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그리고… [金亨錫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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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그리고… [金亨錫 시론]
  • 김형석 논설위원
  • 승인 2023.05.21 1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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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 돈 봉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막무가내로 추종하는 무리들도”
“이번 오월엔 시인의 오월 예찬도 실감 안 돼”
“쌍둥이들 잔치가 조금은 위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형석 논설위원)

비가 내리는 지난 18일 부산 동래구 한 아파트단지 담벼락에 장미가 활짝 피어 있다. ⓒ 연합뉴스
비가 내리는 지난 18일 부산 동래구 한 아파트단지 담벼락에 장미가 활짝 피어 있다. ⓒ 연합뉴스

안톤 슈나크는 독일에서 짧은 산문의 대가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기자 생활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참전을 통해 얻은 폭넓은 경험으로 시 같은 산문들을 지어냈다. 그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우리나라 국정 교과서에도 실렸다. 히틀러에 충성한 문인이라고 질타받기도 한다지만 그게 그의 문장까지 탓할 일은 못 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정원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져 있을 때,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범의 모습, 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달리는 기차 등등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썼다.

시대가 다르고 살아온 곳이 다르고 환경이 달라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대개 비슷한 모습들이다. 인류 공통의 정서가 그런가 보다. 그러나 2020년대를 사는 한국인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의 목록에는 몇 가지가 더 추가된다.

한 정당의 전당대회에서 난무했다는 돈 봉투가 이 시대 한국인들을 슬프게 한다. 가난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위장한 채 수십억 원에 달하는 코인을 만졌다는 젊은 국회의원의 매끈매끈한 얼굴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진실을 외면한 채 ‘제 편’이라면 무조건 챙기려 드는 우리 안의 숱한 군상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나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곧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하고 자신이 없어지는 우리들의 모습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우리를 더더욱 슬프게 하는 것들이 또 있다. 대장동 비리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고 해서 국민들을 분노케 해놓고 1년이 넘도록 대충이라도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시원한 답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 나라 정부와 사법체계의 허술함과 무능함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런 와중에 공천받아 내년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 돼보겠다고 주접을 떠는 정치꾼들과 ‘권력 바라기’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나라를 위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이, 순전히 자기를 위해서만 그 중요한 ‘정치 일’을 해보겠다는 그들 정상배의 모습이 슬픔을 넘어 이제 우리를 허탈하게 한다.

며칠 전 우크라이나에서 우리나라에 찾아온 그 나라 대통령 부인 젤렌스카 여사의 우울한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내내 억눌렸다가 한꺼번에 치솟는 전기 요금도 우리 서민들을 슬프게 한다. 도심 거리에서 밤을 새워 가며 술판을 벌인 노조원들의 모습이 슬프고 사상 최초로 전직 대통령이 문을 연 책방이 주는 의미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코로나가 물러가면 많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추가 목록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이 선사하는 기쁨을 너무 많이 훼손시키는 중이다.

수필가… 아니, 우리들의 시인 피천득이 예찬한 오월의 기쁨마저 우리는 누릴 수가 없다. 그는 ‘오월은 찬물로 갓 세수한 청신한 얼굴’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월 예찬을 함께 느껴보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기쁜 얘기, 밝은 뉴스를 찾아봤다. 이 오월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모두 있는 가정의 달이라고도 하기에. 있긴 있었다. 신문 한쪽에 아이들의 이쁜 모습이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쌍둥이들의 웃음소리가 우리를 미소짓게 했다

지난 13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종합운동장에서 ‘쌍둥이 플러스 홈커밍데이’ 행사가 열렸다. 850명의 쌍둥이들과 보호자 등 1800명이 모인 대형 행사. 모인 쌍둥이들은 모두 전종관 서울대 의대 교수가 분만을 집도해 받아낸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페이스 페인팅, 인기 만화 캐릭터 ‘뽀로로’ 공연 등을 만끽하며 내내 즐거워했단다. 애들의 까르르까르르 웃음소리는 꽥꽥대는 거리 집회자들의 고함소리와 대비되는 천사들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다태아들이 같은 멜빵바지를 입고 똑같은 운동화를 신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유모차에 탄 쌍둥이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당당하게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줬다.

전 교수는 국내 최고의 다태아 분만 권위자로 알려졌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는 그렇게 쌍둥이 분만 4500건, 세쌍둥이 분만 550건, 네 쌍둥이 12건, 다섯쌍둥이 1건 등을 받아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어린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출산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라고 말했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 ‘결혼하지 않겠다’라는 20대, 30대 여성들이 늘어나는 것을 의식한 언급이리라.

전에는 꺼리던 쌍둥이 출산이 이제 경사가 됐다. 뉴스를 보니 한 가정과 동네잔치를 넘어 나라 잔치가 된 모습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 위기감 때문이다.

충북 괴산군에 사는 한 부부는 셋째 아이와 넷째 아이를 쌍둥이로 낳아 군으로부터 출산장려금 1억 원을 받게 됐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들도 잇따라 출산장려금 정책의 시행에 들어가거나 준비 중이다.

우리나라의 저출산은 이제 외신의 뉴스거리로까지 등장했다. 정부와 지자체들이 서둘러 출산장려정책을 내놓고는 있지만 갈 길이 멀다. 

필자의 기억으로 저출산 문제는 고령화 문제와 함께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주요 이슈로 등장, 언론에서도 줄곧 다뤄왔다. 그러나 정쟁에 바쁜 정치권과 그런 정치권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정부가 제대로 된 정책을 시행하지 못 한 채 20여 년을 흘려보냈다. 과도한 사교육비, 경력단절 여성근로자, 맞벌이 부부의 육아 문제, 젊은이들을 위한 주택 문제 등등 해결할 일이 여전히 산 넘어 산이다.

‘이 맑은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아무리 산 넘어 산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이렇게 기쁨을 주는 아이들, 나라의 미래를 보장해 줄 아이들을 위한 정책은 지금 당장 모든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아 마땅하다. 무슨 일에서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게 불변의 진리 아닌가.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이렇게 기막힌 오월 예찬의 노래를 부른 시인도 이내 시간이 흐르는 현실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았던가.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김형석(金亨錫)은…

연합뉴스 지방1부, 사회부, 경제부, 주간부, 산업부, 전국부, 뉴미디어실 기자를 지냈다. 생활경제부장, 산업부장, 논설위원, 전략사업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정년퇴직 후 경력으로 △2007년 말 창간한 신설 언론사 아주일보(현 아주경제)편집총괄 전무 △광고대행사 KGT 회장 △물류회사 물류혁명 수석고문 △시설안전공단 사외이사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사외이사 △ 중앙언론사 전·현직 경제분야 논설위원 모임 ‘시장경제포럼’ 창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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