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산악회 탄생배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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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산악회 탄생배경은…
  • 유성환 자유기고가
  • 승인 2013.12.1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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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산악회로 민산 발판 만들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유성환 자유기고가)

▲ 문경새재에서 전국민주산악대회, 만세삼창 하는 저자 김영삼고문 참석 (1992. 1)

군사계엄하의 비밀결사 (대구 경북 민주산악회)

1979년 10·26사건 이후 12월 12일 전두환 세력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병력을 동원해서 체포함으로써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18일에는 광주에서 전두환 폭거를 규탄하는 대규모시위가 전개되어 있었고, 5월 20일에는 김영삼 총재를 가택 연금하고, 9월 17일에는 김대중 총재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10월 27일에는 전두환 세력이 강행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날이었다. 18년간의 박정희 군사독재정치에 이어 다시 전두환 군정이 대두된 것이다.

탄압과 저항

1919년 중국의 신해혁명 후 청황제의 퇴위조건으로 손문 대총통으로부터 임시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은 원세개가 혁명파인 손문의 국민당 세력을 거세하고 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고 나중에는 홍헌제가 된 역사의 반동 원세개와 전두환의 차이점을 나는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한국민주주의 정치사를 역류하는 반동적 역류를 차단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1980년 7월쯤 나는 구상을 마치고 은밀히 조직에 착수했다. 계엄 상태에서의 작업이었다. 제2의 군정의 대두를 억제하는 것이다.

김봉현, 김인갑, 이승호, 곽천순 등과 만나 조직의 동기 그 목적 그리고 방법 등에 동의를 얻었다. 여기서 나는 이승호 씨의 소개로 이종훈이라는 사람을 동지로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2년쯤 지나서야 그가 아주 무서운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5명은 동화사로, 파계사로 여러번 밀회를 하면서 회원자격을 일일이 검토했다.

동지들은 나의 제의로 첫 발기대회일을 10월 27일에 하기로 했다. 무서운 권력이 일방적으로 국민에게 강요하는 국민투표 날이었다. 그 날이 국회도, 정당도 해체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지들에게 신민당이 해체되는 날 우리는 민주주의 수호세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민당의 부활을 뜻했다.

10월 27일, 민주산악회 발기 대회일, 그날, 팔공산에는 나 이외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11월 27일에도 나 혼자였다. 모임의 정보가 누설되어 동지들의 자택출입이 원천봉쇄된 것이다. 기관원들은 사생결단이었다. 12월 16일이 이대우 의원의 생일날이라고 속여 10명이 모여 우리들은 회칙을 통과시켰다. 전두환 체제하에서 첫 번째 조직된 저항체가 탄생된 것이다.

우리는 매월 27일에 만났다. 회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담당기관원이 따라 붙어 있었기 때문에 회운영은 난항을 거듭했다. 우리들은 제3차 회의까지 33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재야와 김대중 계도 함께 하였다. 나는 그 수첩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우리 산악회 운영은 不言, 不名, 不記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 때 중앙에서는 대구 모기관에 민주산악회를 해산시키라는 강력한 지시가 몇 차례나 있었다고 들었다. 마침내 내게도 공작이 왔다. 국영기업체의 이사 및 아파트와 승용차였다. 나는 정치 지도자들을 사면석방하고 총선거를 실시하고 군이 원대복귀하면 민주산악회가 필요없고 나를 포섭할 일도 없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해금된 김영삼 총재 팔공산 산행

1981년 강제연금된 김영삼 총재께 연금이 풀리면 대구 팔공산에 오셔서 동지들과 산행할 것을 말씀드렸다. 김영삼 총재는 서신으로 초청해주면 어떠냐고 해서 나는 간단한 서신으로 김 총재를 초청했다. 그 때는 대구 산악회장직을 내가 맡고 있을 때였다.

초대회장은 김인갑 의원이었다. 5월 1일 김영삼 총재가 팔공산 “경민산악회”에 참석했다. 회원은 33명인데 우리를 감시하고 필요하면 우리를 체포하기 위해서 출동된 경찰병력은 사복경찰관 정보기관원을 합해서 약 150명가량 되었다. 긴장이 팽팽한 가운데 총재의 축사가 있었다.

총재께서는 파계사를 들러보고 상경했다. 경찰과의 마찰은 일촉즉발이었다. 제 7차 회의때는 이기택 의원(7선, 민주당 총재)의 후원이 있었다. 이 총재의 격려사는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국가정보원 등에 의해 첫 등산일자가 밝혀졌지만, 81년 6월 9일 김영삼, 김동영, 최형우, 문부식, 김덕룡과 같이 북한산을 등산하였다.그게 민주산악회의 발족이었다.

이것이 전국민주산악회의 출발이며 탄생이었다. 전국민주산악회의 등장은 전적으로 김총재의 심원한 정략이었다. 경민산악회는 즉각 전국민주산악회에 가입해서 김영삼 총재가 이끄는 조직에 합류했다.

김총재의 고독한 산행과 그 깊은 군정타도의 원모를 뉴욕타임즈는 정치활동이 중지당한 한국의 정치인들은 산속에서 모임을 한다고 보도했다. 일본 NHK도 크게 보도했다. 민주산악회는 세계에 알려졌다. (전국)민주산악회는 민추로, 민추는 신민당으로 그리고 군정족식과 민주회복의 중심에 있었다. 한 때 회원수가 200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투사들의 면면

발기인: 유성환, 김인갑, 박귀조, 이승호, 곽천순

김경윤, 김봉현, 김수영, 김영진, 김정홍, 김종한, 김태종, 김학수, 김한식, 노근샘, 박위현, 백판기, 서명교, 손동락, 손태영, 송두봉, 신진욱, 오병호, 유인두, 윤종대, 윤한주, 이대우, 이인준, 이원갑, 이재우, 이종훈, 이태원, 임차문, 장영환, 전구열, 최종후, 한영수, 한치만

이상 33명 경민산악회 1981. 1. 27 (4차 총회시 가입자 6명 포함)

▲ 민주산악회 산상기도(북한산) (1989) 左 김동규 中 김영삼 총재, 유성환, 최형우 右 정목사

공작과 음모로 끌려간 화원교도소 - 탄압받는 민산(民山)

1983년 9월 17일 대구시경 수사과장 이흥락 씨의 조찬초대로 나는 우선 시경 이수사과장실에 갔다. 도착하자마자 나를 김영규 조사계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신문이 시작된 것이다. “산악회 회원 이종훈 씨가 구속이 되면 당신을 빼내줄 터이니 돈 50만원을 달라고 하고 돈 50만원을 받은 사실이 있느냐?”

이종훈은 산악회를 조직할 때 처음 알았으며 그의 전력이 건설부국장이며 대구상고 출신인데다가 반 전두환 사상이 철저하다 해서 나는 경솔히 그를 조직책임자 5명중 1명으로 대우했다. 그가 나에게 몇 번이나 6·25전쟁은 남침이 아니라 이승만의 북침이라고 할 때마다 나는 6·25는 우리가 체험한 전쟁인데 그것은 극단좌파들의 역선전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나보다 2살 위라 나는 항상 예(礼)를 갖추고 대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그 좌파이론을 말했다고 듣고 나는 임차문 동지와 의논 끝에 다시 한번 그런 말을 할때는 혼내주자고 합의 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산악회에 침투한 외부세력이란 말도 있을 때었다.

어느 날 술좌석에서 또 그 말이 나왔다. 임차문 동지와 나는 이종훈에게 몇 차례 주먹질을 했다. 그는 여러 회원들에게 사과하겠다고 말했다. 9월 15일에 이종훈이 만나자고 해서 영남호텔 2층에 가니 “내가 구속이 되니 유회장과 회원들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 이 돈 50만원으로 27일 총회경비로 써달라”고 했다. 그리고 “유회장, 나를 살려도”하며 가버렸다.

신문하는 김영규 경위는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친한 사이었다. 모 기관에서 “함정에 몰아넣는구나. 이종훈이 산악회 입회동기가 따로 있었구나.” 나는 그제서야 짐작이 갔다. 내가 침묵하고 있으니 “그럼 대질신문을 하겠습니다.”

이종훈이 한복을 입고 나타났다. 얼굴엔 핏자국이 여러 군데 있었다. 이종훈은 “유회장이 돈을 달라고 했다.”하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유치하고 장난스러운 범죄조작이었다. 나에게 아무리 유혹해도 식당을 영업정지시켜도 호의호식 높은 자리를 준다 해도 안되니 이런 치졸한 방법을 쓰는 것이다.

고관 자리와 승용차, 아파트까지 주겠다고 했던 것을 뿌리치고, 불의에 대해 투쟁해오던 외롭고 고통의 길을 감내하던 나에게 돈 50만원 금품수수사건을 꾸며 날조한 무리들이 한심스러웠다. 범죄를 음모 조작해서 야당인들을 탄압 그리고 구속한 ‘구체적 실례’가 이 사건이다.

내가 남대구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되었을 때 대구 경북에서 뛰어난 민주투사 한영애 동지가 닭백숙을 해가지고 와서 나를 격려한 일을 잊을 수 없다.

한여사는 국회등원하고도 특출한 원내 활동을 했으며 내가 통일국시발언으로 구속되기 직전 가택연금이 되어 있을 때 아내인 南氏가 세 번 네 번 까무러쳐 온 몸을 쭉 뻗는 걸 보고 놀라서 그녀를 살리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한영애 의원에게 아내는 나와 처음 사귀고 있던 시절에도 각혈하는 나를 버리지 않고 곁에서 나를 살렸으니 “내가 모든 직을 사퇴하고 시골로 가고 싶다”는 하소연을 털어놓자, 한의원의 무서운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 유의원을 잘못 봤소. 천하의 의인은 불고가사 하거늘 유의원은 역사적 소명을 잊고 있소.”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화원교도소에 수감된 지 며칠 안 되어 미결수인데도 내 머리를 깎고 지문을 받고는 족문(발가락)까지 받아서 나는 놀랐다. 그리고는 발가벗기고 몸의 상처라는 상처는 다 카메라에 담았다.

중범죄인 다루 듯하고 잡범들이 있는 방에 가두었다. 낮에 검찰에 조사받을 때, 점심을 먹을 때도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검사의 조사를 받을 때도 복도에 한 시간 두 시간 앉혀 놓았다. 검사는 고대출신 부산인 하무근 씨었다.

그는 대구동창회에 가니 “유성환이가 돈 오십만원에 등쳐 먹을 인간이냐?” 그런 말을 들었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모기관에서 신문에 이 사건을 크게 보도케 했다. 재판 날짜가 정해졌다. 변호사 말에 의하면 그날 재판하는 날 김영삼 총재의 지시로 전국민주산악회장은 그 회마다 버스를 동원해서 대구법정에 모이라는 특별지시를 했다고 했다.

그 날인가 그 익일인가 미대통령 레이건이 한국을 방문한다고 보도되었다. 레이건에게 대구에서 있을 수 있는, 사실상의 반전두환 대소동을 보인다는 것은 전두환의 통치능력의 부족을 레이건에게 보인 것과 같은 것이라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유성환을 즉각 석방하라는 지시가 있는 것 같다는 것이 변호사의 말(言)이었다.

한 교도관이 내게 와서 “오늘 석방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석방을 법률용어로 말해보라고 하니 ‘구속취소’라는 것이다. 구속취소사유를 아느냐 했더니 모른다고 했다. 나는 “안 나가겠다 재판을 받겠다”고 버티었다.

교도관 4명이 오더니 팔다리를 들어 잠깐 수속을 마치고는 내쫓았다. 범죄를 조작해서 나를 구속하고 미국대통령에 큰 혼란이 예상되는 재판을 피하려고 구속취소라는 저속한 전술을 쓰다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전두환 정권이었다.

2008년 서초경찰서에서 나의 신원증명서를 떼어보고 나는 정말 놀랐다. 벌겋게 물들린 전과자였다. 벌금 300,000원, 추징금 500,000원 변호사법 위반으로 적혀있었다. 전과자가 되었다. 나는 민주화운동 때문에 강제연금, 구속, 재판 그리고 옥고도 치루었지만 형사보상을 신청하지 않았다.

후술할 예정인 통일국시 사건 때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형사보상금신청을 하지 않았다. 나는 통일국시주장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판결로써 만족함이 정치인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뇌물을 써서 공로상을 받는 것, 선물을 드리고 학교성적을 올리는 것 그것은 다 정상이 아닌 것이다. 공로가 있는 민주화 운동원을 가려내는 것은 정부의 몫이지 민주화 운동을 한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담당업무 : 국회 및 새누리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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