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民山 연수원장 맡으며 YS 대통령 만들기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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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民山 연수원장 맡으며 YS 대통령 만들기 나서"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3.06.1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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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민주산악회 연수원장 피임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3당 합당으로 통일민주당 광명시 지구당도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당원은 김병용 위원장이 관장하고 지구당도 없어졌다.

그러나 민주산악회 광명시 지부는 변함없이 지속됐다. 나는 14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기 위해 조직 확대에 열을 내고 있었다.

민주산악회 회장도 1991년 말부터 김명윤에서 최형우로 바뀌었다. 김덕룡 의원이 상임부회장으로 그리고 박태권 의원이 본부장을, 나는 연수원장을 맡아 전국 각 시도협의회와 전국 지부의 간부 연수계획을 수립해 눈코뜰새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최형우 회장과 김덕룡 상임부회장이 나를 따로 불러 특별히 민주산악회 연수원장을 맡으라고 통고할 때 나는 지난날 신민당 등 야당을 할 때 훈련원장직은 서열만 고위직이였지 실상은 별 볼일 없는 직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다 최형우 회장은 본부의 직책과 지부장 직을 분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 본부의 직책을 맡은 사람은 지부장 직을 내놓고 다른 사람으로 선임한다고 했다.

정치하는 사람은 어설픈 중앙에서의 직책보다 자기가 맡고 있던 지역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는 것을 정치적으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여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꼭 이겨야 하는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맡겨진 업무에만 충실해야 된다는 명제 아래 중앙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연수원장과 광명시 지부장을 겸직하라는 최 회장의 요청을 받았다.

하루는 최 회장과 김덕룡 상임부회장이 본부의 간부 연수계획을 세워 보고하라는 지시가 나왔다.
1992년 봄이었다.

나는 연수원 부원장과 국장, 그리고 부차장들을 불러 우선 1회에 150명에서 200명 정도의 인원을 1박2일 일정의 수련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루 밤을 함께 자면서 학습도 하고 캠프 화이어 같은 단합대회까지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수련장을 찾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승용차 2대를 몰고 며칠을 다녀서, 춘천에 지인용 지부장이 소개하고 알려 준 곳으로 정했다. 소양댐에서 배를 타고 건너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오봉산 수련원에서 우선 1차 연수를 하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우선 연수대상인 피교육자의 범위를 정하고 강의종목과 그에 맞는 교수를 모시는 일도 쉽지 않았다.

몇날 며칠을 집에도 가지 못하고 분주하게 다녔다.

연수원 직제는 3명의 부원장과 3개의 국이 있었는데 행정국, 연수국, 교수국이 있고 각국에는 3개부가 있고 각부에는 차장 2명씩이 있었다. 연수원에는 원장을 포함하여 총 38명이 배치됐다.

처음에 연수원은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인원을 이렇게 많이 배치하느냐고 말들이 많았다. 나도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민당 등 야당 시절 훈련원은 1년에 한두 번 국회의원과 원외위원장 합동으로 1박2일이나 2박 3일 정도 연수를 하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산악회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전국에서 3만 명의 간부들을 모아 1박2일 코스로 눈코 뜰 새 없는 연수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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