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호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게 좋은 정책” [북악포럼]
스크롤 이동 상태바
유일호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게 좋은 정책” [북악포럼]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04.26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의실에서 만난 정치인(228) 유일호 前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효율성이 형평성 보장하진 않아…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이유”
“아무리 좋은 정책도 손해 보는 사람 있어…정책은 선택의 문제”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4월 25일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북악정치포럼’ 연단에 섰다. ⓒ시사오늘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4월 25일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북악정치포럼’ 연단에 섰다. ⓒ시사오늘

고전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신봉했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가격이 상승해 공급이 증가하고 결국 균형을 찾을 거라고 믿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시장 조정 매커니즘은 오랜 시간 주류경제학의 이론적 토대가 돼왔다.

그러나 현대 국가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만을 믿고 시장을 방치하는 곳은 없다. 시장이 완전하다는 믿음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 국가는 어떤 배경에서 국민의 삶에 개입하게 됐을까. 어떻게 해야 국민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정책을 펼 수 있을까. <시사오늘>은 4월 25일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북악정치포럼’ 연단에 선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국가, 개인 권리 가져가는 대신 국민 돌볼 의무 있어”


유 전 부총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부터 꺼냈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였다.

“국가란 무엇일까요. 플라톤의 국가론(The Republic)은 지금까지도 서양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책인데요. 이 책에서 플라톤은 선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의 현명한 독재를 주장합니다. 참주(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비합법적으로 독재권을 확립한 지배자)가 나서는 독재정치도 부정적으로 봤지만, 민주정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시기 동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천 년 동양 사상계를 지배한 유가의 정치사상은 대동세계를 만드는 게 목적이었어요. 그걸 위해서는 선비, 그러니까 현명한 지도자들이 천명을 받은 임금을 잘 보필해서 국가를 이끌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서양 모두 엘리트들이 이끌어가는 세상을 바람직하다고 봤던 겁니다.

그러나 15세기에 르네상스(Renaissance)가 찾아오고 과학혁명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의 생각도 크게 바뀝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천부인권의 일부를 국가에 이양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여기서 국가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 우리가 만든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내 권리를 가져가는 대신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해줘야 하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아야 하는 건 물론이고, 그 외에도 여러 좋은 일을 해줘야 합니다.”

정치 철학적으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짚은 그는, 경제학적으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하는 근거도 밝혔다.

“경제학이론에 ‘후생경제학의 근본정리’라는 게 있습니다. 완전경쟁균형은 파레토최적이며, 어떠한 파레토최적인 자원배분도 완전경쟁균형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겁니다. 완전경쟁균형과 파레토최적배분은 같다는 말이죠. 파레토최적이란 자원배분에 있어 누군가를 희생하지 않고는 어느 한 사람을 더 좋게 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시장균형은 효율적이라는 것이고, 만약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효율성이라면 어떠한 힘도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효율성이 꼭 형평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시장에서 효율성은 열 개의 도토리를 열 사람이 각각 하나씩 나눠가졌을 경우에도 달성되지만, 두 명이 여러 개를 갖고 나머지 여덟 명이 반 조각씩 나눠가질 때도 달성됩니다. 또한 후생경제학의 근본정리는 필요한 전제조건이 위배되는 경우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흔히 시장의 실패라고 불리는 케이스인데요. 때문에 시장을 신봉하는 사람조차도 시장이 모든 걸 해결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정책으론 타협 못 이끌어내”


유 전 부총리는 효율성이 형평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했다. ⓒ시사오늘
유 전 부총리는 효율성이 형평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했다. ⓒ시사오늘

이어서 그는 현대 국가에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경우를 세 가지로 분류해 설명했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떤 경우에 얼마나 시장에 개입할까요. 우리가 준 권한을 정부가 어디까지 쓸 것인가, 특히 경제 영역에서 정부가 어디까지 시장에 개입해야 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의 시장 개입은 대부분 개인들의 경제적 권리를 약화시키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죠.

정부가 개입하는 가장 대표적 영역은 공공재입니다. 공공재는 비경합성과 불배제성이라는 특성을 가진 재화입니다. 그래서 아예 시장의 균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어요. 만약 국방을 시장에 맡기면 어떻게 될까요. 후생경제학의 근본정리처럼 시장에서 효율성이 달성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국방은 전형적인 공공재입니다. 남이 사면 나도 혜택을 보는, 경합성과 배제성이 없는 서비스죠. 시장에서 거래 자체가 성립이 안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강제로 하는 겁니다. 국방을 시장에서 해결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전기, 수도, 통신 등등도 다 마찬가지죠.

두 번째는 형평의 문제입니다. 형평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각자의 생각을 갖고 있을 겁니다. 도토리 열 개를 열 사람이 하나씩 나눠먹는 게 공평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한 사람이 여러 개를 갖고 나머지 사람들은 반쪽씩 나누는 게 옳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다만 논리적으로 누가 옳으냐를 떠나, 반쪽씩밖에 못 받는 사람들의 기분이 안 좋을 건 분명하겠죠. 국가가 이걸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민주주의에서는 정부도 선출이 돼야 하는데, 반쪽씩 받은 여덟 명의 표를 생각하면 한두 사람만 많이 갖게 놔두기는 쉽지 않죠. 그래서 재분배정책은 정부 정책의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거시정책입니다. 원래 정부는 당장 눈앞에 닥친 일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계 대공황이 오면서 은행도 무너지고 회사도 무너지고 실업자는 대량으로 나오는데 해결이 안 됐던 겁니다. 고전적 경기변동론자들은 시장에 실업자가 많이 나오면 임금이 낮아지면서 노동 수요가 늘어나고, 그러면 고용이 다시 늘어나서 균형을 맞춘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사람들도 많이 죽었죠. 이러니까 정부도 미리미리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거죠. 현재 경제정책의 상당 부분은 거시정책입니다. 큰 경기변동이 없도록 하는 게 정책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소개한 유 전 부총리는, 끝으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이 좋은 정책이라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경제 정책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언컨대 좋기만 한 정책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효과만 있는 정책은 없어요. 어떤 정부든 정책의 좋은 점만 강조하지만, 그 이면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손해를 보는 당사자들은 있기 마련이죠. 저는 이걸 정책의 기회비용이라고 부릅니다. 정책은 선택의 문제예요.

그래서 정치와 정책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면, 그런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건 정치의 역할이에요. 그럼 조정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도가 잘 마련돼 있어야 하고, 조정 과정에서 목소리 큰 집단만의 이익을 대변해서도 안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부가 실행하고자 하는 정책이 철저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타협이 가능합니다. ‘사회는 전적으로 평등해야 해’라거나 ‘사회는 전적으로 효율적이어야 해’라는 식으로 가면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건 선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역사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어요. ‘당신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서로 좀 양보해서 이쪽으로 가자’라는 식으로 합의가 이뤄져야 해요.

요즘 보면 토론과 설득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투표로 가서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다수결에는 논리적 문제도 있지만, 토론과 설득 없는 다수결 만능주의는 상대의 승복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50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100% 찬성할 때까지 설득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최종적으로 다수결을 활용하지만, 그 과정에는 반드시 끊임없는 토론과 설득이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정책.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노력. 이게 좋은 정책의 필수요소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