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신당⑤>신당 성공의 유일 사례는 신민당…군정종식 위한 YS 투쟁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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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신당⑤>신당 성공의 유일 사례는 신민당…군정종식 위한 YS 투쟁의 ´산물´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3.09.30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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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신당 성공여부는 ´의지´와 ´국민 호응´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안철수 신당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1987년 대통령직선제 쟁취 이후 ‘새정치’란 타이틀을 걸고 크고 작은 신당이 출연했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은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결심한 후 통일국민당(국민당)을 만들었다.
1992년 만들어진 국민당은 그해 3월 총선에서 31명의 당선자를 내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후 민자당을 탈당한 박철언 김복동 등이 합류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를 바탕으로 정주영은 14대 대선에 출마했지만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3위로 낙선했다.

낙선 후 정주영은 1993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당사마저 폐쇄했다. 이후 원내의원들의 탈당으로 스스로 소멸해 갔다.

1992년 10월 이종찬은 “새정치를 열망하는 정치세력은 총집결하자”며 새한국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내부를 살펴보면 새한국당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은 김영삼(YS)이 이끄는 민주계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정계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민정계는 박태준 이종찬 이한동 박준병 박철언 심명보 양창식 의원 등이 참여한 7인 중진위를 구성해 후보단일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민주계도 YS를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해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YS는 김윤환 등 당시 민정계 의원 9명으로부터 지지를 확보한 뒤 김종필(JP)로부터도 지지를 얻어내 대세를 확정지었다.
YS에게 대선후보 자리를 내어주자 이종찬은 1992년 5월 탈당을 결행한 뒤, 김용환 박철언 등과 함께 신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새한국당은 대선을 얼마 앞두고 정주영이 이끄는 국민당과 합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가장 강력했던 신당으로 평가받았던 국민신당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당시집권 여당이던 국민회의와 합당, 새천년민주당 속으로 들어갔다. 

▲ 1997년 이인제는 국민신당을 만든 후 대선전에 뛰어들며 5백만 표를 얻었지만, 신당은 채 1년도 유지하지 못한 채 문을 닫았다. ⓒ시사오늘

국민신당의 창당은 1997년이다. 1997년도 대선이 있는 해였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 집권여당인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을 놓고 후보 간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최형우 이인제 이한동 최병렬 김덕룡 이회창 박찬종 이수성 이홍구 등 이른바 ‘9룡’을 형성하며 각축전이 벌어졌다.

당시 신한국당 경선은 ‘공정성’이 가장 큰 이슈였다. ‘대표는 경선에 출마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주장했던 이회창 대표가 이를 어기고 경선에 출마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표 프리미엄’을 업고 이회창은 ‘대세론’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회창은 제15대 신한국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됐다.

하지만 이인제는 국민지지도 등을 들어 경선에 불복하며 신한국당을 탈당한 후, 서석재 등과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선에 뛰어들었으나 낙선했다.

이인제가 그해 대선에서 받은 표는 무려 500만 표였다. 하지만 원내의원 수가 현격히 모자랐던 국민신당은 국민회의와 합당하며 끝을 맺었다.

그나마 지역주의 정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은 10여년 동안이나 존속했다.

1995년은 YS가 집권한지 3년 째를 맞는 해였다. 정국 구도는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라는 거대여당과 이기택이 이끄는 통합야당인 민주당 양당 체제였다.
그러나 거대여당에 분열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주계는 ‘부패세력 척결’이란 명목 아래 김종필(JP) 대표최고위원, 김재순 박준규 의원 등을 내몰았다. 

이에 JP가 강력 반발하며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만들어 1995년 지방선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자민련은 JP 정계은퇴와 함께 2006년 4월 없어졌다. 자민련은 명맥을 이어오며 국민중심당→자유선진당→통일선진당으로 당명을 바꿨지만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과 합당, 결국 역사 속에 묻혔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무소속 대선후보였던 정몽준이 중심이 돼 만들어졌던 국민통합21도 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난 후 자격 미달로 없어진 정당이다.

국민회의나 열린우리당은 ‘분당’에 가까워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국민회의나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만들어진 열린우리당도 신당이다. 하지만 이는 신당이라기보다는 분당에 가까웠다.

대권 3수생이던 김대중은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원유세하며 슬그머니 정치판에 돌아와 그해 말 민주당을 둘로 쪼개 국민회의라는 신당을 만들었다. 2002년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을 쪼개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그렇다면 신당이 성공한 사례는 없을까. 대통령직선제 전이기는 하지만 1985년 탄생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기 위해 김영삼이 만든 정당이다. YS의 23일 간 단식투쟁으로 탄생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은 1985년 12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신민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해 2월 치러진 총선에서 돌풍을 몰고 왔다. 67석을 얻어 주위를 놀라게 한 신민당은 제1야당으로 등극했고, 제1야당이던 민한당은 군소정당으로 추락했다. 결국 신민당은 민한당 의원들을 흡수하며 1백3석의 거대야당을 만들었다. 신민당 돌풍은 정치권의 구조를 바꿔버렸다. 다당체제였던 정치권은 민정당과 신민당의 양당체제로 바뀌었다.

신민당의 성공은 ‘군정종식을 하겠다’는 지칠줄 모르는 김영삼의 끈기와 국민호응이었다.
결국 안철수 신당의 성공 여부는 ‘새정치를 하겠다’는 안철수의 의지와 국민호응이라 할 수 있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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