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정치의 창시자, 김현철의 정계복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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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정치의 창시자, 김현철의 정계복귀 가능한가?
  • 윤명철 기자
  • 승인 2013.09.22 0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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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주목할 정치인(13)>여론조사, 정치전략 전문가로 인정은 받았는데…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명철 기자)

▲ e-정치의 창시자 정치인 김현철 ⓒ뉴시스

YS의 차남 김현철 고려대 지속발전연구소 교수는 YS 정권시절, ‘소산’이라고 불리우며 문민정부의 실질적인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YS 정권 말기, 여러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며 그의 역할에 대해 여러 가지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인사들은 그의 정치력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김 교수는 지난 1987년 대선 당시 최초로 여론조사를 도입했다. 그는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대선 전략을 세워 주위를 놀라게 했고, 이는 YS 대통령 당선의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김 교수에게는 아직도 못 이룬 꿈이 있다. 바로 국회의원이다. 아버지 YS의 영원한 라이벌인 DJ 아들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김 교수에게 국회입성은 아직 미완성의 과제다. 김현철 교수는 민주화의 상징인 YS의 아들로서, 정치적 동지로서 영욕을 함께 했다. 많은 국민들은 그가 다시 정치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하고 있다.
 
e-정치의 창시자, 김현철

최근의 선거는 SNS에서 승부가 결정된다. 여야의 유력 정치인들은 자신의 홈페이지와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활용해 국민들과 소통한다. 정치권에서는 이런 현상을 빗대 ‘당선은 발로부터 나오지 않고 손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이 회자됐다. e-정치는 이제 대세다.

김현철 교수는 우리 정치사에 e-정치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로 알려졌다. 김 교수는 YS가 지난 1987년 대선에 패배하자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들었다. 김 교수는 대선 패인을 두 가지로 판단했다. 그는 여론조사를 통한 과학적인 선거에서 졌고, 홍보전에서 패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김 교수는 여론조사가관인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들어 처음 선거에 이용했다.

하지만 YS와 민주계 인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군마저도 여론조사 등 과학적인 선거전략의 중요성을 몰랐다. 하지만 김 교수의 중앙조사연구소가 이듬해 총선에서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선거 결과 그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과학적인 선거 전략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차후 선거에 활용했다. 4년 후 YS는 청와대의 주인이 됐다.

수도권의 야당 중진인 현역 의원은 김현철 교수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지난 1996년 15대 총선 당시, 자신의 지역구에서 여유 있게 상대 후보를 리드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순간에 선거 분위기가 역전됐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96년 당시 스타 정치인인 이회창씨가 수시로 우리 지역구로 지원유세를 왔다. 전세가 역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낙선했다.”

그는 선거가 끝나고 자신의 패배 이유를 알게 됐다. 바로 김현철 교수가 자신의 지역구에 대한 정확한 여론조사를 토대로 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은 이회창씨의 지원유세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는 “김현철 때문에 나는 낙선했다. 김현철의 정치력을 인정 한다”고 고백했다.

▲ 아버지 YS와 함께 있는 김현철 교수 ⓒ뉴시스

김현철, 정치적 불운 그리고 기나긴 침묵…

김현철 교수에게는 국회의원이 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지난 2010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치역정을 자세히 밝힌 바 있다. 김 교수의 회고를 들어보자.

“솔직히 13대 총선 때 아버님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려고 했는데, 지역구가 부산 사하구인 겁니다. 그곳은 서석재 의원의 지역구예요. 아버님이 무주공산인 곳을 권유했으면 좋았을 뻔했는데 서 의원 때문에 차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가 아버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적극 권유했던 때입니다.”

1992년 14대 총선 때는 YS가 대선에 출마하게 되자, 아버지의 지역구인 부산 서구에 애착을 가졌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민정계인 곽정출 의원에게 돌아갔다. 1996년 15대 총선이 다가오자 김 부소장은 ‘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란 책을 내며 출마의지를 다졌다. 당시 신한국당은 경남 거제가 지역구인 김봉조 의원을 경남지사로 보내고 그 자리에 김 부소장을 앉히는 전략을 짰던 것 같다. 하지만 김 의원의 거부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여기서 김 교수는 YS가 당시에도 자신의 출마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솔직히 아버님이 당시 대통령이었는데 나섰으면 안 될 일이 없었습니다. 아버님께 ‘저를 양지로 보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답은 ‘NO’였습니다. 저의 출마 얘기가 돌자 언론은 ‘대통령 아들이 출마하면 수도권에서 20석은 잃어버릴 것’이란 보도를 내보냈죠. 이런 것들이 아버님이 결단하는데 큰 몫을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문민정부가 끝날 무렵 김 교수에게 정치적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5대 대선경선을 앞두고 한보 사태가 터졌다.

야당은 한보배후로 김현철을 지목했다. 그는 구속됐다. 김 교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보와 저는 검찰조사에서도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 났지만, 아직까지도 한보의 ‘몸통’인 것으로 잘못 인식돼 있습니다. 여기서 법리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를 구속시키기 위해 ‘조세포탈죄’라는 죄명을 만든 것 아닙니까.”

그 후, 김 교수는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2006년 대법원에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집행유예형을 받았다. 김 교수에게는 ‘문민정부의 황태자’란 비판적 꼬리표가 붙여졌다. 결국 김 교수는 ‘잃어버린 10년’을 가졌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YS의 아들이 아닌 ‘정치인 김현철’은 2008년 10월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정치판에 다시 돌아왔다. 특유의 정치적 감각으로 한나라당의 19대 총선을 준비했다. 공천도 문제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2011년 한나라당은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퇴로 치러진 10.26 보선에서 패배했다. 이어 디도스 사건이 터지자 홍준표 대표체제는 막을 내렸다. 박근혜 비대위가 출범했다.

19대 총선 공천심사를 앞두고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회 핵심 측근이 “경쟁력 있는 후보가 공천을 받게 될 것”이라며 “여론조사에 자신 있으면 공천심사를 받아보라”고 김현철 교수에게 전했다고 했다.

당시 김 교수는 경쟁력을 확보할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19대 총선과 관련한 거제시 여론조사에서 늘 수위를 달렸다. 그가 공천장을 새누리당에 내게 된 이유였다. 그는 소박하게 경선에 참여만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박근혜 비대위는 그를 철저히 외면했다. 김 교수는 정치공작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김 교수는 무소속 출마도 생각했지만 우여곡절 속에 출마를 포기했다. 이후 그는 박근혜 당시 비대위원장의 대척점에 우뚝 섰다.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비판적이었다.

김현철 “YS민주센터의 이사직을 사임 합니다"

요즘 김현철 고려대 지속발전연구소 교수의 심기는 편치 않다. 김 교수는 지난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는 오늘부로 저의 아버지 YS민주센터의 이사직을 사임 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김 교수는 "그리고 앞으로 아버지기념도서관과 관련한 어떠한 일도 일체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민주계 인사들이 포진되어 있어 더 이상 제가 할 일이 없네요"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이어 "상도동을 포함하여 모든 재산을 내놓았으니 처분은 그 분들이 알아서 할 일이겠지요. 저는 그저 저의 아버지(YS) 병상이나 지키면서 살아 가겠습니다"라는 뜻을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김영삼 민주센터의 준공이 늦어졌는데도 상도동계 인사들이 무관심한 것에 대한 반발인 것으로 해석했다.

YS는 지난 4월 폐렴 증세로 서울대학교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한 때 위독설까지 나돌긴 했지만 현재 많이 호전돼 조만간 자택인 상도동으로 복귀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87년 대선부터 YS계로 정치를 시작한 여의도의 한 정치권 인사는 “이 시점에서 발표된 김 교수의 사임 소식은 YS를 아끼는 많은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매정한 권력의 속성이 김 교수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면서 “YS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이어받은 김 교수가 자신의 정치를 펼칠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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