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독재자 or 경제부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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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재자 or 경제부흥가'
  • 박지순 기자
  • 승인 2010.03.2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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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의 출생에서 사망까지...
 
박정희는 1917년 음력 9월 30일(양력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박성빈은 46세, 어머니 백남의는 45세로 5남 2녀의 막내였다. 큰형 박동희와는 21세의 나이차가 있었고 큰누나 박수희도 같은 해에 딸을 낳았다. 어머니는 딸과 같은 해 임신한 것을 쑥스러워 했다고 전하며 박정희를 안 낳으려 간장을 먹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박정희는 대통령에 재임하며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는데 실제 상모동은 1910년대 가난한 농촌 마을의 전형으로 90여 호가 6개 소부락으로 나뉘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고 한다.

박정희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 박성빈은 소시에 무과 과거에 합격해 벼슬을 받기도 했지만 본래 성격이 호방한 데다가 조선말 부패 정치에 환멸을 느껴 동학혁명에 가담, 체포돼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사면돼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박정희 집안의 가세가 기운 것도 이 무렵이다.

박정희는 1927년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셋째형 박상희도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통학교에 다녔다. 상모동에서 구미읍까지는 20리(8km) 길로 봄과 가을에는 길가의 풍경을 구경하느라 등하교 길이 상쾌했지만 여름과 겨울에는 학교에 시간 맞춰 다니기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곡동 뒤 솔밭길에서 늑대 두 마리를 보고 무서워 학교에 가지 못하고 박정희와 다른 아이 둘이 집으로 되돌아온 일화는 유명하다.
 
▲ 구미 상모동 박정희 생가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 추도식.     © 뉴시스

 
40리 왕복하며 보통학교 통학 탓에 키 작아

구미초등학교에 보관 중인 박정희의 졸업원부에는 학업성적과 신체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1927년 4월부터 1932년 3월까지 매학년 기록된 성적은 과목별로 10점 만점이 기준이다. 가장 성적이 좋지 못했던 과목은 체조였다. 대부분 10점을 받은 다른 과목과 달리 체조는 3학년 때 8점, 나머지 학년 때는 9점이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20리 길을 왕복 등하교 하면서 건강이 나빠져 체육을 잘 못했다고 한다. 1년 251일의 출석일수 중 개근한 해는 한 학년도 없다. 발육상태 기록을 보면 1학년 때 129.9cm이던 키가 6학년 때는 135.8cm로 6년간 5.9cm만 자랐다. 체중은 1학년 때 15.4kg에서 6학년에 와서는 30kg으로 늘었다.

박정희는 1932년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구미보통학교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입학당시 성적은 100명 중 51등이었다. 입학 이후 성적은 계속 떨어져서 3학년 때는 74명 중 67등, 4학년 때는 73명 중 꼴찌였다. 유독 교련과목에서는 빼어난 실력을 발휘했고 교련주임 아리카와는 총검술 시간이면 으레 박정희를 시범조교를 불러냈다.

대구사범 재학 중이던 1936년 김호남과 첫 결혼을 했는데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서 이뤄진 강제적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대구사범을 마치고 문경보통학교에서 3년 가까이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 시절 박정희는 학생들에게 다정다감했다고 기억된다. 한 번은 급류에 빠져 떠내려가는 학생을 보고 아무도 구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박정희가 뛰어들어 구했다는 일화도 있다. 먼 길을 마다하고 일일이 가정방문에도 열심이었다고 전해진다.
 
나폴레옹 전기에 감명 받고 3년간의 교사생활 청산

그러나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군인의 꿈을 품고 있던 박정희는 3년 간의 교사 생활을 끝내고 1940년 4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 나이가 24세로 나이 제한에 걸렸지만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고 나를 버리고 국가에 봉사하겠다)’을 혈서로 써 입학이 가능했다. 이 사건은 ‘만주일보’에 보도됐고 박정희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는데 결정적 증거가 됐다.

1942년 3월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수석으로 졸업했고 부상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금시계를 받았다. 수석졸업의 특전으로 1942년 10월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이 무렵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 했다. 일본 육사에 있으면서 일본 청년장교들이 일으켰다 실패한 2·26 쿠데타에 대해 고심하던 것도 이 때다. 1944년 4월 3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후 1944년 7월 만주군 제8단에 배속됐다.

해방 직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8·15해방 후 박정희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했고 1946년 5월 조선으로 들어올 때까지 가짜 광복군 행세를 했다는 설이 제기되지만 이견이 존재한다.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의 전신) 2기생으로 입학해 바로 소위로 임관했고 1948년 8월 임관 19개월 만에 소령으로 승진했다. 일본 육사 출신들이 주축이 됐던 국군에서 박정희는 기득권을 지니고 있었다.
 
남로당 활동으로 죽음 직전에서 극적 구명

1948년 여수 주둔 제14연대 반란사건은 박정희의 운명을 바꿔 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담한 사실이 확인돼 1948년 11월 11일 체포됐다. 죄목은 남로당 가입과 군사반란기도였다. 그러나 다른 남로당 가입자들이 사형에 처해지거나 숙청된 것과는 달리 박정희는 불과 두 달 후에 육군본부 정부국 민간인(문관) 상황실장으로 복귀했다.

박정희가 잡히자마자 남로당 조직체계와 조직책 이름을 털어놨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이 ‘감상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 참작됐다는 분석도 있다. 즉 박정희는 1946년 대구 10월 항쟁에서 경찰의 총을 맞고 죽은 형 박상희의 영향으로 복수심에서 남로당에 가입한 감상적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당시 군의 최고 실세였던 백선엽, 정일권, 원용덕 등이 박정희의 구명을 대통령 이승만에게 요청해 무기징역이 선고됐지만 형 집행정치 처분이 내려졌다. 문관 신분으로 육본 정보국에서 일하며 5·16의 주역인 김종필, 이영근, 석정선, 이병희 등 육사 8기생들을 만났다.
 
▲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입학과 일본군 장교 경력을 주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 뉴시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도모하기 시작한 것은 현역 대령 시절인 195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승만의 군병력 차출 요구를 거부해 해임된 이종찬 전 육군참모총장이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장에서 ‘이 장군이 쿠데타를 감행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럽다. 귀국 후 지도편달을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전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 부산에 2개 대대병력을 내려보내 수적으로 열세에 있는 원용덕 장군의 계엄군을 무력화 시키고 이승만을 실각시키려 했던 쿠데타 계획은 군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래의 방침으로 결말이 나면서 무산됐다. 쿠데타를 모의하는 육본의 비밀 참모회의 석상에서 박정희는 “그 문제는 상부에서 결정할 사안이지만 한다고 결정이 된다면 지장이 없게 준비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19로 쿠데타 계획 무산된 후 이듬해 결국 성공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은 쿠데타를 감행해 성공한다. 그러나 그보다 1년 전인 1960년 5월 8일로 거사일이 잡혀 있었고 4·19혁명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쿠데타 모의는 잠시 수그러들고 그 방향이 정군(整軍) 운동으로 바뀌었다.

1960년 5월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는 부정선거의 책임을 물어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의 퇴임을 요구했고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생들은 정군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1961년 2월 김종필, 김형욱, 석정선 등이 예편당하고 말았다.

이런 사태 속에서 1960년 9월 10일 충무로 일식집 충무장에서 쿠데타를 재차 결의하게 됐고 이듬해 5월 16일 실행에 옮겨졌다.
 
박정희 체포하려던 헌병들 쿠데타군에 합류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는 일단의 군인들을 이끌고 군사쿠데타를 감행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은 사전에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에게 입수됐다.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내 육성 명령 없이는 절대 군대를 이동시키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박정희는 “왜 나라를 구하려는 청년 장교들의 애국충정을 막으려 하느냐”며 이를 무시했고 박정희를 체포하러 출동한 헌병들도 박정희에게 설득당해 오히려 쿠데타 군에 합류했다.

박정희는 쿠데타가 성공한 후 “누란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혁명공약’을 내세웠다. 입법, 사법, 행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장도영이 추대됐지만 ‘얼굴마담’에 불과했고 같은 해 7월 박정희가 명실상부한 의장으로 취임했으며 장도영은 반란을 꽤했다는 이유로 군사재판을 받고 불명예 제대했다.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으로 2년 7개월간 군정을 실시했고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도 겸했다. 군정기간 동안 사회개혁을 외치며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체시켰고 깡패 소탕, 고급 유흥업소 폐쇄, 7억2,000만 환에 이르는 부정축재재산 환수 등을 단행했다.
 
5·16후 중앙정보부 만들어 권력 유지

농어촌 고리채 정리와 화폐개혁 등도 단행했고 이전 정권에서 추진되지 못했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고 뚜렷한 성과를 나타냈다. 군정기간 동안 설립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 내내 정권을 지탱하는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박정희는 1963년 2·27선언으로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고 원대복귀 한다고 선언했다가 다시 4·8조치로 군정연장을 발표했지만 여론에 밀려 철회했다.
 
1963년 8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박정희는 1963년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가 됐고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투표의 46.65%인 470만2,642표를 얻어 야당 후보인 윤보선을 15만여 표의 근소한 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돼 같은 해 12월 취임했다.

중앙정보부는 만일 윤보선이 당선되면 그를 암살하려 그의 자택 인근에 저격수를 배치시키기도 했다. 박정희가 윤보선에게 고전한 이유는 선거기간 동안 윤보선이 박정희의 과거 공산주의 경력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 후 무엇보다 경제개발에 최우선 가치를 둔 박정희는 국민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자확보를 위해 한일협정에 조인해 1965년 8월 14일 국회의 비준을 거쳐 12월 18일 한일 간의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한일협정, 베트남 파병으로 외화 획득

베트남 전쟁 파병도 그의 재임 시절 찬반 대립이 가장 첨예했던 사안 중 하나다. 젊은이의 피를 판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외화를 벌어들이는 성과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절대빈곤의 극복은 박정희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박정희는 자원 빈국인 한국의 상황에서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표어를 내 걸고 수출을 독려하기 위해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전 세계에 나가 있는 해외 공관도 수출기지로 활용했다.
 
제3공화국 기간 동안 이후의 경제발전을 위한 기본 토대가 구축됐다는 데 박정희의 반대론자들도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박정희에 대한 국민의 정치적 지지 역시 경제발전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1967년 7월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9년 10월 17일 3선 개헌을 강행하며 장기집권을 모색했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론, 북한의 남침위협, 근대화에 따른 갈등과 모순 증폭 등 국내문제와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변화, 오일 쇼크의 충격 등 국내외적인 정치·경제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3선 개헌에 의해 1971년 7월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듬해 국회와 정당해산을 선포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로써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유신 선포로 절대권력 확립하려다 10·26으로 생 마감

유신시대에 국민의 의식을 일신한다는 명목으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아래 전 국가적으로 붐을 일으킨 운동이었지만 국민의 자율적인 참여가 아닌 관주도로 진행되면서 각종 부조리가 나타나기도 했다.

제3공화국에 이어 제4공화국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룩해 나갔지만 절대빈곤 해결의 부작용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다. 여기에 장기집권에 따른 권력 층 내 암투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국민 지지도가 약화되자 박정희 정권은 수시로 긴급조치를 발동하며 정권을 유지했다.

반민주적 통치에 반대하는 학생, 종교인, 정치인의 민주화운동과 경제적인 분배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욕구를 물리적으로 억압하면서 국민들의 저항은 날러 커져갔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으로 남북통일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변화와 국내 사정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통일문제는 진전을 보지 못 했다.
 
박정희는 2인자를 키우지 않는 용병술로 권력 핵심층 구성원들의 상호 견제를 통해 충성을 유도하다 1979년 부마사태를 맞이하며 결국 1979년 10월 26일 최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사망하고 만다.

박정희의 사망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되는데 육영수 여사 사망 후 판단력이 약해졌다는 견해도 있다. 흐려진 판단력으로 인해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의존하게 되고 차지철의 전행이 권력 층 내 갈등을 양산하며 10·26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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