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직선제 받아들이겠다"며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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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직선제 받아들이겠다"며 항복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4.0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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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아내의 단독데모와 광명시 여 약사 10명의 지식인 시국선언

#1. 나를 연금해도, 또 서울시내에서 데모에 참가해도 아내 경옥은 늘 담담한 표정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약국을 찾는 고객들의 건강만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민주산악회 일이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나서던 경옥은 가택연금 중에 있던 내가 경찰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고는 걱정이 되어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아예 약국문을 닫아걸고 광명경찰서에 항의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자, 경옥은 대담하게 “나도 잡아가라!”하고 철산동에서, 경찰서 앞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연행해 간 남편 노병구의 행방을 대라!”하면서 단독데모를 했다.

그날 경옥은 온종일 경찰서 여러 번 연행되었다가 훈방되었고, 훈방되면 또 거리로 나가 단독데모를 반복했다고 한다. 전두환 정권은 이미 이성을 잃은 정권이고 또 자기들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을 연행해 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경옥은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죽기 살기로 경찰과 맞서 홀로 싸웠던 것이다.

6·10 국민대회 이후 각 대학의 교수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불이익을 감수하고 4·13 호헌조치를 철폐할 것과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대통령중심제 헌법으로 개정할 것을 주장하며 ‘시국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적으로 80여 개 단체에서 6000여명이 시국선언에 참가해 이룬 ‘지식인혁명’ 이었다.

그런데 30만 시민이 사는 광명시에서는 단 한 사람도 시국선언에 참가한 사람이 없었다. 아내 경옥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여보, 이것은 광명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예요. 광명시에 사는 지식인 중에 민주화를 바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인지, 아니면 혹시라도 불이익을 염려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인지 이럴 수는 없어요. 내가 나서서 약사들을 설득해 동조자를 찾아 서명을 받아올 테니 이일이 끝날 때까지 당신이 약국을 지켜주세요.”

경옥은 종이에 다음의 내용을 크게 쓰고 서명란을 만들었다.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

1. 4·13 호헌조치는 철폐되어야 하고
2. 헌법은 대통령중심 직선제로 개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광명시약사회에서부터 시작해 동료 약국에 들러 “다 같이 서명해서 우리도 지식인 시국선언에 참가하자”고 권유하며 2~3일을 다녔는데, 어렵게 여자약사 10명에게서 서명을 받아 언론사에 보냈다.
 
그 내용이 <중아일보>와 <한국일보>에 게재되고 난 뒤 남자약사 서너 분이 시국선언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는데, 그분들의 이름을 몰라 여기에 쓰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그분들에게 용서를 빈다. 여기 당시의 신문기사와 <주간한국>에 실린 기사를 옮긴다.
 
조용한 움직임의 큰 변화
개헌논의 유보를 천명한 전두환 대통형의 ‘4·13조치’ 이후 다시 직선제개헌을 비롯한 민주화 8개항을 담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이 나오기까지 78일이 걸렸다. 헌정이 실시된 후 40년, 민주화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와 갈등과 투쟁이 이어온 것을 생각하면 이 78일만의 역사적 대전환은 오히려 빠른 변화 같기도 하다.

물론 그 78일 동안이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학생시위나 여야의 정치공방은 더욱 거세어졌고, 특히 ‘박종철군 고문 은폐 조작사건’이 터지고 ‘6·10대회’로 이어지면서 국민적 저항의 격렬함과 시국의 위기감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고조되었다.
 
그 78일간의 와중에서 또 하나의 ‘조용한 움직임’이 불꽃처럼 일어나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되었다. 이른바 전형적인 앙가주망인 ‘지식인 시국선언’이다. 현실에 대한 참여·저항, 혹은 투쟁의 의미로 표출된 ‘지식인의 시국선언’은 대학교수들이 시작해서 종교인·문인들을 거쳐 사회 각 분야에 파급되며 마침내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호헌철폐와 민주화’로 집약되는 ‘지식인의 시국선언’은 ‘4·13조치’ 이후 ‘6·29선언’ 때까지 전국적으로 80여 개 단체 6000여 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의 다수 지식인이 현 정권 혹은 현 체제에 반대의사를 자발적 행동으로 표현한 것은 세계의 역사에도 유례가 없다. 그리고 역사는 이 ‘조용한 움직임’이 ‘6·29선언’을 탄생케 한 결정적 역할의 하나였음을 기록해야만 하게 되었다.

지식인이란 아직도 명확한 개념이 정립되지 못한 보통명사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시민계급의 성장에서 지식인이라는 계층도 등장하지만, 정치인·경제인·노동자들처럼 구체적 형태는 아니다. 다만 지위나 경제력 여부에 관련 없이, 지식인이란 제대로 교육을 받았고, 전문분야에서 활약하거나 그 자격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항상 사회적으로 중산층 이상에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는 보통명사는 직접 생산분야와 동떨어진 경우가 많고, 이익집단으로서의 유대감도 없어 실제적인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고 있지는 못하다. 지식인이라는 말에, 아는 것을 만지만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며, 개인주의와 이기적이라는 뉘앙스가 풍기는 것도 그러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4·13조치’ 이후 한국 지식인의 태도는 달랐다. 4월 22일 고려대학교 교수 30명이 ‘호헌철폐와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했다. 여기 광명시약사회 시국선언에 참가한 약사 10명의 이름을 적는다.
 
진혜숙 오행자 최명신 맹경옥 이춘지 박경옥 장춘희 임혜남 이명옥 조옥현
 
6·10 국민대회와 전두환, 노태우의 6·29 항복
 
#2.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은폐사건,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등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들 끊어 서울뿐 아니라 부산, 광주, 인천 등 대도시의 ‘호헌철폐 독재타도’ 항거의 물결 속에는 거의 전 국민이 합세해 경찰의 무력진압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 그리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단체와 종교계·노동계 지도자들이 효과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해 같은 계열의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을 통합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국민운동본부 주최로 1987년 6월 10일 오후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를 서울시청 옆의 성공회에서 열었다.

무수한 전투경찰을 동원해 이 집회를 원천봉쇄하려고 출입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도 이른바 경찰 닭장차에 강제로 실려 갔고, 무수한 사람들이 수없이 쏘아대는 경찰의 최루탄 세례에 눈물 콧물을 짜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날을 역사는 6·10 대회라고 썼고, 그날 이후 매일 밤낮없이 전두환의 싸움은 서울뿐 아니라 부산·광주·인천 등 거의 전국의 대도시에서 이어졌다. 그러다가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 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함으로써 민주화운동은 절정에 달했고, 6월 26일 백만이 넘는 시민의 행진과 대학교수·지식인들의 연이은 ‘시국선언’으로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음을 감지한 전두환·노태우는 드디어 국민의 민주화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6·29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7월 9일 이한열 군의 장례식이 있던 날은 연세대학교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영구행렬을 따라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많은 추모행렬이 이어져 다시는 독재정권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확실한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함으로써 꽃다운 우리 아이들이 마음 놓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을 했다.

우리 국민은 일제 36년의 나라 없는 수모를 겪었고, 6·25 동란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잔혹성이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고 수백만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보았다. 또한 이승만 독재정권의 혹독한 탄압과 부정부패 그리고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을 일으켰을 때 얼마나 많은 꽃다운 학생들이 희생되었던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박정희를 비롯한 혁명주체라는 사람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그간 저질러진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 국민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으며 성장, 발전해야 할 소중한 시간과 기회를 오직 총칼만으로 박탈하다가 10·26으로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그러고도 우리는 그런 쓰라린 경험을 살리지 못하고도 주어진 임무에 충실치 못한 박정희의 수제자 격인 전두환, 노태우 등 권력욕에 불타는 하나회 출신 몇몇 군인들의 농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광주사태를 겪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억울한 학생·시민의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처럼 반복된 독재자들의 출현은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독재자들이 내세우는 경제제일주의’는 “소고기국에 이밥을 먹여주겠다”고 거주이전의 자유는 물론 언론과 인권을 탄압하는 김일성이나 공산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명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독재정치가 길어지면 어쩔 수 없이 지금의 북한처럼 국민을 굶겨죽이는 체제로 전락하는 것을 똑똑히 보면서도, 또 지난 역사는 그만두고 지금의 세계 역사의 흐름도 공산주의뿐 아니라 어떤 명분과 구실을 붙인 독재국가도 일시적으로는 반짝하는 것 같지만 결국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퇴보해서 후진국 대열로 들어서고 마는 것을 우리는 눈을 뜨고 빤히 보았다.

그러면서도 자각을 하지 못하고 한 숟갈에 배부르지 않다고 참지 못하고 깊은 생각 없이 허둥대다가 야심찬 독재자들에게 당하고 후회하고 또 당하고 후회하며 살아왔다. 박정희의 5·16이 없었더라면, 18년의 기나긴 독재정치가 없었더라면 서투르게라도 단군 이래 처음 해보는 민주정치를 선진 민주국가의 경험과 발전하는 예를 듣고 배워가며 시행착오도 일으키고 실수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비록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몇 년 늦게 하더라고, 한일국교 정상화를 졸속으로 서두르지 않고 몇 년 늦게 하더라도 국민적 합의로 완벽하게 했더라면, 기왕 보릿고개에 익숙한 우리였는데 좀 더 참고 생소한 민주정치를 경험하고 시정하고 온 국민이 배우고 느끼며 해왔더라면 6·3사태, 부마사태, 광주사태, 10·26 등 수많은 민족적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도한 비록 시작은 미미했을지라도 우리는 성숙한 민주시민이 되어 지금쯤은 국민 1인당 소득도 3만 불을 넘는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국민적 자각’이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 승화되어 고도의 문화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선진국이다. 국민적 자각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진실로 봉사하는 자세로 인내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 나갈 때 국민은 감격하고 감격하며 신뢰가 쌓여 점진적으로 고도의 민주시민으로 바뀌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국민적 자각으로 선진 민주국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국민이라야 산다”고 설파한 함석헌 선생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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