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 비화(秘話), ´단계연´…삼성家 어디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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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 비화(秘話), ´단계연´…삼성家 어디쯤 있을까?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3.03.09 1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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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 비화(秘話)와 삼성그룹 이병철(2)
경주 최부잣집 후손 최준이 준 단계연
최염 “단계연, 지금 생각해도 몇 십억…”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이 이야기는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설립자 최준)가 어째서 삼성그룹 창업자 故 이병철 회장에게 넘어갔는지,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故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옮겨가게 됐는지, 특히 단계연을 둘러싼 비하인드 스토리(뒷이야기)를 담고 있다. 화자는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회장이자 성균관 고문인 최염(80)씨로 그는 대구대 설립자 최준 선생의 손자이다. 최염 씨와 만난 건 지난 대선 기간 서울 종로 근처 종친회 사무실에서였다.<편집자 주>

1947년 최준 선생은 경북도민의 뜻을 모아 대구대를 설립했다.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의 교육 사업에 헌신하고자, 전 재산을 털고, 대구의 많은 유지의 기부로 만든 거였다. 당시는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해야 징집이 보류될 수 있었다. 이는 얼마 안 있어 학생들이 늘어난 계기가 됐다.
5.16 쿠데타 후 박정희 대통령은 대학정비령을 만들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열어 시설 기준에 미달하는 사립학교는 전부 허가 취소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학생들이 4.19 때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것을 경험한 터라 도내 사립대학을 묶어 국립대학으로 강제 편입해 학생들을 줄여나갈 심산이었다.

영남대 전신 대구대 설립자 최준 선생의 손자 최염(80)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회장.

박정희 정권 ‘대학정비령’…‘청천벽력’

최준 선생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자칫 대구대가 흐지부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학교설립에 쓰신 터라, 시설투자를 할 여력이 없었어요.”

남은 건 이 같은 엄포에 저항하는 일 뿐이었다. 국립대와 사립대가 경쟁관계로 있어야 교육이 발전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최 선생의 반발에 문교부(현 교육부)는 신문에 공고를 내고 “대구대학 학생이 경북대학(국립대)으로 전학가지 않으면, 징집보류 혜택을 주지 않겠다"며 압박했다. 

“순식간에 900여 명이 전학 갔습니다. 160~170명 정도 남았는데, 저와 제 친구들은 경북대학 가지 말자며 학생회를 사수하기도 했지요.”

대구대가 기사회생 한 건 2년가량이 지난 뒤였다. 최 선생이 아는 인물로 문교부장관이 바뀌면서 모집 금지령도 해제되는 등 일순간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다.

삼성 이병철, 신현확 제안에 교육사업 눈 돌려

학생들 사이에서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한창일 무렵. 삼성은 데모하는 젊은이들에게 매국노, 매판자본의 앞잡이, 삼분폭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시멘트 사업을 하면 더 재벌이 될 거라고 여긴 이병철 회장은 시멘트 공장 인가 신청을 냈다. 또 허가를 받는데 유리하도록 신현확 전 부흥부장관을 사장으로 고용했다.

하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삼성의 뜻을 들어주지 않았다. 기존 업자인 동양시멘트, 쌍용양회주식회사 등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일이 없어진 신 전 장관은 급기야 아이디어 하나를 내게 된다. 삼성의 기업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 교육기반사업을 하려고 한 것이다.

“신현확 생각은 등록금을 조금만 받고, 전원 기숙사를 제공해주면 학생들 반감이 없어질 거라는 거였어요. 이런 얘기를 이병철 회장에게 하자 이 회장은 굿 아이디어라고 반색했대요. 문제는 땅 사고, 건물 짓고, 허가를 받으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죠. 그래서 재정난에 처한 대학을 사자고 결정한 겁니다.”

남의 대학을 인수하기로 마음먹은 신 전 장관은 대구대학을 염두에 뒀다.

“신현확은 할아버지 성품을 잘 알고 있었어요. 고향이 경북 칠곡인데 오랜 기간 할아버지 밑에서 대구대학 교수로 있었거든요. 그래서 대구대를 맡아서 운영하자고 이 회장에게 건의하게 된 거예요. 이 회장은 경주 최 부잣집에서 학교를 내놓겠느냐며 갸웃했고, 신현확은 자신 있다고 한 겁니다.”

최염, "이병철 할아버지 앞에서 넙죽 큰절"
이병철, 제일 가는 대학 만들겠다고 약속

하루는 모교 교수이자 은사였던 신 전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1963년경으로 기억하는데, 하루는 저를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최염 씨와 신 전 장관은 술집에서 만나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이윽고 신현확이 대학 얘기를 꺼냈다.“대구대가 대학정비령 문제로 언제 또 도태될지 모르니 삼성 이병철 회장한테 학교 운영을 맡기는 게 어떠냐는 거였지요.”

신현확 전 장관의 말은 이병철 회장이 제일 갑부인 만큼 학교에서 이익을 취할 일도 없고, 학교가 잘 운영되면, 최준 선생 또한 빛이 난다는 거였다. 이를 할아버지에게 권고해보라는 의사표시를 한 셈이다.

이런 과정 끝에 이병철 회장은 최준 선생 댁을 방문하게 된다.

“이병철은 울산비료공장의 부지를 정하는 길목에 우리 집(경주 교천)에 들렸다면서, 자기의 둘째 아들인 이창회와 함께 왔어요. 이창희와 저와는 개성 고등학교 동기인데, 얼굴은 몰랐지요. 할아버지와 저, 이병철과 창희는 독립운동가 안 백산이 머물던 사랑채에서 인사를 나눴어요. 할아버지는 ‘말 놓겠네!’ 하셨고, 이병철은 ‘아유. 당연한 말씀입니다’하면서 큰절을 올렸지요.”

최준 선생은 이 회장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손병희 선생이 인촌 김성수에게 보성학원을 맡겨 고려대학으로 크게 발전시킨 것을 아냐는 내용 등이었다. 대답을 못한 이 회장은 자신이 학원에 대해 너무 무식했다고 자책했다.

그러자 최 선생은 “대구대학을 재투자할 여력이 없으니 이 학교를 훌륭한 학교로 키워준다면 자네가 죽고 난 뒤에는 인촌과 같은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그 말에 이 회장은 납작 엎드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시면 대구대학을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대학으로 만들겠습니다”고 약속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구조조정 될 위기에 몰렸고, 남은 재산을 모두 써 더 이상의 돈을 출연하지 못한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제일의 갑부인 이병철 회장에게 학교를 위탁하게 된  거지요.”

시사오늘.

최준, 대구대 위탁하면서 한 푼도 받지 않아
"이병철, 얼굴 붉혀져 돌아가"

최준 선생은 학교를 내놓으면서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협약서나 각서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계약서 작성의 필요성을 물었지만, 그는 “자네 부자들이 와 있고, 내 조손이 있고, 증인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대학을 맡기면서 금전적 거래는 하지 않겠다는 뜻인데, 이병철은 얼굴이 붉어져서 돌아갔어요. 그리고는 전무이사 등 여러 사람을 보냈어요. 이병철이 볼 때 할아버지는 이상한 노인이었던 거죠. 자기는 ‘주고받기’인데 이 큰 걸 돈도 받지 않고 넘겨준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겁니다.”

한번은 제일모직 사장이 최염 씨를 찾아왔다. “이병철 회장이 할아버지께 정성을 표하고 싶어 한다며,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은지 묻더라고요.”

이후에도 여러 명이 내려왔다. 최염 씨는 고민 끝에 할아버지께 보고를 드렸다.

그러자 최 선생은 손자를 크게 질책했다. “너 뭐라고 했느냐.” “저야 당연히 거절했지요. 그런데 자꾸 오는데 전들 어떡합니까.” “너 제일모직 양복 한 벌이라도 얻어 입으면 내 손자가 아니다. 잘못하면 학교를 판 것처럼 된다. 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최 선생은 손자를 붙들고 신신당부했다.

집안 가보 단계연, 이병철 앞에 ‘탁’

이병철 회장이 대구대학 이사장이 되자, 안 좋은 소문들이 났다. 이제는 학원까지 침투했다는 말들이 무성했던 것. 또 경주 최 부잣집도 돈을 받고 학교를 팔았다는 오해도 들려왔다. 최 선생의 청렴결백한 노력에도 색안경 끼고 보는 시선들이 많았던 것이다.

“며칠간 고민하시던 할아버지는 서울 갈 채비를 하라고 일렀어요.”

최염 씨는 할아버지 수발을 들기 위해 놋그릇으로 된 요강을 깨끗하게 씻어 보자기로 싸맸다. 최 선생은 “단개연도 준비해둬라”고 분부했다. 순간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최고의 벼루라 불리는 단계연은 중국의 당계석과 오동나무로 만든 벼루집으로 경주 최 부잣집 가보로 내려오는 거였다.

최 선생은 “내가 이병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며 “대구대학을 훌륭하게 이끌 수 있도록 부탁하기 위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병철 회장이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는 터에 최 선생은 오히려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거였다. 여기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돈 받고 대학을 팔았다는 오해를 말끔히 해결하고, 대학 운영을 돈으로 거래하려는 이 회장의 태도에 대한 우회적 충고, 그리고 대구대학을 잘 이끌어달라는 진심어린 당부였다.

“저희는 옛 중앙일보 사옥으로 갔어요. 임직원들 열한명이 뒤에 서있고, 이병철이 맞이하자, 할아버지는 단계연을 책상 앞에 내려놨지요. 이어 ‘내가 줄 게 이것밖에 없다’, ‘단계연 벼루가 없으면 대문이 없는 집이나 마찬가지다’, ‘청자가 아무리 좋아도 글을 숭배하는 나라에서는 붓하고 벼루가 제일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최염 씨는 할아버지의 통 큰 모습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생각해도 몇 십억은 될 것 같은데…”라며 씁쓸한 미소를 비췄다.  

그런데 이 회장은 벼루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몇 백 년 된 오동나무로 만든 벼루 집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이병철은 목재에 대한 혜안이 있었어요. 삼성 본관을 지을 때도 건축설계 과정에서 상무 방의 무늬는 뭘 넣을지, 전부 발주를 하게 할 정도로 목조에 대한 안목이 높았지요. 당계연 벼루는 무식하니까 알지 못하고….”

이 회장은 오 관짜리 벼루를 담는 상자를 신기하게 바라보다 “대구대학을 좋은 대학으로 만들겠습니다”고 거듭 전했다.

최준, 결사반대했지만…
이병철 말만 믿고 위탁한 게 화근…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최준 선생과의 약조를 지키지 않았다. 철석같이 맹세했지만, 얼마 안 가 박정희 정권과 맞바꾸게 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1965년 자회사인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한국비료와 대구대학을 국가에 헌납했어요. 이는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이후락의 아이디어였어요. 사카린 밀수가 나고 천지가 진동 하니까 이병철한테 대구대를 청구대와 합병하게 해주면 밀수 건도 해결해주겠다고 한 거지요.”

1967년 12월 박정희 정권은 대구대와 청구대를 통합했고, 곧이어 학교법인을 영남학원으로 바꿨다. 최준 선생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병되던 날, 최 선생은 반도호텔에서 열리는 회의장에 들어갔다.

합동 회의장에는 이후락 비서실장, 대구대와 청구대 이사회, 문교부와 법무부 관계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병철이가 안 오면 회의 못 한다’며 소리쳤어요. 그러나 긴 작대기를 들고 결사반대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어요. (사이) 이상한 점은 청구대는 국가에 헌납된데 반해, 대구대 경우는 국가 소유가 아닌 박정희 개인의 소유가 됐다는 겁니다.”

결국 이 회장의 말만 믿고 위탁하게 된 게 화근이 된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독립운동과 교육 사업에 재산을 바친 게 할아버지의 공이라면, 삼성 이병철에게 학교를 준 것이 할아버지의 과가 된 셈이지요. 차라리 헌납되더라도 국가에 박정희 개인에게가 아닌 국가에 헌납됐다면 국공립대가 됐을 테고, 제가 지금처럼 격분하는 마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합니다."

최씨 부자에 있어 천추의 한으로 남은 영남대 전신 대구대. 현재 최염 씨는 하루 속히 영남대가 할아버지 최준 선생의 염원대로 유신시대 장물에서 경북 도민과 대구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의 나이 어느덧 80이다. 최염 씨가 살아 생전에 영남대가 환수돼 학원 비리 없는 명문대로 발전되는 것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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