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의 YS와 2012년의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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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의 YS와 2012년의 안철수
  • 윤명철 기자
  • 승인 2012.12.20 17: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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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아름다운 승복이 아쉬운 18대 대선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전례 없는 보수와 진보의 치열한 경쟁속에서 18대 대선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가장 이슈가 된 인물은 ‘안철수’였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통 큰 양보로 박원순 현 서울시장의 당선을 만든 주인공이다. 그 이후 안철수 전 후보는 ‘정치쇄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국민의 관심사였다.

정치권에선 그의 대선출마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결국 그는 지난 9월 정치쇄신을 부르짖으며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안철수 전 후보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기존 정치권을 ‘낡은 정치’로 몰아세우며 ‘안철수 현상’을 일으켰다.

그의 출현으로 대선판은 박근혜·안철수·문재인 ‘빅3’ 구도가 형성했다. 대선의 모든 이슈는 절대강자 박근혜 후보에 필적할 ‘야권 후보 단일화’에 집중됐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본격적인 ‘안철수 때리기’에 나서면서 지지율 정체와 하락현상이 발생했다. 결국 그는 대선 등록을 코 앞에 두고 정권교체를 원한다며 불출마 선언했다.

이후 안철수 전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보다는 어쩡쩡한 태도를 보이며, 정권교체를 원하는 야권 지지자들의 속마음을 태웠다. 하지만 그는 대선을 얼마 앞두고 문재인 후보의 끊임없는 구애에 적극적인 지원을 선언하고 ‘공동유세’에 나섰다.

그의 합류로 대선판은 다시 요동쳤고, 문 후보는 10% 가까이 벌어졌던 박근혜 후보와의 격차를 줄이며 선거 막판에는 오차범위내로 추격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안철수 전 후보는 대선 당일 투표 결과도 안 보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여권에서는 안철수 전 후보의 미국행 선언을 최대한 활용했다. 혹자는 안철수 전 후보가 “뒤끝이 있다”고 평가했다. 정권교체를 원하던 야권지지자들은 뭔가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18대 대선은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김영삼과 김대중은 1970년 정치쇄신을 이끌어 ‘40대 기수론’을 만들어 냈다. 사진은 당시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DJ에게 악수를 건네는 YS.ⓒ사진제공=김영삼 자서전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영삼이다.

김영삼은 지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40대 기수론을 선언했다.

당내 노장층이 즐비한 보수정당에서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오자 당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당내 최대계파를 이끌었던 유진산도 구상유취(口尙乳臭)라고 평가절하 했지만 김대중에 이어 이철승까지 힘을 보태자 40대 기수론은 대세로 자리잡았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유진산은 자신이 불출마를 선언하는 대신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중 한사람을 지명할 수 있는 지명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김영삼과 이철승은 찬성했고, 자신을 지지해줄리 없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거부했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하루 앞둔 1970년 9월 28일 유진산은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을 지명했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 자리가 눈앞에 와 있었다. 하지만 이철승의 배신으로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에게 패했다.

당시 실시된 1차 투표 결과는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로 김영삼은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무효표는 이철승의 표였는데, 2차 투표에서 김영삼 410표에 김대중 485표가 나왔다. 

약속을 깨고 막판에 이철승이 김대중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아무 조건 없이 결과에 승복했다.

그러나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자로 김대중이 지명된 것에 반발한 구(舊) 민주당 구파 출신 윤보선, 장준하, 박기출 등은 1971년 1월 6일부로 신민당을 탈당, 선명야당의 기치를 걸고 국민당을 창당했다.

여기서 김영삼은 의미있는 결단을 내렸다. 같은 구파였던 김영삼은 경선 결과를 승복하고 신민당에 남았다. 김영삼은 탈당을 거부하고 신민당에 남아 있었으며, 이후 전국 방방곡곡 평생의 라이벌인 김대중의 유세를 다니며 “김대중 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라면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김대중 씨를 앞세우고 전국을 누빌 것을 약속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대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지만, 국민들 뇌리에 ‘YS는 결과에 승복한 깨끗한 정치인’으로 각인됐다. 21년이 지나고 김영삼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다시 2012년으로 돌아와 보자. 대선이 끝난 후, 진보세력의 대표적 정치인인 노회찬 의원은 '안철수 전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나왔을 경우 대선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을까'하는 가정에 대해 "안철수 현상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어서 (가정에) 조금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1차적으로 국민적 지지로 후보가 돼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안철수 현상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라며 "다른 기성 정치질서에 대한 문제제기는 성공했지만 이를 바꿀 수 있는 적임자로서 확신을 주는 데에는 미흡했기 때문에 단일후보가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애초에 안철수 전 후보가 후보 사퇴했을 때, 1970년의 YS처럼 문재인 후보에 대해 무조건 지원을 선언하고 아름다운 단일화를 했더라면 선거의 양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 만약 2012년 대선에 YS가 안철수 전 후보의 입장이었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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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음 2012-12-20 19:49:52
문재인도 박근혜에게 딱 그 만큼 졌음.
그걸 무시한 댓가는 민주당의 몫이죠.
안철수는 사퇴 직전까지 여론조사 박근혜와의 양자대결 여론 격차가 오차범위 넘어섰음.
너덜너덜해진 그 때 조차...
민주당 소속 문재인의 한계임 아무리 아름다운 단일화를 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