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문화의 효시, 쎄시봉 음악과 옛 추억 [일상스케치(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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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문화의 효시, 쎄시봉 음악과 옛 추억 [일상스케치(81)]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3.05.2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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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1세대에서 7080까지…조영남을 필두로 트윈 폴리오, 그리고 양희은으로 이어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한국 포크송의 산실은 언제 어디였을까. 청년문화의 붐이 일기 시작하며 음악감상실에서 가수들의 공연활동이 본격화됐다. 흔히는 1960년대 명동에 있던 '쎄시봉'으로 알려져 있다. 20대 초반이었던 가수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등이 청춘을 보냈던 곳이다.

열창 중인 조영남. ⓒ연합뉴스
열창 중인 조영남. ⓒ연합뉴스

조영남의 딜라일라 열풍

그러한 쎄시봉 음악의 맏형이자 자유로운 영혼인 가수 겸 화가 조영남. 그가 데뷔 50주년을 맞아 진행한 인터뷰 기사를 접하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다. 내가 만난 대중가요 중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첫 노래가 조영남의 데뷔곡 '딜라일라'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중학교 입시를 앞둔 터라 과외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들은 곡이었다. 저 멀리 골목길에서 고등학생들이 늦은 밤 떼창으로 불러 젖히던 딜라일라는 초등학생인 나에게조차 너무나 강렬했다. 그 당시 고향 마을은 문화적 접촉이 쉽지 않은 작은 동네라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나중에서야 1969년 톰 존스의 노래를 번안한 '딜라일라'로 TBC '쇼쇼쇼' 무대를 통해 조영남이 정식 데뷔했다는 걸 알았다.  그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고, 전통 클래식 성악 전공자가 대중가수로, 오늘날 조영남의 탄생과 존재감을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

가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이 1970년대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이 1970년대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설의 트윈 폴리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고향 하동보다 도시인 진주로 진학해 라디오 청취 선택권이 좀 더 다양해졌다. 서서히 팝송을 듣기 시작했고 나나 무스쿠리의 over and over와 함께 알게 된 '트윈 폴리오'의 존재. 그들의 '웨딩 케익과 하얀 손수건'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소녀 감성에 불을 지른….

처음 들은 후 그 감동과 설렘은 여전히 강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트윈 폴리오는 이미 해체됐다고…. 얼마나 아쉽던지.

이에 하숙집 언니네 라디오에 귀 기울이다 못해 문화적 갈증이 심했던 난 엄마를 졸라 조그마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손에 쥐게 되었다. 그 후 거의 라디오와 동고동락, 많지 않은 채널 주파수를 맞춰가며 오매불망 트윈 폴리오 노래가 방송을 타길 기다렸다. 그렇다 보니 시험공부는 뒷전이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찐친이 됐다.

FM 라디오 음악에 심취

고등학생이 되자 서울로 유학을 온 나에게 공부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한 게 FM 라디오 청취였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영시의 다이얼' 등 시그널 뮤직과 함께 입시지옥에 찌든 하루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었다.

또한 그걸로 부족해 부모님께 요청하여 작은 휴대용 축음기를 갖게 되었다. 용돈을 쪼개고 쪼개 간식을 줄이고, 듣고 싶은 음반을 사 수시로 듣고플 때 들을 수 있었다. 음악 수업을 위한 클래식 음반과 트윈 폴리오의 재킷을 사서는 듣고 또 듣고….

이토록 풍성한 음악 감상 중, 쎄시봉 멤버로 동시기에 활동한 가수 이장희도 인물이었다. 수업 끝나고 학원 가는 버스 안에서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등 그의 자작곡들이 수시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영화 '별들의 고향' ost에 참여해 발표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도 특히 애청한 곡이다.

한편, 트윈 폴리오는 해체됐지만 솔로로 전향한 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 아쉬움을 달래줬다. 둘 다 싱어송라이터로 불후의 명곡을 만들어 여전한 인기를 구가했다.

게다가 송창식은 전성기를 맞아 각종 인기차트에 오르며 가요대상까지 거머줬을 정도다. 그의 곡들은 마치 시인의 노래와 같았다. '사랑이야, 우리는 그리고 상아의 노래' 등등 주옥같은 노래를 발표했다. 그리고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 어제 내린 비, 조개껍질 묶어 등은 캠퍼스 문화의 전유물이었다.

또 솜사탕 같은 달콤한 목소리와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쎄시봉의 막내 김세환은 미소년의 이미지로 등장해 여심을 사로잡았다. 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라디오 주제가 '길잃은 사슴'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인기를 끌었다.

쎄시봉에서 청개구리로

김민기. ⓒ학전
김민기. ⓒ학전

쎄시봉이 문을 닫으면서 청개구리라는 장소가 청년문화의 전통을 이어갔다. 전설로 남은 송창식과 윤형주의 트윈 폴리오 다음으로 그들을 이은 김민기와 양희은 등의 등장 무대였다.

김민기는 나의 여고시절, 노래 '친구'외엔 방송에서 거의 듣지 못했고, 금지된 음반 제작 때문에 쫒겨 다닌다는 풍문만이 떠돌았다.

그 후 친구가 소장하고 있던 김민기 1집을 들으며 역시나 명반이야 하며 아쉬움을 달래준 이상으로 빠져 들어갔다. 쎄시봉 멤버는 아닐지라도 또 다른 전설로 나의 학창 시절 우상으로 김민기는 지금까지 자리매김하고 있다.

포크송의 대모 격인 양희은. ⓒ연합뉴스
포크송의 대모 격인 양희은. ⓒ연합뉴스

대학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고 열려 있던 시기에  만난 인물이 양희은이었다. 그녀의 청량한 음색과 가창력은 아름다운 노랫말과 함께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아침 이슬'을 위시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하얀 목련, 그리고 한계령 등등….

김세환, 조영남, 송창식 그리고 윤형주. 쎄시봉 콘서트 중. ⓒ연합뉴스
김세환, 조영남, 송창식 그리고 윤형주. 쎄시봉 콘서트 중. ⓒ연합뉴스

쎄시봉 음악의 긴 호흡과 의미

한국음악계에 포크 열풍을 일으킨 음악감상실, 쎄시봉. '쎄시봉'은 지난 1960년대 서울 무교동의 음악다방으로, 쎄시봉 세대부터 싱어송라이터 개념이 생겼다.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 송창식, 이장희 등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젊은이들이 통기타 라이브 공연을 펼치며 한국음악계에 포크 열풍을 일으킨 ‘청춘문화의 산실’이었다.

6~70년대 주역으로 청년기에 활동하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쎄시봉 멤버들은 수많은 영혼의 동반자로 이제 같이 늙어 간다. 통기타 1세대였던 그들이 데뷔 50주년을 넘기며 여전히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저마다 다른 음색과 스타일로 노래를 불렀지만, 서로의 장점을 품는 완벽하고 감미로운 화음으로 청중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지금도 그 시대의 추억을 기억하는 7080세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팔순을 향해가고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닌 듯, 여전히 활발하고 정열적으로 활동 중이다. 아름다운 곡으로 대중들에게 행복을 선사한 만큼, 앞으로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오랫동안 무대를 지키고 승승장구하길 바란다.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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