는 것을 40만 포 팔 수 있게 계약하는 등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며 회사를 키워나갔다.”

- 전북주택협회 창립멤버로 알고 있다. 협회를 설립한 배경은 무엇인가.

“종합건설사의 경우 협회가 있는데, 주택업자들은 각자의 주택 사업면허만 있지 협회는 없었다. 힘을 모아 목소리를 내기 위해 만들었다. 당시 주택사업자와 종합건설에서 같은 인력, 1급 기사 1명과 2급 기사 2~3명을 가지고 있어도 지을 수 있는 건물의 차이가 있었다. 주택사업의 경우 150평 이상은 짓지 못하는 반면 종합건설사는 그 이상 규모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같은 자격증으로 종합건설 쪽에서는 10만 평을, 주택건설 쪽에서는 150평밖에 못 짓는다는 게 말이 되나. 전국 곳곳의 주택사업자들을 모아 성명을 받고 청와대와 건설부, 법조계 등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렇게 시작했다. 주택 면허자 3000여 명을 설득해 주택업자가 고층 시공권을 갖게 하도록 법령을 개정하도록 건의했고, 승인됐다.”

- 1996년 지성주택건설로 사명을 변경한 직후 IMF 위기를 겪었다. 당시 에피소드가 있다면 듣고 싶다.

“어려움이 있었다. 모든 자재가 덜 나가더라. 시멘트를 중심으로 하던 사업을 다각화했다. 슬레이트, 합판, 함석 등 건축자재들을 종합적으로 팔았다.”

김영구 대표이사가 “” ⓒ 시사오늘
김영구 대표이사가 정당 정치의 한계로 ‘당이 한목소리를 내야 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 ⓒ 시사오늘

- 2004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국회의원 생활은 어땠나. 

“‘국회’라는 말만 들으면 정의롭고 의리 있는 사람들이 모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국회에 들어가 보니 정당 싸움으로 인해 애국심, 사회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겠더라. 당 수뇌부에서 ‘우린 이거다’ 하면 본심은 달라도 따라서 해야되지 않겠나. 80명, 100명 의원 있는 정당도 결국은 하나다. 하나가 됐다. 개인적으론 대한민국 정치의 잘못이라고 본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당 대표의 ‘그러면 안 된다’는 말에 ‘예’하고 돌아오는 게 한국 정치다. 지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 전체를 이끄는 것과 같다. 정당 정치의 한계다. 외국은 당 대표가 없거나, 있어도 운영위원회, 집행위원 등이 각자의 소신을 발표하는데 그럴 수 없는 분위기였다.”

- 전북 출신 기업가임에도 보수 정당에서 활동한 게 흥미롭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1961년 5·16 정변이 일어나고, 1960년대 중반 김종필 전 총리(JP)가 공화당 청년 당원을 모집했다. 아는 선배가 공화당 사무부장을 해서 그의 권유로 들어가게 됐고, 입당해서 청년 교육을 받았다. JP가 호남 사람이라고 하니 등도 한두 번 더 토닥여주더라. 그 이후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까지. 줄곧 보수 정당에 있었다. 이회창이 한나라당 총재로 있을 때 전라북도의회 의원을 했고, 국회의원도 비례 대표로 선출됐다. 원래는 당적만 가지고, 정치는 하고 싶지 않았다.”

ⓒ 시사오늘
김영구 대표가 지성빌딩 사무실에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국민훈장 석류장 훈장증(사진 왼쪽)과 김영삼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액자에 걸어 배치해두었다. ⓒ 시사오늘

- 그 이유가 뭔가. 

“우리 지역(전주)은 김대중을 최고로 쳤다. 식당에 있는데 민주당 쪽 사람이 ‘공화당은 죽여야 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정도로 지역감정이 심했다. 호남에서 공화당 출신이라고 하면 사업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여러 사회 활동을 했기 때문에 당에서 비례 대표 번호를 받게 됐는데, 다음에 하겠다고 하면서 계속 미루다가 국회의원을 하게 됐다.”

- 원래 리더십이 좋은 사람이었나. 

“초·중·고등학교 시절 회장을 도맡았다. 학생회장, 연대장을 맡았고 고등학생 때는 대한적십자사에서 운영하는 RCY(Red Cross Youth, 청소년적십자) 전라북도 회장을 맡았다. 체구가 좋기도 했다.”

김 대표는 전북 새마을운동 초대 이사장, 대한노인회 고문, 대한적십자사 RCY 전북 총동문 초대회장, 대한야구협회 전라북도 협회장, NGO 한국노년 유권자연맹 전북연합회장 등 다방면의 사회활동을 이어왔다. 전북라이온스장학재단 초대 이사장, 전북은행 장학문화재단 이사장, 전라북도 청소년단체협의회 회장을 맡는 등 청년 관련 장학활동에도 관심을 보여왔다.

김영구 대표이사가 장홍대 국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시사오늘
김영구 대표이사가 장홍대 <시사오늘> 전주본부 국장의 질문에 어릴 적부터 돈을 벌면 국가에 헌신하는 데 쓰고 싶었다고 답하고 있다. ⓒ 시사오늘

- 장학 사업에 관심이 많다. 이유가 뭔가. 

“내가 어린이회장과 연대장, RCY 회장 등을 하며 장학금을 받아 컸다. 돈을 벌면 3분의 1은 회사를 위해, 3분의 1은 가족을 위해, 나머지 3분의 1은 국가에 헌신하는 데 쓰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남을 위해 좋은 일 하는 데 힘써라. 돈을 많이 번다면 사회에 봉사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그런 마음이 장학 사업을 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 특히 청소년 관련 활동이 많은 이유는.

“청소년은 대한민국의 미래 아닌가. 국가 발전을 위해 청소년이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기업인, 정치인, 독지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타이틀은 무엇인가.

“기업인이다. 기업인으로서 가장 보람있게 살아왔다. 1원 한 장 없이 뛰어들어 동분서주하며 애써왔다.”

- 앞으로의 계획은.

“내가 사업하던 시절만 해도 국가 장학 사업이 지금보다 작았다. 지금은 어려움에 처해있는 청소년을 돌보는 사업뿐만 아니라 노인 복지 향상을 위한 사업 필요성이 크다고 생각해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계획이다. 몇 년 전 효심을 가진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는 경로효친대상 시상식도 했다. 요즘 노인 대학에 다니며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60~70대는 물론 90세, 95세 되신 어르신들도 있다. 과거에는 장수하면 천운을 타고났다고 했다. 90세 넘게 사시면서 공부하려는 의지까지 가진 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지성주택건설은 정읍시에 내장산실버아파트를 건설하기도 했다. 해당 실버타운에는 노인복지회관, 요양원, 노인 전문병원 등 시설이 갖춰졌다. 

-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렸을 때 장학금 받았던 기쁨과 감사함으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장학 활동에 힘썼다. 미래의 꿈나무를 육성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보려는 마음이 컸다. 앞으로도 여건이 되는 한, 돌봄 사업을 이어가겠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생각대신 행동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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