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YS-DJ 분열이 한국 정치 왜곡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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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YS-DJ 분열이 한국 정치 왜곡시켜˝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3.04.13 1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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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전 국회의원 ˝역사를 제대로 끌고가려면 더 큰 대의와 흐름을 볼 수 있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1987년 대통령 선거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군정종식과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들의 꿈은 민주화 운동세력의 양대 축인 김영삼(YS)-김대중(DJ) 양 김의 분열로 실패하게 된다. 이원복 전 의원은 그 때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로 민주화를 갈망하던 학생운동권 출신의 젊은 정치인이었다. 그 만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순수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전 의원은 YS-DJ 분열이 이후 한국 정치를 왜곡시켰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2·12 총선 앞두고 김덕룡이 스카웃"

이 전 의원의 정치 입문 계기는 범상치 않다.      

"84년 제가 대학교 4학년 때입니다. 그 다음 해에 있던 2·12 총선을 앞두고 있었을 때이죠. 그런데 80년 광주항쟁 이후로 기성제도 정치권은 완전히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상태였습니다. 사실상 그 때는 한국 정치의 새로운 흐름을 학생운동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84년 학생 운동권으로부터  반(反)민정당 투쟁과 2·12총선 참여투쟁이 본격화 됩니다. 그 해 가을에 저는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떤 운명적 계기에 의해 신한민주당(신민당)에 소위 '스카웃' 됩니다. 그 때 신민당은 양 김이 주도하는 새로운 당이라는 취지로 만들어졌는데 신민당에서 학생운동권 가운데 여러가지로 자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던 사람을 찾던 중에 김덕룡·최기선 두 분이 추천을 해서 YS에게 저를 소개했고, YS는 당시 이민우 총재에게 저를 소개했습니다. 제가 학생운동권 출신 1호로 신민당에 들어갔고, 이어 이성헌·김영춘 등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전 의원은 당시 28세 나이로 신민당 전문위원이라는 직함을 달았다. 그는 오로지 군부독재를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학생운동권과 노동운동권이 2·12총선에 광범위하게 참여하는데 힘을 썼다. 총선 결과는 신민당의 엄청난 승리였다.

"2·12총선을 이겨냄으로써 역사적으로 큰 전환점이 만들어지게 됐습니다."

이렇게 2·12 총선의 승리에 기여한 그는 상도동계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특별히 자신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상도동계가 된 건 아니라고 했다.

"그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들 입장에서는 상도동·동교동에 대한 구분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개별적 차이는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대체로 어느 계파가 좋다는 그런 감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2·12 총선을 사실상 주도한 것은 상도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상도동과 연계된 것이지, 특별히 정치적 의도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뿌리 깊은 상도동-동교동 분파에 실망"

-87년 대선에서 양 김이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당시 상황이 궁금합니다.

"87년은 통일민주당 시절인데 그 전 단계인 신민당에서 일하면서 느낀 게 상도동-동교동 분파라는 뿌리가 굉장히 깊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주화 운동 선배들이 그렇게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또 역사적 대의로는 신민당 세력들이 정권을 잡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잡아도 참 문제가 많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권능력이 없었다고 봤습니다. 당시 야당에는 세 그룹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 할 때와 같은 지사 그룹, 두번째는 데모할 때 몸으로 한몫 하는 투사파 그룹, 세 번째는 어디 가서 밥 먹을 수 없으니까 그냥 따라다니며 밥 얻어먹는 식객 그룹, 이런 세 그룹이 야당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이 야당에 와도 과연 국가를 제대로 경영, 관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민주세력 분열의 1차적 책임은 4자 필승론 내세운 DJ"

-양 김 분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봅니까.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분열의 1차적 책임은 DJ에게 있다고 봅니다. 근원적으로 2·12 총선 승리부터 시작해서 직선제 개헌 투쟁을 만들어낸 것은 YS였습니다. 그렇다면 밥상 차린 사람이 먼저 하는 게 맞을 텐데, DJ는 '4자 필승론'을 내세웁니다. 민주세력이 분열하고, 그 바탕에서 자기가 나갈 때 자기가 승리한다는 논리인데 세상에 그런 터무니없는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YS 쪽에서 보면, YS가 양보해서 5년 뒤에 후차를 맡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YS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봅니다. 역사를 제대로 끌고 가려면 더 큰 대의와 더 큰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미세한 부분을 놓고서 다투고 핑계를 잡는다면 지도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80년대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세력들이 자기 몸 희생하면서 싸울 적에 양 김이 갈라지라고 싸웠나요. 적어도 직선제 개헌 투쟁을 할 때까지 민주화 운동 세력은 부산을 가든, 광주를 가든 어디에서든지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 전 의원이 YS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지만 속내는 그래도 DJ의 책임에 무게를 실은 듯 보였다.

"상도동-동교동 두 세력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건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시대정신은 범민주세력이 통합돼서 새로운 시대를 창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창출한 뒤에 분화가 되더라도 우선은 통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세력이 결정적 순간에 분열합니다. 그 분열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서로들 얘기하는데, 비교적 그 당시에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파벌적 색깔이 옅었던 저 같은 사람이 봤을 때는 '밥상 차려 놓은 사람은 따로 있고 젓가락 들고 오는 사람이 따로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계파적 시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말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객관적 시각을 가지고 말하려고 합니다."

"YS-DJ 연합 실패로 역사 바로 못세워"
 
그는 87년 양 김의 분열이 현재 우리 정치의 병폐와 무관치 않다고 주장했다.

"우리 정치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찌 보면 정말 역사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것이고, 역사를 제대로 세우기 위한 지도자들의 연합 형태가 실패한 것입니다. 그 당시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이 시대적 대세였고, 민주화 운동은 선진국을 만들자는 것과 같습니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게 본질로 들어가면 결국 우리들의 삶의 질을 아주 고도화시키는 선진국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목적이 있으면 범민주화운동 세력들이 단결해서 합리적, 과학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며 한 시대를 끌고가야 했습니다. 그런 뒤에 진화되고 분화되고 했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분열됐고 그 공백에 종북좌파 활동가들이 들어오면서 안팎으로 모든 한국정치의 구조를 왜곡시켜 나갔습니다."

"민정당, 정치가 죽어있는 집단"

이 전 의원은 80년대 여당이었던 민정당에 대한 질타도 빼놓지 않았다.

"민정당은 유능한 인재를 대거 거느렸지만 정치가 죽어있는 집단이었습니다. 마치 군대 문화처럼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그런 문화에 젖어있는 집단이었기에 정치가 없었습니다. 그런 류의 문제가 지금도 여당 정치권에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자유당이나 박정희의 공화당에도 역시 정치가 없었습니다. 자생적인 정치능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거의 거수기 정당이었습니다. 이승만이 무너지니까 자유당도 그대로 무너지고 박정희가 무너지니까 공화당이 그대로 없어졌습니다. 그건 자생력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과거 우리 여당권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 전 의원은 YS의 정치적 결단인 3당 합당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각을 드러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통해 어느 정도 역사적 발전은 일어났지만 그 주체의 관리 능력이 부족했고 분열이라는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히면서 3당 합당이라는 게 나오게 됩니다. 양 김의 분열이 없었으면 우리 역사는 당연히 범민주운동 세력들이 연이어서 정권을 잡았을 것이고 국민들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 아무튼 저는 3당 합당은 편법이고 정수(正手)일 수 없다고 봅니다. 상도동 진영에서는 민주세력이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지략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당 합당은 태생적으로 어느 정도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군정세력과 같이 하면서 현재의 구도가 만들어졌는데 이후 결정적으로 영·호남 분열의 문제로 고착화됩니다."

"3당 합당은 편법"

-3당 합당이 없었다면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은데요.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양 김이 계속 분열로 갔다면 영원히 못 잡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근본적으로 범민주세력의 수도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세력이 합쳐야만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 내면서 아까 얘기한 관리 능력 부족 등 취약한 점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그나마의 세력이 분열되니 여전히 한국 사회는 정상적이지 아니한 세력들에 의해서 정권이 연장될 수밖에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3당 합당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YS의 말처럼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지 않았습니까.

"그 문제가 그런 식으로 논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건 '박정희 세력이 쿠데타를 한 게 잘한 거냐 못한 거냐'라는 논점과 비슷합니다. '근원적으로는 옳은 게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이런 논리 아닙니까. 양 김의 분열이 정상적이지 않고 3당 합당도 그 것으로 인해 파생적으로 온 것이고, 그게 정상적이지 않으니까 오늘날 영·호남 지역감정이 고착화된 구조를 낳았습니다. 양 당의 지역할거정치 구조로, 작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가장 반민주적인 구조가 나왔습니다."

이 전 의원은 이 대목에서 역사의 당위와 현실에 대해 덧붙였다.

"당위적으로 보면 박정희 정권은 정상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군정 세력들은 완전히 다 형편없이 나쁘고 이 쪽은 다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현실로 돌아오면 5공, 6공 때의 경제에 대한 평가가 더 좋고, 서민들이 더 살기 좋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민주화 세력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라고 국민들이 의문을 던집니다. 사실 저는 군부세력이 민주화 세력보다는 국가관리능력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관리능력 때문에 군부세력이 역사의 정방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민주화가 실현됐고 지금 군인들이 쿠데타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인데, 이 정도로 민주화가 됐으니까 국제사회에서 인정 받고 자랑스럽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70~80년대는 국제사회로부터 그런 대접을 못 받았습니다."

이야기를 돌려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에 대해 물어봤다.

"정치인 안철수는 기능적으로 끝났다"

-안철수 전 교수가 4·24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어떻게 전망하나요.

"우선 '안철수 현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철수현상'은 국민들이 기성 정당정치에 환멸을 느껴 제3세력을 원하는 현상입니다. 마치 지난 85년 2·12 총선 당시 넥타이부대들이 나섰던 것처럼,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갈망이 다시 분출된 현상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의문인 것은 그런 현상의 중심이 왜 안철수냐는 것입니다. 안철수라는 사람이 과거에 정치적 메시지를 국민에게 던져준 사례가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방송을 통해서 안철수라는 사람이 상징적으로 뜨기 시작합니다. 국회의원 몇 번 한 사람들도 어떤 상징을 확보하기 어려운데, 이 사람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입니다. 오죽하면 '청와대 기획설' 같은 소문까지 돌았겠습니까. 과거 이회창 선생이 처음에 뜰 때, 약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었어도 이렇게 태풍과 같은 에너지로 형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안철수 씨는 본인의 노력도 없이 제3의 희망을 독과점적으로 장악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의문스런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을 치르면서 '안철수 현상'은 아직 살아 있지만, 정치인 안철수는 이미 기능적으로 끝났다고 저는 봅니다. 국민들 눈에 여러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양당체제가 죽을 쑤고 있으니 노원병에서 안철수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안철수로는 미래신당이 쉽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제3세력을 모색한 선진통일당은 안철수 전 교수에게 러브콜을 보냅니다. 그보다 앞서 4월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제3정당인 '국민생각'도 안 전 교수에게 러브콜을 보냅니다. 하지만 안 전 교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전 의원은 선진통일당과 국민생각에 몸 담았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 부분도 미스터리입니다. 상식적으로 기존의 양당 체제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도 싸움이 쉽지 않은데 안철수 씨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민생각은 국민들이 염증을 느끼는 기존 양당 체제를 극복하려는 취지에서 출발한 것인데, 안철수 씨가 총선이라는 대규모 시장이 열리는 상황에서 합류하지 않은 것은 대단히 이기적인 발상입니다. 또 대선을 앞두고 제3세력을 모색했던 선진통일당을 외면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안철수 씨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하고만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시대의 언어, 시대의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전국의 제세력들이 연합해서 정당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네로 황제 혼자서 당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안철수가 외면한 제3세력에 박근혜가 손 내밀어"

이 대목에서 그는 선진통일당이 박근혜 후보의 새누리당과 통합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당시 저희가 제안한 대통합의 언어를 박근혜 후보가 받아줬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정치쇄신과 대통합을 자기를 통해서 실현하자면서 손을 내밀었기에 선진통일당 세력들이 새누리당과 통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걸 할 것이라고 예상한 안철수 씨는 일언반구의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문재인 후보 쪽에서도 제대로 된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손을 내민 건 우리가 그토록 비판했던 박근혜 진영이었습니다. 저희들 입장에서는 당시 소수정당이라는 한계 같은 것도 있었고, 중요한 건 누가 하든 대탕평, 대통합의 시대를 열 수만 있다면 좋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선진통일당의 정체성은 무엇이었나요. 일각에서는 선진통일당을 단순히 충청도 정당이라고 평가했는데요.

"선진통일당의 전신은 자유선진당입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부터 시작되는 것이죠. 사실 충청도 정당입니다. 충청권 정당이라는 한계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인제 의원이 당 대표가 되면서 그 당시 제3의 세력, 제3의 정치에 대한 범국민적 요구가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 불쏘시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제3정치를 위해 뭔가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게 선진통일당입니다. 그 기간은 매우 짧았지만 선진통일당은 자유선진당과는 다른 정당이었습니다. 선진통일당이라는 당명도 우리나라 역대 정당 가운데 가장 잘 지은 게 아니냐 할 정도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 정당이 계속 갈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전 의원은 선진통일당 대변인 시절 박근혜 후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한 후에는 박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섭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제가 새누리당 박 후보를 비판했지만 박 후보 쪽은 그런 비판도 수용하겠다고 했습니다. 통합 정치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당시 선진통일당 세력들은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출범하고 나서 5년 안에 남북 간에 대단히 중대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런 시기에 우파 정권이 들어서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선진통일당과 새누리당의 합당, 대선 결과에 결정적 작용"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한 것이 이번 대선에서 박 후보의 당선에 얼마 만큼의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나요.

"지내놓고 보면 선진통일당 세력들은 아주 기묘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선진통일당 세력들이 선택한 방향으로 될 가능성이 높은 판이었습니다. 선진통일당 이인제 대표와 선진통일당 세력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것이 대단히 중요한 시간 대에 대단히 중요한 지점에서 일어났습니다. 선거 판세가 아주 불투명했을 때인데 선진통일당과의 합당으로 박 후보 쪽으로 힘이 실리기 시작합니다. 선거가 좌파연합의 총결집 대 우파연합의 총결집 구도로 가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한 직후 이 전 의원은 이인제 대표 등과 함께 YS를 찾아갑니다. 그 때 YS가 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YS의 아들인 김현철 씨는 '아버지는 이번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느 게 맞는 말인가요.

"YS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그렇고,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인 언사를 해 왔습니다. 그것을 좋게 볼 수도 있고 나쁘게 볼 수도 있습니다. 좋게 보면 충고이고 나쁘게 보면 비난 내지는 매도일 수 있습니다. YS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했는지를 제가 그분의 비서실장도 아니기에 말하는 건 어렵지만, 적어도 저희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해야겠습니다'하고 가서 말했을 때 '바보 같은 결정' '잘못된 선택' 이런 말은 안 하고 '잘했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잘했어. 고생했어. 마음 고생했어'라고 했고 긍정적 의미에서 '여성 대통령'이라는 표현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민주동지회 김봉조 회장 등 상도동계 중요한 분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다고 했고, 김수한 전 국회의장에게도 흔쾌하게 '열심히 가서 (박근혜 후보를) 도와'라고 한 것을 보면 그래도 YS가 선거의 결정적 국면에서는 역시 그래도 범중도우파가 한 시대를 맡는 게 맞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전 의원은 선진통일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국민생각'에 참여했다. 이와 관련해 평소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국민생각은 합리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가 연합하는 차원에서 장기표·박세일 두 사람이 처음에 주도했지만 결국 장기표 씨가 떨어져 나옵니다. 공동대표 자리 문제를 놓고 갈라섰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당시 상황이 궁금합니다.

"제가 바로 옆에서 지켜 본 사람이 아니기에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말하기는 애매한데, 저는 장기표 · 박세일 두 분이 그런 문제를 다루는데 대단히 미숙한 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정도의 문제로 갈라질 것이면 애당초 만나지를 말았어야 합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각에서는 당시 국민생각에 김덕룡 김현철 김무성 등이 함께 하려고 했는데 막판에 김무성이 생각을 바꾸고 새누리당 잔류를 선택했다고 하는데요. 그 부분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그 때 제3세력을 만드는 게 마음대로 진행이 안 됐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한계가 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처럼 초심대로 끝까지 간 사람들이 있는 반면, 변화된 행보를 취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참여에 대해 판단을 다르게 한 것인데 누가 잘하고 누가 못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3의 세력들이 정치세력화해서 완충역할도 하고 대안 역할도 해야 한다는 그러한 논지에서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권력은 지역구에서 온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라"

인터뷰 주제를 이원복 의원 본인에게로 돌렸다.

-15대 총선에서 인천 남동을에 출마, 국회로 입성했지만 이후 16대, 17대 총선에서 패배했다가 2006년 10월 재보선에서 다시 당선됐습니다. 당선과 낙선을 넘나 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선은 제 부족함의 소치이죠. 그런데 인천이라는 지역이 수도권 정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수도권에 소위 말하는 '피말리는 선거구'가 많은데, 어느 한 사람, 한 정당의 독주가 쉽지 않습니다. 어느 지역은 두 번 이상을 절대 안 주는 지역이 있다고 하는데 저희 지역구가 그런 지역구일 수 있습니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고 했지만 저는 젊은 나이에 정치권에 들어오면서 권력은 지역구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고 정말 바닥에서부터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라 권력은 아첨과 아부로부터 온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권력이 아첨과 아부로부터 온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밑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중앙정치에서 실패하니까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죠. 지역구민들도 받아주질 않더라고요. 무능하니까 공천을 못 받은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처음 88년도에 지구당위원장이 됐어요. 31살이었죠. 이후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통일민주당 이원복이가 선거지원을 해서 그나마 구의원 하나를 건졌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지구당 정치 살림살이가 시작된 것이죠."

"철새 파동에서도 굳건히 버텨"

이후 이 전 의원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여당인 신한국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정권이 바뀐다.

"16대 총선 때인데 김영삼 대통령에서 김대중 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고 나니까 철새 파동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인천이 전국 여론조사 표준 샘플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나온 정당에서 인천 지역구를 가져가는 확률이 높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선거 공천 준다고 하니까 인천 지역 의원들이 많이 넘어갔습니다. 그 때 동교동에서 제게도  제안이 왔습니다. '이호웅은 공사 사장으로 보내고 이원복에게 공천을 주겠다'는 식이었죠. 그 때 최기선, 서정화, 이재명 등은 그 쪽으로 넘어갔는데 저는 안 넘어 갔습니다. 제가 동교동에서 온 분들에게 '저한테까지 찾아 와 줘서 감사하지만, 제가 그렇게 정치를 배우지 않았다. 여당 하다가 야당 됐으면 야당 하는 것이지, 야당 됐다고 여당으로 다시 들어가면 예전에 너는 맨날 여당만 하는 인생, 나는 맨날 야당만 하는 인생이라고 비판하던 우리가 뭐가 되는가. 그러니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잘하는 건 지원하겠다. 당파 떠나서 잘하는 건 잘한다고 하겠다. 못하는 것 있으면 비판하겠다'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동교동에서 밀사로 온 분이 제가 후배인데도 존댓말로 '이 의원 참 정말 존경스럽소. 이 의원 정말 훌륭하다'고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그렇게 돌아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저를 죽이려고 애를 쓰고 해서, 이래 저래 떨어지게 됩니다. 그 때도 한 2% 모자라서 떨어집니다."

-17대 때도 떨어졌는데요.

"17대 때는 탄핵파동 때문에 그렇게 됐죠. 야금야금 준비해서 드디어 이길 수 있는 상황까지 갔는데 탄핵이 터졌어요. 그 전 단계에서 자체 여론조사를 해 보니 이호웅 씨가 19%였고 제가 22% 정도로 3% 정도 앞섰습니다. 그러다 탄핵이 터지고 나니까 이호웅 46% 제가 13%였습니다. 그걸 가지고 선거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들어갔는데 최종 45% 대 41%로 졌습니다. 그리고 너무 지쳐서 '참, 정치운도 없다'하고 있는데, 천금 같은 보궐선거 기회가 왔습니다. 그 때 공천이 돼 가지고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습니다."

"18대 공천 탈락, 이명박에 치가 떨려"

-이 전 의원은 친이계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가 시작된 직후에 치러진 18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을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에는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2,324표로 패했는데요.

"저는 제게 공천을 안 준다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상식이라는 게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구의원 하나 가지고 정치살림살이를 시작해서 안상수 시장을 두 번 당선시키는 선거 총괄본부장을 했고, 지역구에선 3선 구청장을 만들어 냈고, 시의원 전원, 구의원 전원을 당선시켜냈습니다. 시당 위원장을 맡아서는 시장·군수·구청장 10개 가운데 9개를 당선시켰고 시의원 28명 중 23명을 당선시켰는데, 그렇게 바닥에서 고생한 사람에게 공천을 안 주더라고요. 지나간 얘기지만 그런 정당이고 정권이니까 정상적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이 전 의원은 이 대목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온갖 어려움을 겪은 야당 의원으로서, 드디어 이명박 대통령을 탄생시켜낸 것입니다. 이원복도 정치를 하는 사람이면 장관도 하고 싶고 한데, 그러고 있는 사람의 목을 쳤습니다. 제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제가 과거의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감정이 없는데 이명박의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치가 떨립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한 개인의 삶에 대해서도 존중해 줘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무슨 품의 없는 행동을 한 사람도 아닌데, 딱 죽여놓더라고요."
그는 그러면서 공천 문제를 지적했다.

"근본적으로 공천은 지역구 활동으로 판단해야"

"김대중 정권에서 회유할 때도 당을 지켜온 충신에게 공천을 안 줬다는 건 평가시스템이 무너진 것이고, 당의 철학이 무너진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그 지역에서 어떤 정치를 이끌어 왔는가를 중심으로 봐야 하는데 공심위원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와서는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는 게 말이 됩니까.  국전 심사할 때 예술인이 아닌 정치인이 들어가서 심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역구에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아닌, 정치인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엉뚱한 사람들을 용병으로 꽂아 놓고 정치인에 대한 심사를 시킨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나 당권파가 되기 위해서는 자파를 대거 심어야 하고, 결국 지역에서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가 보다는 자기 심복될 사람에게 공천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향식 공천이 되는 것이고 이름도 없는 사람이 낙하산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이죠."

자연스럽게 정당개혁 얘기로 이어졌다.

▲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정당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당이 한 국가를 경영할 만한 집단의 모임으로서 합리성·과학성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한 예로 민주당 중앙당사만 봐도, 영등포 어느 시장통 창고 같은 데를 쓰고 있는데, 저희 인천 남동구 농협도 그보다는 더 좋은 건물을 사용합니다. 노인복지회관도 그것보다 더 좋은 데를 씁니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움직여 나갈 권력 엘리트들이 모인 정당이라는 집단에 일례로 KBS 만큼의 하드웨어를 줘 받습니까. 동아일보 만큼의 소프트웨어를 줘 봤습니까. 국가에서 정당에 돈 좀 주면 '거지 같은 인간들에게 왜 돈 주냐'라며 반발이 일어납니다. 언론이 앞장서 난리를 칩니다. 자기들은 보너스, 퇴직금, 연금 다 엄청나면서 정당인들은 쫄쫄 굶어야만 좋은 정치라고 호도합니다. 그런데도 정당들이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병신들처럼 쩔쩔 맵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정당에 대한 제대로 된 투자가 필요합니다. 지금의 정당들이 올바르게 진화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이 참여해서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의 생산성을 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 밤새 연구하고 토론하는 정책정당이 돼야 합니다. 지금의 한국정당들은 실력은 없고 권력자 눈치만 보는 집단, 내용은 없이 맨날, '쇼'나 하고 선동만 일삼는 집단처럼 국민에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 전 의원은 한 때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로부터 신임을 받았었다. 그 얘기도 물어 봤다.

"이회창 선생과의 인연은 제가 초선 의원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 이회창 선생이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했는데 그 때는 한나라당 중앙연수원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천안에 있는 중앙연수원 시설은 상당히 좋았고, 그곳이 당원들의 에너지가 모이는 터였습니다. 그런데 이회창 총재가 제게 천안에 있는 연수원장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중안연수원장을 했는데 이회창 선생은 대통령이 안 됐고, 저는 16대 총선에서 떨어졌습니다. 이회창 선생은 대통령을 계속 하려고 했는데 중앙연수원장을 저한테 또 시키려고 했습니다. 제가 이회창 선생으로부터 그 전화를 받았을 때 고사를 했습니다. 경험으로 볼 때 전국의 당원들이 들어와서 힘을 모으는 중앙연수원장을 힘이 없는 원외 인사가 맡으면 안 된다는 게 제가 고사한 이유입니다. 현역 의원들이 맡아서 '으싸으싸' 해야 힘이 나는 것이지, 원외 인사가 하는 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김문수 맹형규 이런 분들을 쓰라고 제가 이회창 총재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제게 그 자리를 맡겼습니다. 이회창 총재가 그냥 지상 발령을 냈어요. 그게 그 분과의 인연이었습니다."

-이회창 전 총재가 두 번째 대권도전에서도 실패했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어쨌든 일단은 제가 중앙연수원장을 맡으며 이회창 총재를 모셨는데 당선이 안 돼서 죄송했지요. 그런데 그 때 연수원장 자리는 구조적으로 비서실장이나 기획실장과는 다르기 때문에 '타이트'하게 느끼기는 어렵지만, 지나서 보면 이회창 선생의 선거를 이끌어가는 중심 전략기획부에서 많은 '에러'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선거를 막론하고 '귀족 대 평민' 구도로 가면 귀족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간 것은 전략적 '미스'였습니다.

"이회창 진영의 YS 화형식, 대단히 잘못된 것"

-97년 대선에서 이회창 총재 쪽 사람들이 YS 인형을 놓고 화형식을 했던 것에 대한 평가는 무엇인가요.

"화형식은 대단히 잘못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선거전략상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발생했으면 이회창 선생이 당장 청와대에 있는 YS에게 '이번 일은 잘못된 것이고 관련자를 엄벌하겠다'고 했어야 했는데 이회창 선생이 그걸 제대로 안 했습니다. 그건 암묵적 방조가 아니냐는 해석을 낳습니다. 전에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에게 '나를 밟고 가라'고 그랬다는데 그런 것과 비슷한 관점에서 (YS를 밟고 가려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제가 보기에는 그건 큰 '미스'라고 봅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이원복 전 의원의 정치철학에 대해 물어봤다.

-정치를 25년 이상 해 왔는데 나름대로 정치철학이 있을 것 같습니다.

"대동소이(大同小異)라고나 할까요. 크게 보면 같은 게 많고 작은 차이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차이를 가지고 크게 부풀리다가 같은 점들까지 놓칩니다. 사실 우리들끼리 대화 못할 일이 없습니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도 죽기 살기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남북문제 때문에 죽기살기로 싸우는게 내재되어 있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살기식으로 정치를 하면 역사가 불행해집니다. 전세계가 지금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천하의 바보가 아니라면 우리도 힘을 모아서 잘 해 나가야 할 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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