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도전하지 않으면 내 친구가 아니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김영환 ˝도전하지 않으면 내 친구가 아니다˝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3.04.30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영환 희망일기 15편] 박 모 총재에게 전하는 친구의 당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민주통합당 김영환 의원은 30일 박 모 총재의 은퇴 고려에 대한 씁쓸한 소감을 전하며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한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시사오늘 박시형 기자

이날 김 의원의 블로그에 게재된 <희망일기>를 통해 생명공학, 식품, 물류 등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이어가는 박 모 총재가 자신의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가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도전해 보지도 않고 나이 때문에 은퇴하려 한다면 내 친구가 아니다. 고령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의원이 말한 바로 삼성 이병철 회장은 74세 때 반도체 사업에 대한 과감한 결단과 추진력으로 메모리 부문 세계 1위를 달성했다.

또 현대 정주영 회장은 62세이던 1976년에 20세기 최대의 역사라고 불린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냈다. 정 회장이 따낸 공사의 수주 금액만 9억 3,114 달러였다. 우리나라 총 예산의 25%에 달하는 금액으로 건국 이후 최고의 외환보유고를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KFC 창업자 커넬 샌더스는 65세 때 평생동안 일군 사업에 실패했지만, 남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닭고기를 압력솥에 튀기는 새로운 방식과 특별한 양념을 개발했다. 이는 전 세계에 걸쳐 수 만개의 프랜차이즈를 가진 KFC의 시초가 된다.

김 의원은 이외에도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 삼국지연의 조조의 일화를 전하며 "나이를 한계로 생각하지 않고 도전에 나서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편 전날 김 의원은 대한민국의 바른 정치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한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신문방송기자연맹이 주최하는 제12회 한국인물대상에서 정치부분 수상자로 선정됐다.

(다음은 김영환 의원 <희망일기 15편> 전문.)

우리나라 대기업의 중국본부의 총재(總裁: 사장)인 박○○는 내 친구다. 그는 올해로 중국 근무 30년째를 맞는 대표적인 중국통(通) 기업인으로서 그 그룹이 중국에 진출하여 눈부신 성과를 거두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중국본부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현지화 전략을 통하여 생명공학, 식품, 물류, 문화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에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성공 신화의 바탕에는 박○○ 사장이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온 중국 관련 노하우뿐만 아니라 그의 근면함과 성실성, 리더십이 극대화되어 발휘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그는 얼마 전까지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인들의 모임인 ‘중국 한국상회’의 회장직을 맡아 한국기업의 권익을 대변하고, 고충을 해소하기 위하여 부단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눈부신 활동력이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그런데 그가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한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이를 한계로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에게 고령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간 몇 분의 사례를 들려주고 싶다.

1983년,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D램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도쿄선언’을 발표하였을 때, 일본의 미쓰비시 연구소가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며 지극히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 전 해에 KDI는 보고서를 통해“반도체는 인구 1억, GNP 1만 달러, 내수판매 50% 이상이 가능한 국가에서 할 수 있는 산업으로 기술, 인력 재원이 없는 우리에겐 불가하다”고 평가한 적도 있었다.

한국에게, 삼성에게 반도체 사업은 무모한 짓일 뿐이라는 국내외 여론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매사에 치밀한 그가 사전에 이미 충분히 검토하고 내린 결론이었고, 그 후에는 무서운 추진력과 리더십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갔다.

사업 시작 첫해에 한국 최초로 64K D램을 개발한 삼성전자는 1년 만에 세계 3번째로 256K D램을 개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한 이후로는 지금까지 메모리 반도체 개발에 있어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있다. 현재의 글로벌 기업 삼성을 만든 성장 중추가 바로 메모리 부문 세계 1위인 반도체 사업이며, 당시 74세이던 이병철 회장의 과감한 결단과 추진력이 이런 신화를 낳게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정주영 회장의 사례를 보자. 현대건설은 1976년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라고 불린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냈다. 그의 나이 62세 때의 일이었다. 강력한 추진력과 다소의 행운 끝에 따 낸 공사의 수주 금액 9억 3,114 달러는 당시 우리나라 총 예산의 25%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선수금 2억 달러가 입금되자, 당시 외환은행장이 정주영 회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건국 이후 최고의 외환보유고를 기록했다’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때 정 회장은 공사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모든 기자재를 한국에서 송출하기로 한 것이다. 울산에서 주베일까지 항로거리는 1만 2천 킬로미터에 달했고, 거쳐 가야할 동남아 해역은 항상 태풍으로 인한 조난의 위험이 매우 높은 해역이었다. 모두 다 무모하다고 생각한 이 운송 계획을 현대건설은 19차례나 해 냈다.

특히 설치해야 할 자재 중 자켓(jacket)은 높이 36미터에 550톤의 무게를 가진 거대한 설치 구조물이었는데, 이런 자켓 89개를 바지선(무동력선)으로 무사히 운송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환갑을 넘긴 정주영 회장의 과감한 결단과 추진력, 철저한 사전 점검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KFC를 창업한 커넬 샌더스(Colonel Sanders, 1890~1980)의 삶은 더욱 감동적이다. 의붓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샌더스는 젊은 시절에는 보험판매원, 타이어영업, 주유소 직원 등을 하다가, 39세에 주유소를 차렸다가 대공황으로 파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주유소 경영에 나섰다가 우연한 기회에 주유소에 딸린 식당을 차리게 되어 비로소 작지 않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의 식당은 맛있는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면서 상당히 번창했으며, 그는 이로 인해 켄터키 주에서도 상당히 유명인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근에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급속도로 경영이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마을이 고속도로 건너편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그의 식당이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그의 식당은 경매에 넘겨졌고, 그는 수중에 사회보장프로그램이 지급하는 105달러가 전부인 처지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 때 그의 나이 65세였다.
 
평생의 사업이 망한데다가 아들마저 잃은 샌더스는 정신병까지 앓게 되었고, 이내 사랑하는 아내마저 그를 떠나게 되는 실로 비참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절망에 빠져서 남은 삶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다시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샌더스는 자신의 특기인 요리, 그 중에서도 닭고기를 압력솥에서 튀기는 새로운 방식과 특별한 양념을 개발하고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낡은 트럭에 압력솥과 양념통을 들고 다니는 60대 후반의 생면부지 할아버지에게 투자할 사업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비법을 누군가는 알아줄 것이라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샌더스는 무려 3년 동안 1,008개의 식당에서 제안을 거절당했지만, 결국 1,009번째 식당에서 예스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이것이 전 세계에 걸쳐 수 만개의 프랜차이즈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KFC의 시초이다. 샌더스는 68세에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였고, 꿈을 이루었으며, 이후 사업 이익의 대부분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데 베풀었다.

나이를 한계로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사례는 역사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李成桂)가 1388년 위화도 회군을 감행했을 때의 나이는 54세였다. 전 생애에 걸쳐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던 천하의 이성계도 이미 노장(老將) 소리를 들을 나이였고, 당시 고려의 실권은 최영(崔瑩)의 손아귀에 있었다. 당시 대륙에서는 원(元)과 명(明)이 대치하고 있었고, 원에게 기울어 있었던 고려 조정은 철령 이북을 반환하라는 명의 부당한 요구에 반발하여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명령하였다.

5만 대군을 이끌고 있던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원정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들어 전쟁에 반대하며 회군하고자 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고심하던 이성계는 결국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개성으로 진격하여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새로운 도전, 즉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 사대부가 연합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했던 이성계의 결단이 우리 민족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크게 바꾼 시초가 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등장하였던 조조(曹操)에게서도 나이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조조는 서기 207년 원소(袁紹) 일가를 멸문시키고 화북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이제 그에게 적대할 수 있는 세력은 중국 대륙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천하통일의 원대한 포부를 이루고자 다음 해 남진(南進)을 결정한다.

그의 나이 54세 때였다. 양자강 적벽(赤壁)에서 손권(孫權)·유비(劉備) 연합군과 대치한 조조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풍토병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손권·유비 연합군이 기후·지형과 전략·전술을 잘 이용하여 공격을 해 오는 바람에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그의 모든 기반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허도로 돌아간 그는 다시 군비를 정비하고, 천하의 인재를 고루 거둬들여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의 이런 노력은 결국 그의 사후 자식 조비(曹丕)에 의한 위(魏)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내 친구 박○○ 사장에게 충고하고 싶다. 나이 먹었음을 이유로 은퇴하려 한다면 그것은 인생에서 이루려고 했던 것의 반도 해 내지 못하는 것이며, 만약 그렇게 도전해 보지도 않고 은퇴하여 여생이나 즐기려한다면 내 친구가 아니라고 말이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