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부 “YS는 외환위기 책임자, DJ는 영웅?…말 안돼”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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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부 “YS는 외환위기 책임자, DJ는 영웅?…말 안돼” [현장에서]
  • 김자영 기자
  • 승인 2023.04.28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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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부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농림해양수석비서관 
27일 ‘더좋은 세상으로’ 정례 세미나 강연자로 나서
‘IMF 외환위기의 실체적 진실’ 비화 전해며 재평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최양부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농림해양수석비서관이 27일 서울 마포구 현대빌딩에서 열린 ‘제77차 더좋은 세상으로’ 정례세미나 강연자로 나서 발언하고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최양부 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농림해양수석비서관은 27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현대빌딩에서 열린 ‘제77차 더좋은 세상으로’ 정례세미나에서 ‘거산 김영삼 대통령을 위한 작은 변명: 1997년 외환위기와 IMF 환란의 역사적 전개와 실체적 진실에 관한 법정다툼’ 강연자로 나서 1997년 10월부터 12월 사이 벌어진 일 중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전했다. 

최 전 수석비서관은 문민정부 청와대에서 4년간 근무하며 IMF 외환 위기 당시 정부 상황을 비교적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는 “DJ는 IMF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평가되고 YS는 환란의 책임자로 평가되는데, 전체 판을 보면 말이 안 된다”며 당시 상황을 다시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최 전 수석비서관은 이날 ‘1997년 외환위기와 IMF 환란의 역사적 전개’를 5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1단계는 한보철강이 부도 처리된 1997년 1월 23일부터 10월 23일 홍콩 증시 폭락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다. 이 사이에 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과 대만 등 국가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7월엔 기아가 부도 방지협약 대상 기업으로 선정됐었다. 

2단계는 외환위기 심화기로 전환된 1997년 10월 23일~11월 18일까지 기간이다. 최 전 수석 비서관은 “1~2단계 사이에 이뤄진 정책적 결정은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책임하에 진행됐다”고 전했다.

최 전 수석비서관은 2단계에서 3단계(1997.11.19~12.6)로의 전환점을 ‘임창열 경제부총리 임명’으로 짚으며 그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이 시기에 이뤄진 중요 정책적 결정은 임창열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2단계 시기에 외환위기 수습이 어려워지니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셸 캉드쉬 당시 IMF 총재가 비밀리에 한국에 들어와 11월 16일 서울에서 강경식 당시 부총리와 협상한다. 내부적으로는 IMF에 가는 것으로 논의됐다. 

그런데 11월 19일, IMF 이사로 재직한 경험이 있는 임창열이 부총리로 임명됐다. 강경식과 김인호는 그러한 인사 조처가 있을 것을 알지 못했다. ‘(YS가) 왜 그랬을까’는 의문이다. 패착이라고 본다. IMF로 가는 사실을 발표할 책임이 있는 강경식과 김인호는 사임해서 나가고, 임창열과 김영섭이 각각 부총리와 경제수석이 되며 상황이 변했다.”

최 전 수석비서관은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가 1997년 11월 19일 진행한 취임 기자회견 녹화영상 녹취록에 담긴 내용을 전하며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IMF에 가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적 없다. 이런저런 조건 하에서 여러 검토를 한다는 유보적 이야기를 했을 뿐, 단정한 적은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지만, 당시 회견에서 ‘IMF 지원을 받겠다는 것이냐, 받지 않겠다는 것이냐’ 묻는 취재진 질문에 ‘우리가 IMF 금융지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1997년 12월 4일 자 <경향신문> ‘달라는 대로 다 줬다’ 기사.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본

“당시 기자회견 내용으로 관계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임창열은 다른 구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족한 외화를, 일본을 통해 빌리면 해결할 수 있다는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취임하자마자 특사를 보내 일본과 비밀 교섭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는 안 됐다.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경, 정부는 IMF에 2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고 밝힌다. 23일 IMF 실무협상단이 국내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 임창열은 27~28일 일본을 방문에 협상을 다시 시도했다. 28일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YS에게 전화를 걸어 부도 위험성을 경고하며 IMF와의 협상을 서두를 것을 촉구한다. 29일 일본에서 국내로 귀국한 임창열은 협상에 돌입하고, 12월 3일 IMF와 정부의 합의문이 발표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15대 대선후보들 간 ‘IMF 재협상론’이 불거진다. 최 전 수석비서관은 당시를 3단계에서 4단계(1997.12.7~23)로 전환하는 변곡점으로 짚었다. 

최 전 수석비서관은 당시 대선 기간 재협상론을 가지고 정치권이 논쟁을 벌이는 사이 외국 투자자들의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등 불안감이 가중되고, 대외 신뢰도가 낮아지는 문제가 발생했다는 취지의 의견을 제시했다. 

정권이 교체되고, 한국은 1997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IMF 관리체제에 들어섰다. 최 전 수석비서관은 1997년 12월 25일부터 2001년 8월 23일까지를 5단계 시기로 구분했다. IMF는 구제 금융 지원을 대가로 여러 조건을 제시했는데, 시장 개방, 구조 조정 촉진, 노동 시장 유연화가 요구 사항에 포함됐다. 대한민국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2001년 8월 23일, 차입금 상환을 마침으로써 IMF 관리 체제가 종료된다. 

최 전 수석비서관은 강연 말미에 “DJ는 IMF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평가되고 YS는 환란의 책임자로 평가되는데, 전체 판을 보면 말이 안 된다. 강경식과 김인호 등 일부 인사의 관리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라며, 그곳에 이야기가 집중됐다. 나머지 뒷이야기는 드러나지 않았다. 태국의 경우 외환위기를 겪고서 사태 원인 등을 탐구한 국가보고서를 작성했다. 한국에는 그러한 국가보고서가 없다. IMF 외환위기 관련 청문회 등은 정권이 교체되고 이뤄졌기에, 당시 야당(한나라당)의 이야기는 자세히 정리돼 있지 않다”며 문민정부가 IMF 외환위기로 저평가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했다.

*본 기사는 최양부 전 농림해양수석비서관이 이날 강연에서 한 발언과 앞서 배포한 인쇄물을 참조해 작성됐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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