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아버지’ 바흐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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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아버지’ 바흐 발자취
  • 박지순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3.0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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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작가 괴테(1749~1832)는 ‘평균율곡집’(well-tempered clavier)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에 대한 그의 경외심을 알 수 있다.
 
“듣게 해주고 느끼게 해주오.
소리가 마음에 속삭이는 것을
생활의 차디찬 나날 속에서
따스함과 빛을 내리시기를”
 
▲     © 시사오늘
 
괴테는 바흐 음악을 되살리려 노력을 경주해 1829년 3월, <마태오수난곡>이 거의 백 년만에 멘델스존의 지휘로 다시 공연됐고 이것이 계기가 돼 바흐의 르네상스가 열리게 됐다.
슈바이처는 “그의 소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의 명성에 오른 것이다”, “바흐는 개별적 영혼이 아닌 총체적 영혼”이라고 바흐 음악을 평했다.
바흐와 ‘음악의 아버지’는 동격으로 사용되곤 한다. 칸트를 철학의 호수라고 한다면 바흐는 음악의 호수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모든 철학의 사조가 칸트에게서 흘러나오듯 모든 음악 장르는 바흐에게서 흘러나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獨 음악가집안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바이올린 배워

바흐는 중부 독일 루터파의 중심지인 아이제나흐에서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1645~1695)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바흐의 집안은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해 왔는데 바흐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삼촌의 오르간 연주를 들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10살 때, 부모를 잃어 고아가 돼 큰형의 집에 얹혀살면서 독일 오르간 음악의 전통을 배웠다. 그러나 큰형네 식구가 늘어나면서 자립해야 했다.
17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이듬해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근무하며 연주경험을 쌓았다. 3개월 후에는 중부 독일 아른슈타트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채용됐다. 오르간 연주자는 바흐가 오랫동안 희망하던 자리였는데 성능 좋은 오르간을 연주하며 연주법과 작곡법을 공부할 수 있는 시기였다. 바흐 음악의 한 축이 오르간 연주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 바흐는 성가대를 관리하기도 하고 밤에는 당시 대가들의 작품을 필사하고 연구해 습작 수준을 넘어 점차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곡을 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바흐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아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을 때는 하인 제복을 입고 귀족의 시중을 들기도 했다. 아직 세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바흐의 대표곡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D단조 토카타와 푸가’가 이 시기에 씌어졌다.
 
가톨릭 음악 칸타타 심취 “한달에 한곡씩 작곡도”

1706년 6월, 바흐는 중부 독일의 뮐하우젠으로 옮겨 성 브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됐다. 여전히 성실했으며 교회 칸타타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칸타타는 바흐의 모든 작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바흐적’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바흐는 기본적으로 종교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바흐가 개신교 계통 신자였지만 그의 칸타타는 가톨릭적이라 할 수 있는데, 비록 바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개신교회가 번창한 지역이었지만 음악적 전통은 가톨릭적 색채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흐는 거의 한 달에 한 곡씩 칸타타(cantata, ‘노래하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며 반주와 성악이 결합된 교회음악의 대표적 장르)를 발표했는데 이는 매우 경이적인 작곡 역량이라 할 수 있는 수준이다.(칸타타 한 곡의 연주 시간은 보통 40~70분에 이른다.)
 
▲     © 시사오늘

 
이 해 가을 바흐는 친척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13년 동안 7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 중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 필립 엠마누엘, 요한 크리스티안은 바흐를 잇는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했다. 세 아들은 헨델과 바흐의 바로크 음악 시대에서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의 고전파 음악으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훌륭히 해 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흐는 결혼한 이듬해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 궁중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됐다. 바이마르에서 약 10년간 오르간 연주자 시절을 거치면서 바흐의 명성은 점차 높아졌고 대가로서의 풍모도 베어나고 있었다.

바흐 음악을 얘기할 때,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음악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바흐는 이탈리아의 협주양식에 착안, 비발디의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피아노 비슷한 건반악기)로 편곡하기도 했다.
실제로 바흐 곡 중에는 비발디와 같은 곡들이 더러 있는데 이것은 비발디의 곡을 바흐가 새롭게 연주한 것이라 보면 된다. 바흐가 비발디를 알게 됨으로써 훗날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같은 협주곡의 명작을 낳는 기초가 형성된 것이다.
1717년 말, 바흐는 궁정의 집안 싸움에 휘말리기도 하고 궁정악장의 지위로 얻지 못해 바이마르 궁정악단에 싫증을 느끼고 괴텐으로 이사했다. 괴텐 궁정악단의 지위도 바흐에게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주는 좋은 기회와 조건이 됐다.

괴텐에서 일하며 바흐는 고액의 연봉을 받아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창작 의욕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3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등 경쾌하고 속도감 있으며 밝은 분위기의 명곡들이 작곡됐다. 바흐의 가정적, 사회적 행복이 작품 창작에 반영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1720년에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고 이듬해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새로운 아내로 맞아들였다.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위하여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곡집 또는 막달레나를 위한 노트북>을 작곡했다. 이 곡에는 새 아내에 대한 바흐의 애정이 잘 표현돼 있다.

1723년 바흐는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kantor, 라틴어로 ‘가수’라는 뜻으로 교회음악의 관장자를 말한다.)에 취임해 죽을 때까지 27년 간을 기악과 성악의 개인지도와 합창훈련을 맡아 교회음악가로 일했다.
바흐가 성 토마스 교회에서 종교 음악을 맡아 일하는 동안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됐고 성 금요일(예수가 금요일에 죽었기 때문에 가톡릭 교회에서는 ‘성 금요일’이라 부른다.)에는 수난곡이 연주됐다. 성 토마스 교회 시절 동안 바흐는 140 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를 작곡했고 <마태오 수난곡>, <요한 수난곡>, <루카 수난곡>, <마르코 수난곡> 등 수난곡 최대의 명곡들을 쏟아냈다.

같은 시기에 <마니피캇>(Magnificat, 성모 마리아가 자신을 도구로 하여 이룬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 및 인류 구원 역사(役事)에 감사하며 부른 찬미가),<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종교 또는 종교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 독창·합창·관현악을 위한 대규모 악곡), <나단조 미사>등 교회 음악의 정수들이 만들어 졌다.
성 토마스 교회 시기를 ‘교회음악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음악적 동기와 목표가 종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대학생 연주단체를 위해 약간은 세속적인 칸타타와 클라비어 협주곡도 작곡했다. 바흐가 보여준 ‘세속성’은 교회음악의 순수성을 퇴색시키지 않으면서도 대중성을 지녀 오히려 바흐 음악의 생명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시대를 초월해 바흐의 곡들이 현대 음악 장르로 재해석, 재연주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년에 대위법 작법의 극치 ‘음악의 헌정’등 만들어 바흐 만년에는 대위법 작법(couterpoint, 각각 독립성이 강한 둘 이상의 선율을 동시에 결합시켜 하나의 조화된 곡을 이루는 기법, 서양음악에만 나타나며 동양음악에는 없는 독특한 연주 형식이다.)의 극치라 불려지는 <골트베르크 변주곡>, <음악의 헌정>(musical offering) 등이 작곡됐다. <골트베르크 변주곡>은 글렌 굴드, 잉그리드 헤블러 같은 최고 권위의 연주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하니발’, ‘양들의 침묵’ 같은 영화 음악으로도 쓰여 영화를 보는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있다.
 
<음악의 헌정>은 바흐의 원숙미와 천재성을 보여주는 그의 가장 완성도 높은 곡 중의 하나다. 1747년 3월 바흐는 차남인 카를 필립 엠마누엘의 장남(바흐의 손자)을 보기 위해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왕을 방문하게 됐다. 손자가 태어난 지 3년이나 지나서였다. 왜냐하면 바흐가 살던 튀링언 주와 차남이 살던 프로이센 주는 외교관계가 악화돼 있어 왕래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음악광이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이 바흐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어 프리드리히 왕의 초청을 받아 프로이센을 방문할 수 있었다. 바흐는 프리드리히 왕을 만난 자리에서 단 며칠 만에 <음악의 헌정>을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바흐는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 음악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흐가 바로크 음악에 한정되지 않고 ‘음악의 아버지’가 된 것은 코렐리와 비발디로부터 이탈리아 음악의 명쾌한 협주양식과 풍부한 화성을 배우는 등 당대의 온갖 음악적 전통을 자신의 개성 속에 융화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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