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發 정계개편⑤>정계개편으로 ‘대통령직선제’, ‘군정종식’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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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發 정계개편⑤>정계개편으로 ‘대통령직선제’, ‘군정종식’ 이뤄…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3.04.29 1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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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민한당 합당 통해 대통령직선제 밀알
3당합당으로 김영삼, 1992년 대통령 올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정계개편’은 한국 정치사에 역사적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정계개편의 대부분은 야당발(發)이었다.
1985년 발족한 신민당은 관제야당 민한당을 흡수하며 대통령 직선제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1990년에도 커다란 정계개편이 있었다. 3당합당이다. 산업화세력과 민주세력 간의 합당으로 지금까지도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튼 3당통합을 통해 군정이 종식될 수 있었다.

여당발(發) 정계개편의 대표적 케이스는 열린우리당이다. 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되자 ‘지역주의 극복’을 모토로 열린우리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열린우리당은 대통령 탄핵 등으로 민심을 등에 업고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도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 추락 등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사오늘>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던 정계개편 안으로 들어가 봤다.<편집자 주>

신민당-민한당 합당, 대통령직선제 쟁취 도화선

1980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김영삼 김대중 등 유력정치인들을 정치규제법으로 묶고 자신들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골랐다. 여당인 민정당뿐 아니라 야당조차도 전두환 정권의 꼭두각시라는 소리를 들었다. 민한당과 국민당이다. ‘민정당은 전두환 1중대,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은 2중대와 3중대’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김영삼의 목숨을 건 23일 간의 단식투쟁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민주인사들이 점차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민추협이 발족했고, 이를 근간으로 신민당이 발족됐다.

신민당은 1985년 2월 12대 총선 석 달여를 남겨놓고 창당됐다. 때문에 총선에서 누구도 신민당이 승리하리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민당 창당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신민당 창당을 주도했던 김영삼은 당시 민한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고(故)유진산의 아들인 유한렬에게 “빨리 신민당으로 와라, 늦게 오면 자리 없다”라며 제1야당 사무총장 영입을 시도했다.

이때 유한렬은 ‘오랫동안 가택연금을 당해 김영삼이 정치감각이 사라졌구나’라고 판단했다는 것.

하지만 총선 결과의 뚜껑을 열어보니 신민당의 대승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 유한렬은 “역시 김영삼의 정치 감각은 대단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선거결과 지역구에서 민정당은 87석(전국구 포함 148석), 신민당은 50석(전국구 포함 67석), 민한당은 26석(전국구 포함 35석), 국민당은 15석(전국구 포함 20석)을 얻었다.

제1야당에 올라선 신민당은 민한당과의 합당을 서둘렀다. 그리고 1985년 4월 3일 민한당 새 총재로 선출된 조윤형으로부터 무조건 합당 선언을 통해 신민당은 102석이라는 거대야당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이후 신민당은 장내외 투쟁을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신민당과 민한당의 합당은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하게 된 도화선이었다.

▲ 김영삼은 3당합당을 통해 자신의 염원이던 군정종식을 이뤄냈다.ⓒ김영삼 자서전

김영삼, 3당합당 통해 ‘군정종식’이뤄

1990년 민정당-민주당-공화당을 열결하는 3당합당이 있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통령직선제 아래에서 치러진 1987년 13대 대선의 가장 큰 이슈는 ‘군정종식’이었다. 군출신인 집권여당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 맞서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대권주자가 있었다. ‘군정종식’을 위해서는 야권단일화가 필수적이었다. 단일화를 위해 경선은 불가피했고, 결국 걸림돌은 ‘미창당 지구당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였다.

통일민주당은 56곳의 창당 지구당과 36곳의 미창당 지구당으로 나눠져 있었다. 통일민주당이 대선후보 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36곳 미창당 지구당 조직책을 만들어야 한다. 상도동 측 김동영은 50대 50으로 하자며 18곳씩 동교동과 나눠서 임명하자고 했다. 반면 동교동 측 대표였던 이용희는 창당지구당의 지구당위원장 수가 상도동이 많다며 23곳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10월 22일 후보 경선을 단판짓기 위해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난 YS는 동교동 측 안을 수용해 버렸다.

하지만 둘은 끝내 야권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아예 통일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자체가 없었다. DJ가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딴 살림을 차렸다. 4자필승론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선에 참여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논리다. 영남에서 노태우와 김영삼이 표를 나눠 갖고, 충청에선 김종필이 표를 독식하면, 호남과 수도권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은 DJ가 당선된다는 논리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민주세력 간의 분열로 정권을 잡지 못했다는 국민의 비판에 직면한 김영삼은 총재직을 버렸다. 총재직을 버린 후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했다. 그리고 민주당과 평민당 간의 야권통합 협상 기구를 발족했다.

평민당은 양당이 합당하기 위한 조건으로 소선거구제를 요구했다. 당시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사실 전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민정당이나 민주당은 중선거구제로 13대 총선을 치를 경우 1당과 2당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군정종식을 위해서는 야권통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평민당의 안을 수용해 버렸다. 하지만 민주당과 평민당의 합당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소선거구제 아래에서 치러진 1988년 4월 총선에서 평민당은 제1야당 자리에 올랐고, 민주당은 제2야당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노태우의 공약이었던 중간평가를 노태우와 제1야당 총재인 김대중 간의 청와대 회동으로 인해 백지화시켜 버리자 김영삼과 김대중 간의 믿음은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는 말로 민주당 지구당위원장을 설득하며 3당합당을 추진했다.

3당합당을 통해 1992년 김영삼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김영삼이 그토록 염원하던 군정종식이 3당합당이라는 정계개편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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