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웠던 게리럭 장군의 여유를 기억하며 [황선용의 In &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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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웠던 게리럭 장군의 여유를 기억하며 [황선용의 In & Out]
  • 황선용 APEC 기후센터 경영지원실장
  • 승인 2023.06.01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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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 속에서도 한번쯤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황선용 APEC 기후센터 경영지원실장)

게리럭 장군의 장군으로서의 여유를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도 한번쯤은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픽사베이
게리럭 장군의 장군으로서의 여유를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도 한번쯤은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픽사베이

가끔은 내적 외적 환경에 따른 마음의 여유를 생각해보게 되는 날들이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부쩍 그 여유가 부족해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역시 생각해보게 된다. 지난 5월15일은 스승의 날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스승의 날 이외에 개인적으로 소소하게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기념비적인 날이기도 하다.

앞서 6월10일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새기며 추억을 남긴 바가 있지만 5월15일은 약간 결이 다른 날이다. 내가 전역한 날이다. 그 날 주변에서는 대학 스승님들을 찾아 식사를 하고 남다른 기념을 한다는 분들이 꽤 있었다. 나는 그 날 과거 군에 있을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며 홀로 기념을 했다.

당시를 떠올리다보니 떠오르는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게리럭 장군이 바로 그다. 게리럭 장군은 당시 미군장성이었다. 게리럭 장군의 정식 풀네임은 Gary E. Luck으로 E가 미들네임으로 들어가지만 그냥 Gary Luck으로 불렸다. 그는 미군 4성 장군으로 제8대 한미연합사령관(93.6.15~96.7.9)이자 21대 유엔군사령관이었다. 

나는 1992년 11월에 공군사병으로 입대한 이후 의장병과 특기를 받아 국방부에서 근무를 하다가 1993년 12월24일자로 한미연합사령부 의장대대로 파견 나가게 됐다. 마침 내가 파견전입하게 된 날이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전날이어서 미군 막사는 잔치분위기였다. 한미연합사 의장대대는 한국군, 미군, 필리핀, 태국, 스위스 등 소속 의장업무를 담당하는 군인들이 함께 막사를 사용했다. 

각설하고 아무튼 그 시기에 다국적군과 함께 내무반생활과 훈련, 근무를 같이 서게 되는 일들이 잦은 만큼 트러블도 많이 일어났었다. 사령부 바로 길 건너에 숙명여대가 있었고, 반대 편 쪽으로는 이태원이 있어서 미군을 비롯한 외국군인들은 밤마다 파티를 열었다. 반면  나를 포함한 한국군들은 근무만 그곳에 할 뿐이지 통제는 국방부 지시를 받고 있는 만큼 일과 이후의 통제된 규율 속에서 미군 등 외국 군인들과 어울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막사를 쓰고 있다 보니 온갖 소음들로 인해 불편함이 늘 존재했다. 3층 막사 중 한국군(육군, 해군, 공군, 해병의장대)은 3층을, 2층과 1층 일부는 미국, 필리핀, 태국, 기타 외국 군인들이 사용을 했다. 따라서 아래층으로부터 밤마다 들려오는 음주가무의 공해는 큰 문제를 발생시키곤 했다.

나는 1994년 말 경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아래층에서 미군들이 또 파티를 하는지 음악과 함께 시끌벅적한 소리들이 들려오는데 그 와중에 한국 여자들의 웃음과 괴성이 내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나는 복도로 나가 바로 아래층에서 파티를 하고 있는 미군들을 향해 아주 거친 언사(言辭)를 날려버렸다. 내용은 한국 여자들이 그들과 술판, 춤판을 벌이는 것과 관련된 해서는 안 될 거친 내용이었다는 것만 말해둔다.

나의 아주 강력한 언사는 다음날 막사 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실을 파악해보니 어제의 그 파티는 한 미국병사와 한국 여성과의 결혼 후 뒤풀이 파티였다는 것을 알게 됐고, 결과적으로 나는 남의 잔칫상에 재를 끼얹은 꼴이 됐다. 나는 그 날부터 일등병들이 서게 돼 있는 사령부본청의 도어맨 근무를 하게 됐다. 즉 업무적으로 좌천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정도의 벌칙은 그나마 가벼운 별칙 수준이었다. 감사할 따름이었다.

한미연합사령부 본청에서 내가 맡은 도어맨 업무는 장군들이 출퇴근하거나 출입을 할 때 문을 열어주고, 닫고 경례를 하는 아주 단순한 업무였지만 그 업무를 통해서 장군들과 짧은 시간들이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곤 했다. 게리럭 장군은 우락부락한 눈 매무새와는 달리 굉장히 친근하고 배려심이 많은 장군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도어맨 근무를 할 때는 항상 두 명이 한 조로 짝을 이뤄 근무를 서는데 그 날은 내가 도어업무가 아닌 본청 내부에서 영접을 하는 테이블업무를 하고 있었다. 이제 갓 일병을 달은 후임병이 도어임무를 서고 있었는데, 마침 저 멀리서 감은색 벤츠차량이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게리럭 장군의 관용차였다. 

사령관의 운전병이 도어맨의 위치를 확인한 후 장군이 승차하고 있는 차문의 위치와 도어맨의 위치를 정확하게 맞춰서 세워주면 도어맨은 문을 연다. 그리고 장군이 내리고 나면 문을 닫고 뒤돌아서서 들어가는 장군을 향해서 경례를 한다. 이런 식으로 출근하는 장군들에 대해 의전이 이뤄진다. 잠시 후 게리럭 장군 관용차가 다시 본청 정문 앞으로 들어섰다.

사령관이 외부로 나간다는 것이다. 게리럭 장군이 건물 내부에서 나와 차량 탑승을 하는데 문을 열어줬던 후임병이 사령관의 발 하나가 아직 차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사령관의 관용차는 특수 방탄차여서 문짝 하나의 두께가 20cm 이상 된다. 결국 게리럭 장군의 오른쪽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게리럭사령관을 보좌하던 부관들과 다른 간부들은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한국의 일개 일병의 실수로 다리가 부러졌으니 난리가 나지 않으면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문을 먼저 닫아 사령관의 다리를 부러뜨린 후임병은 얼굴이 백짓장처럼 변해있었다. 그리고 이를 근처에서 지켜보던 다른 대대소속 한국군 간부 또한 어쩔 줄 몰라 하며 후임병을 질책했다.

그러나 게리럭 장군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소란스러운 차 밖의 상황에 대해 손가락으로 휘휘 저으면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부관에게 우선 병원으로 가자고 했고 사령부 내 병원으로 급히 차는 떠났다. 그 뒤로 몇 달 간 게리럭사령관은 목발을 짚고 출퇴근을 했다.

다리가 부러진 뒤 한국군 의장대 막사에서는 후임병이 친 사고를 어떻게 수습을 할지 분주했다. 그러나 다음 날 사령관실로부터 아무 문제를 삼지 말라는 연락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임병은 자체 징계를 받을 처지였다. 그런 한국군의 내부 상황을 알고나 있었는지 다음 날 또 다시 전화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령관 다리를 부러뜨린 병사가 다시 도어맨 근무를 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

결국 사령관실의 두 번의 전화가 진짜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진정성 있는 전화라는 것을 알고 한국군 내부에서도 이번 사건을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그 후임병을 다시 도어맨 근무에 내보내기로 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들어온 그 후임병이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마침 사령관의 차가 도착을 해서 문을 열어줬더니 사령관이 목발을 짚고 내리면서 제게 이렇게 얘기 했습니다”
“뭐라고 하는데?”
“나가기 싫은 마라톤대회가 있었는데 덕분에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서 피자를 먹을 수 있었다. 땡큐”

이렇게 말하면서 후임병의 등을 한차례 두드리고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미국인들의 이러한 성향을 위트 또는 유머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것은 여유였다. 고통스러웠지만 지키고 보여주고 싶었던 그의 여유였다고 본다. 벌써 28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게리럭 장군의 장군으로서의 여유를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도 한번쯤은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서울과기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국방대학원 안보정책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북오도청 (이북오도위원회) 동화연구소 연구원과 상명대학교 산학협력단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국회의원 비서관, 보좌관 등을 지냈다. APEC기후센터(APEC Climate Center) 경영지원실장이다. 저서로 <대통령의 근위병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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