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섭, 재출마 동기는 청렴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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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섭, 재출마 동기는 청렴 자신
  • 박지순 기자
  • 승인 2010.04.05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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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결혼 청첩장 지인들에게도 돌리지 않아
박홍섭 마포구청장 예비후보(68) 인터뷰를 준비하며 ‘비서도 모르는 청첩장’이란 일화를 알게 됐다. 뒤늦게 한 언론에 공개됐지만 아직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박 후보가 마포구청장으로 재임하던 지난 2005년 무렵 작은 아들이 결혼을 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지인들에게 청첩장을 돌려야 하지만 박 후보는 돌리지 않았다.

현직 구청장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청첩장을 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 모두에게 부담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첩장을 돌려야 한다는 아내와 보름 가까이 ‘갈등’을 겪은 끝에 양가 친지들만 모시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비서도 모르게 치르려던 결혼식이 결국 알려지게 돼 언론 보도로까지 이어졌다. 박 후보의 청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이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구청장 선거에 도전하는 이유도 청렴성에 대한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달 29일 마포구 성산동 사무실에서 박 후보를 만나 그가 걸어온 길과 6월 선거에 임하는 자세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예비후보로 등록하셨는데 어떻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죄가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봄인데도 날씨가 추워서 아침에 지하철역에서 명함을 돌리고 나면 손이 얼어붙습니다.”

-마포구청장 예비후보는 몇 명인가요? 당 공천권을 따내기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민주당에서 모두 8명이 나왔습니다. 본선도 어렵지만 당 공천을 통과하는 것도 똑같이 어렵습니다.”
 
마포에서 5대째 살고 있는 마포 토박이

-마포에서만 대대로 5대째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포 토박이로서 마포 자랑을 부탁드립니다.

“역사적으로 조선시대에 3남의 물품이 마포 나루에 모였습니다. 지금 지하철 이름으로 ‘광흥창’이라는 곳이 있지요. ‘큰 창고’라는 뜻입니다. 피복과 쌀, 곡식, 땔감 등을 모아두던 창고가 광흥창 일대에 여러 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도 마포가 유명해서 마포8경도 전해지고 양반들이 지어놓은 정자도 다수 있었습니다.”

-이력서를 보면 1968년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부터 한국노총에서 일했습니다. 노동운동에 투신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제가 1970년에 강원룡 목사님과 함께 크리스천 아카데미 프로그램 간사를 하고 있을 때 그해 11월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건을 직접 목격했습니까.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종로1가 보신각 쪽에서 일하고 있다가 사건 소식을 접하고 평화시장으로 달려갔을 때는 전태일 열사의 시신이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병원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제가 대학에서 노동법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노동운동계 일부에서는 한국노총을 어용노조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한국노총을 택한 이유가 뭔가요.

“70년대에는 한국노총이 유일한 노동운동의 메카였습니다. 민주노총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생겨난 것입니다. 저도 민주노총 탄생에 기여한 면도 있고요.”
 
노동운동 하다 해직 후 정치계 입문

-노동운동을 하다 1987년 통일민주당이 창당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본격 정치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통일민주당에 참여한 동기는 무엇인가요.

“1985년 군사정권 하에서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교육, 조직 사업을 벌이다 그해 7월 30일 해직 당했습니다. 김근수 전 KBS이사장, 천영세 전 민주노동당 대표도 같이 해직당한 분들입니다. 해고무효소송에서 승소했습니다만 ‘내 권익도 못 지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그렇다고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노동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군사정권이 막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군사정권 퇴진을 위해 가두투쟁도 하게 되고 정치에 몸담게 됐지요.”

-성향으로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 쪽에 더 가깝지 않았나요.

“성향으로 보면 그렇지요. 1987년 6월 항쟁이 승리하며 대통령 선거가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뀌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이 쟁취되면 대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입당했습니다.”

-1989년부터 91년까지 통일민주당 노동정책연구소 상임부위원장, 93년부터 98년까지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으로 일하며 오랜 세월 노동정책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박 후보께서 한국의 노동환경을 변화, 향상시킨 점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제가 13대 총선에 출마했다 낙선했습니다. 지금하고는 선거 풍토가 많이 다르던 시절입니다. 돈이 없었고 어떻게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총선이 끝나고 통일민주당 당사가 중림동에서 마포구 공덕동으로 옮겨왔는데 당시 얼마 전 작고한 서석재 전 의원이 사무총장이었어요.
 
제가 노동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으니 당내에 노동문제를 다루는 연구소를 설립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서 전 의원이 흔쾌히 수용했고요. 위원장은 초선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지만 직책만 맡고 있었을 뿐 일은 상임부위원장인 제가 거의 다 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여의도 국회에 다녀오면 당사로 가지 않고 가든호텔 맞은 편에 있던 제 지구당 사무실에 자주 들리곤 했습니다. 초선 의원 시절이라 당료들하고 불편했던 것 같아요. 자존심이 강하고 고뇌하는 모습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란 인상도 받았고요. 머리에 점심을 이고 다니면서 팔던 아줌마들한테 도시락을 사서 제 사무실에서 같이 먹곤 했지요.

제가 1995년에 근로복지공사를 공단으로 개편하면서 신입직원 200명을 공채로 뽑으며 남녀에게 똑같은 점수체계로 심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군 가산점 제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평가를 해보니 1등부터 16등까지 남성 합격자가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여성이 참 뛰어나다는 걸 실감했죠.”

-(사)한국여성 상담센터 이사로 2000년 2월부터 약 2년 반 동안 일했는데 여성문제에도 관심이 많았습니까.

“여성문제에 관심이 깊었던 것은 아니고요.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에서 퇴임하고 난 후 상담센터에서 이사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와서 맡게 됐습니다.”
 
“한나라당의 비개혁적 성격 나와는 안 맞아”

-제3대 민선 마포구청장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당선된 후 2006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습니다. 공천을 못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공천 신청을 했다가 ‘심사를 안 받겠다’고 선언하고 무소속 출마를 하게 됐습니다. 2004년 총선 때 제가 현직 구청장으로 국정의 책임자이면서 지역 대표자인 국회의원 선거의 당선자와 낙선자를 모두 초청하는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파티 문화가 참 잘 못 됐습니다. 부정한 거래와 담합이 이뤄지는 장소로 이용되는 경우가 흔하죠.

저는 다른 차원에서 축하와 위로를 겸한 자리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한나라당은 모두 떨어지고 열린우리당에서 노웅래, 정청래 두 사람이 당선됐습니다. 실제 모임 자리에는 한나라당 사람은 참석을 안 했고 한나라당 내부에서 ‘박홍섭이 딴 마음을 먹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오더라고요.

그리고 구청장 임기 마지막 해인 2006년에 노 전 대통령이 김근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과 함께 아현동을 방문해 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일도 한나라당에서 저를 안 좋게 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한나라당의 비개혁적 성격이 저와 안 맞았던 것 같아요.”
 


-민주당 입당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2005년 12월 31일이었습니다. 마포구 관내 어린이집 교사들에게 저녁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아마 구청장으로 저만큼 보육 문제와 시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주 방문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보육교사 급여가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보육교사 처우 개선에 힘을 쓰면서 구의회에 예산 1,000만 원을 의결 받아 저녁 식사를 대접했던 것인데 한나라당에서 제가 사전 선거운동을 했다고 문제 삼았습니다.

정치를 그만 둘 생각까지 했었지만 2006년 지방선거에서 좋은 분들이 한나라당 공천에서 배제된 경우가 많아 무소속 연대를 만들게 됐습니다. 다른 무소속 후보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제가 출마해야 한다는 권유를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겁니다.

민주당 입당은 손학규 전 대표가 “선배님, 도와주세요”라며 입당을 권유해 결정했습니다. 민주당 입당 후에는 손 전 대표의 대선 출마를 위해 노력했지만 정동영 의원이 대선 후보가 돼 정 의원을 도와 대선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국가운영 틀에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갈등이 풀릴 수 없다고 봅니다.”
 
지방선거 야권 연대 절대적으로 필요

-이번 선거의 큰 판은 한나라당에 대항하기 위한 야권의 연대 또는 후보단일화입니다. 당의 정체성을 양보하면서까지 야권의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봅니까.

“이번 선거의 양상은 한국사회의 전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야권의 정체성은 비슷합니다.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죠. 자유선진당은 다른 야당과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민주, 평화 개혁 세력이 한 덩어리가 돼야 한다는 의미에서 야권의 연대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현재까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생명과 평화 포럼’이 어떤 단체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지난 2008년 불어 닥친 미국 발 경제 위기가 국내에도 엄청난 충격을 줬습니다. 몇몇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빈곤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는 모임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2007년 11월 25일 이번에 전북지사에 출마한 유종일 박사를 모시고 만든 모임이 ‘생명과 평화 포럼’입니다. 제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가 올 1월에 장신규 상임이사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줬지요.

매월 셋째 주 목요일에 정기 모임을 가지면서 과소비가 향락과 지구 황폐화 그리고 전쟁까지 야기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는 상당 수준에 올라와 있기 때문에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시민들에게 더욱 필요하다고 봅니다. 바로 지난 번 모임에는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동영 의원을 강사로 초청해 통일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서도 모르는 결혼식’ 일화를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청첩장을 일단 찍으면 안 받고도 결혼식장에 오는 사람도 있고 나한테는 왜 안 보냈냐고 따지는 사람도 나옵니다. 마포구에 통장이 400여 명인데 그 중에는 저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도 있고 그렇다고 저를 지지하는 통장에게만 청첩장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관내 공사 시행·시공사에 청첩장을 보내면 어떤 부정이 개입돼 있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가 쉽습니다.

거기다가 비슷한 시기에 서울시교육청 국장이 학부모들에게 청첩장을 보낸 사건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아내도 제 생각에 15일씩이나 반대하다가 동의해줬고 사돈댁도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 제 견해를 따라줘 감사하게 여겼지요. 아들이 지금도 전세를 살고 있어서 좀 미안한 생각은 듭니다.
수행비서가 따라왔다가 결국 결혼식장이란 사실을 알게 돼서 ‘밥만 먹고 가라’고 말했는데  구청 공보실에 출입하는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한겨레신문에 나게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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