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와 기억이 갖는 의미 [황선용의 In &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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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와 기억이 갖는 의미 [황선용의 In & Out]
  • 황선용 APEC 기후센터 경영지원실장
  • 승인 2023.05.04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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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경찰서가 눈에 들어오자 6월 10일 그날이 떠올랐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황선용 APEC 기후센터 경영지원실장)

# 6월 10일의 기억

나는 매주 월요일 서울역에서 첫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출근한다. 그리고 5일을 보내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금요일 저녁에는 다시 서울행 기차를 탄다. 벌써 3년 가까이 이런 루틴으로 움직이고 있다. 힘은 들지만 그냥 그렇게 가는 시간처럼 자연스럽게 하루하루를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부산으로 내려가기 위해 첫 버스를 타고 새벽 4시30분 경 서울역 앞에 내렸다. 그동안 수십 차례 봤을 것인데도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남대문 경찰서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갑자기 특정한 날짜가 떠올랐다.

6월10일.

지난 1990년 6월10일을 떠올렸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그때 중간고사 준비와 리포트 자료를 찾기 위해 덕수궁을 지나 교보문고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는 교보문고 가서 이 책 저 책 뒤지면 뭐라도 자료가 챙겨지는 신기한 시대였다. 지나는 거리 주변에 전투경찰들이 깔려있었다. 그 당시에는 수시로 학생 시위가 일어나던 때라 통상적인(?) 시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전경들 앞을 지나는데 그 중 한 전경이 내 앞을 가로막더니 신분증을 요구했다.

학생이라고 하자. 저쪽으로 가라며 떠밀었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이끌려 전경버스(이른바 닭장차)에 승차하게 됐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버스에 승차해 있었으며 모두들 영문을 몰라 하는듯한 표정들이었다. 한 전경이 버스에 올라타면서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아냐고 말이다. 6월10일. 나는 순간적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6·10만세운동’ 기념일 아닌가요?”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내 머리통은 전경이 휘두른 헬멧(일명 하이바)에 맞아 목이 꺾을 정도로 휘청거렸다. 그날이 6월10일이 맞고 내가 알고 있던 6·10만세운동 기념일도 맞긴 한데 전경이 내게 내었던 문제의 정답을 아니었다. 6·10만세운동이란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날(1926년 6월10일)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말한다.

사실 그 날은 1987년 6·29선언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군 고문 치사사건에 분노한 민심이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와 대규모 시위를 시작한 그 날이었다. 이른바 6·10항쟁 기념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날은 정확하게 6·10항쟁 3주년으로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가 예정돼 있었고, 나는 그 한 중앙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다가 엮여서 버스에 올라타게 된 것이었다. 

이른바 소개(疏開)작전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소개(疏開)의 사전적 의미는 ‘적의 포격으로부터 피해를 줄이고자 전투 대형의 거리나 간격을 넓히거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기 위하여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키는 것’을 뜻하는 군사용어다.

그러나 이때는 시위대에 합류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목적의 소개(疏開)였다. 한차 가득 실은 닭장차는 우리들을 태우고 남대문경찰서 앞에 정차했고 나를 포함한 생면부지의 학생들은 서로 앞사람의 허리춤을 잡고 허리를 숙여 마치 죄인처럼 남대문 경찰서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남대문서 지하 체력단련실에 단체로 쭈그려 앉아 있다가 다시 이동하기 위해 밖으로 이끌려 나왔다.

이번에는 시내버스 몇 대가 남대문서 앞에 정차해 있었다. 그 중 한 대에 올려 태워졌다. 습관적으로 나는 맨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 와중에도 고참 좌석이라고 불리던 맨 뒷자리를 뺏기기 싫어서 버스 안으로 내달려간 나다. 또 한 차 가득 채운 버스는 그때부터 수 시간 동안 서울시를 두어 번 돌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장난기가 돌아 버스정차 버튼을 눌렀다. 부저소리가 나자 전경 한명이 소리를 지르며 쳐다봤던 것이 기억난다.

저녁이 다될 무렵, 우리는 강서경찰서 앞에 내렸고 남대문경찰서에 들어갈 때와 똑같은 자세로 강서경찰서 지하 체력단련실(매트가 깔려있던 기억으로 아마도 유도장이었던 것 같다)로 들어가 경위서를 한 장씩 작성했다. 어떠한 경위로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에 대한 경위를 쓰라는데 주객이 전도된 것이 맞지만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반성문 쓰듯이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경위서를 다 쓰고 강서경찰서 밖으로 나오니 그때 시간이 23시30분이었다.

이른 새벽에 바라본 남대문경찰서 덕에 기억에서 흐려졌던 그날의 6월10일이 다시금 새록새록 떠올랐다는 게 신기했다. 그 뒤로 내 인생이 새로운 전기를 맞아서 어떻게 되었다면 스토리텔링으로 아주 딱 인 기억인데 보다시피 지금의 모습은 평범 그 자체다.

우리는 숫자와, 그 숫자에 얽힌 수많은 기억들을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 숫자가 돈의 단위일수도 있고, 전화번호, 계량단위, 책의 페이지 일수도 있다. 누군가의 생일이 될 수도 있고, 나만 알고 있는 비밀번호가 될 수도 있다. 

30여 년 전 그 날의 기억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지금 내 자신의 존재와 미래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소중하고 필요한 자산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도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앞에 주어진 수많은 숫자와 하염없는 날짜들의 한 가운데에서도 애착을 갖고 하고 있는 무언가를 위한 노력들이 허투루 평가되지 않기를 바라본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서울과기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국방대학원 안보정책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북오도청 (이북오도위원회) 동화연구소 연구원과 상명대학교 산학협력단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국회의원 비서관, 보좌관 등을 지냈다. APEC기후센터(APEC Climate Center) 경영지원실장이다. 저서로 <대통령의 근위병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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