잼민이와 초딩의 시대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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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민이와 초딩의 시대 [기자수첩]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3.05.08 17: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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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이 떠들었지. 앞으로 나와", "선생님, 쟤들도 떠들었는데 왜 저한테만 뭐라고 하세요?"

어렸을 적 교실에서 누구나 한번쯤 화자로 직접 참여했거나 목격했을 선생님과 학생간 대화다. 나 혼자 떠든 것도 아닌데, 같이 떠들었는데, 쟤가 먼저 장난을 쳤는데, 쟤가 더 크게 떠들었는데,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는 아이는 꼭 1~2명이었다. 그땐 참 억울했다. 불평등과 차별감이 느껴졌다. 마음 약한 아이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은 선생님을 향해 욕하며 대들기도 했다. 그땐 몰랐다. 동시에 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기란 불가능하니 몇몇에게 경고해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통솔하기 위함이었다는 걸, 올바른 교육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소수 인원을 지목해 학습 분위기를 환기시켰다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떠든 게 사실이니 억울함을 느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는 걸 말이다.

그것은 불평등도, 차별도 아니었다. 잘못된 행위에 대한 마땅한 심판이었고, 질서를 어긴 것에 대해 응당 책임을 묻는 교육이었다. 이 같은 배움을 거쳐 우린 사회로 나왔고, 어른이라 불리고 있다. 어른들 중엔 아직까지도 잘못을 저지르고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사회에선 책임 의식이 없는 그런 어른들에게 '초딩 같다'고 손가락질을 한다.

이 같은 기준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초딩은 전두환이었다. 전씨는 1988년 강원 인제 백담사 은거를 위해 입산할 당시 "왜 나만 갖고 시끄럽게 하느냐"고 했고, 1995년 내란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땐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전씨는 자신이 불공평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5년 12월 3일 안양교도소에서 단식 돌입을 알리면서 "5공의 정통성 수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결의가 돼 있다. 역사 정리를 빌미로 한 정치보복은 나 자신에 국한돼야 한다"고 적반하장식 입장을 밝혔다. 그렇게 초딩 대표가 옥살이를 살고, 6공화국에 접어들면서 대한민국 사회에서 초딩 같은 어른들은 점차 사라지는 듯했다. 철없는 행동을 하는 어른이 종종 보이긴 해도, 적어도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느냐'며 책임감 없는 실언을 내뱉는 이들은 분명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면서 시민의식이 성장한 결과로 여겨졌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시민의식은 다시 퇴보하고 있는 눈치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현상이 나타났고, 최근엔 "왜 나만 갖고 그래"도 부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인사 실패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에서 "전(前)정권(문재인 정부)에서 지명된 장관 중에 훌륭한 사람 봤습니까", "다른 정권하고 한번 비교해 보시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거대 야당의 수장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돈봉투 의혹과 관련해 기자들이 질문하자 "(불법 정치자금 모금 혐의를 받고 있는) 김현아 전 의원은 어떻게 돼 가고 있나요? 몰라요?", "(금품 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박순자 전 의원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돼 가나요? 관심이 없으신가 보네요", "(공천 관련 녹취록 파문에 휩싸인) 태영호 의원 문제는 어떻게 돼 갑니까?"라고 구설수에 오른 여당 인사들을 하나씩 언급하면서 되물었다. 국민의힘 태영호 최고위원은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과의 녹취록 파문에 대해 "태영호 죽이기", "집단린치"라는 표현을 써 가며 강하게 반발하고, 녹취 유출 직원을 고발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민주당 김민국 의원은 가상화폐 논란과 관련해 "이준석(전 국민의힘 대표)이 하면 자랑이고, 내가 하면 문제냐"고 했다.

초딩들은 정치권 바깥에도 있었다. 얼마 전 지하주차장 지붕 슬래브 붕괴 사고가 터진 인천 검단의 한 공동주택 현장 시행사인 LH한국토지주택공사, 시공사인 GS건설은 사고 원인을 놓고 치열한 '네 탓' 공방을 벌이고 있다. GS건설 측이 "현장 구조설계에 하자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고 LH에 책임 소재를 미루고, LH 측은 "시공책임형 건설사업관리 현장으로 시공사가 자체적으로 기술 등을 반영해 짓는 곳"이라며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 온나라를 흔들고 있는 주가조작 사태엔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들만 수두룩하다.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인사들은 일제히 '왜 나한테만 그러느냐', '나도 피해자다'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분명 이들중 몇몇은 무늬만 '피해 호소인'일 텐데 말이다.

거론된 사람(또는 법인)들은 모두 사건·사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이다. 어른이라 불리고 있다면 '쟤도 잘못했다', '네 탓이오', '나는 모르는 일' 보다는 '사실관계를 떠나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송구하다', '반성하겠다', '향후 수사·조사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라는 메시지가 주가 돼야 하지 않을까. 자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당장 인정하는 건 어려울 수 있어도, 최소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상당하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지난해 5월 전국 아동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응답 아이들 중 절반 이상이 어린이를 비유한 표현 가운데 '비하'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용어로 '잼민이', '초딩'을 꼽았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같은 표현이 널리 사용될 경우 "어린이를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보는 왜곡된 인식과 평가가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려 아이들이 유해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배우고, 그대로 따라한다. 나는 잘못한 게 없고 너는 잘못한 게 많은 사회, 나만 걸려서 불평등한 사회, 나만 책임 지는 게 억울한 사회, 잼민이·초딩 등 비하 용어를 쓰는 것보다 더욱 어린이에게 유해한 건 잼민이와 초딩이 판을 치는 사회를 만든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어른들이 아닐까. 빨강·분홍 카네이션은 사랑, 존경, 감사를 뜻한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받은 카네이션에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어른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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