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의 최후진술(9)> "대구땅에 입맞추고 엉엉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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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최후진술(9)> "대구땅에 입맞추고 엉엉 울고 싶다"
  • 유성환 자유기고가
  • 승인 2013.12.2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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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유성환 자유기고가)

불로동 횟집 - 대학생들의 토론장

국회의원 출마자가 가장 수치스러울 때는 공천을 받기 전에 700만원의 공탁금을 준비 못 할 때이다. 이럴 때는 아예 공천신청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정치자금을 만드는데 아마도 가장 무능한 나는 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큰 고민을 하게 되었다. 궁리 끝에 아내가 장사를 하기로 했다. 동촌 방촌동에 있는 가건물 같은 집을 담보로 오백만원을 만들었다. 9대 총선을 앞둔 때였다.

젊은 청년들이 많이 간다는 불로동에서 횟집을 해보기로 하였다. 그것도 친구 김원복의 도움이 컸다. 내가 또 밥장사, 술장사를 하다니! 개업하던 그 날 나는 김천 중학 낙방의 원인이었던 아버지께서 경영하신 성명관(성주명월관)과 그리고 어머니께서 그 큰 집을 인수해서 여관과 식당을 경영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아내를 끌어안고 남몰래 울었다. 그 당시 사회의 풍토는 요리집이나 식당하는 것을 매우 천하게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제일 겁나는 사람은 동구청 보건계 공무원들이었다. 한번은 부엌의 행주를 검사하더니 박테리아가 많다고 영업정지가 되었다. 이웃집 몇 집도 같은 행정처벌을 받았다. 야당 때문에 장사 못 하겠다고 사람들이 불평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괴로웠다. 그러자 대구 언론가에서 불로동 성주횟집을 직간접적으로 선전해주었다. 공무원들은 아무도 안 오고 남녀대학생들이 매일 같이 초만원을 이루어주어 나는 학생(경북대학생, 영남대학생, 효성여대생)들과 많이 토론을 교환했으며 경북도지사 김수학씨가 우리 집을 방문한 뒤부터 공무원 손님도 많아졌다. 김수학 씨는 참으로 덕망이 높은 분이었다. 희극배우 배삼룡, 구봉서, 남성남 등 배우들이 성주횟집에 올 때는 온 동네가 손님들로 붐볐다. 공탁금문제는 거뜬히 해결되었다. 나는 배삼룡씨와 가까워졌다.

우리 내외가 식당경영을 시작하자 김영삼 총재가 대구까지 와서 불로동 성주횟집을 찾아준 그 동지애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했다. 손명순 여사는 “財如曉日”이라는 휘호를 보내주었다. 김동영 의원, 김봉조 의원, 서석재 의원, 한병채 의원, 그리고 김재경 씨, 노병구 씨 등 많은 분들이 우리 내외를 격려해 주었다. 

▲ 김영삼총재 금호호텔 연금시에 항의 데모주동자로 모기관에 단독 연행되는 저자와 이를 제지하는 학생들 (1974. 12. 28)

국 회 의 원

대구땅에 입맞추고 엉엉 울고 싶다.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거일이었다. 2월 13일 새벽 1시쯤 나의 당선이 확실시 되는 순간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김영삼 총재에게 전화로 상황보고를 했다. 김총재께서는 마치 바로 나를 포옹한 듯이 축하해 주었다. 나는 대구시민과 총재님이 저의 이순간을 만드셨다고 감사했다. 당선이 확정발표되자 매일신문 정치부 김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당선소감을 묻기에 한참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대구땅에 입맞추고 엉엉 울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 조간 매일 신문 사회면에 상단기사로 크게 보도됐다. 선거배테랑인 민주대투사 성승표 군이 “성환아, 고향에 계신 어머님께 가자.”라는 말에 한밤중인데도 우리는 성주로 달렸다. 가는 차중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되었다. 나는 어머님께 큰 절 드리고 어머님을 안고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가눌 길 없었다. 어머님도 목놓아 우셨다. 한과 성취가 합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어머님과 내가 걸어온 길이 너무나 험난한 가시밭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이제 국회의원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 말에 어머니와 나는 다시 목놓아 울었다. 어머니와 나만이 아는 눈물이었다. 나는 국회 개원날 어머님과 아내를 2층 방청석에 모셨다. 유명한 조선일보의 조갑제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야 당선의 실감을 느꼈다. 내가 당선 인사차 선거구를 순회하는데 가는 곳마다 경찰관 4명을 태운 차가 근접미행을 계속 했다.

밤에는 돌멩이가 집으로 날아오기도 해서 불안했다. 나는 나의 당선을 오랫동안 간직해온 ‘나의 주장’을 국회에서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의미를 규정했다. 12대, 14대 국회 재직 중 본회의에서 8회 상임위원회에서 198회 총 206회 정책비판 및 그 대안을 발언했다. 마지막 선거 유세 중 이만섭 후보가 “유권자 여러분, 이 이만섭을 찍어주세요. 만일 제가 싫으시면 오랫동안 고생한 유성환 후보를 찍어주이소.”라고 했다. 유권자들은 큰 함성과 박수로 이 의원의 큰 연설을 환호했다. 개표 결과 이만섭 후보가 2위를 하고 내가 1위를 했다. 유성환을 찍어주라는 그의 연설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마는 이만섭 후보는 득이 되지 못했다. 그는 의와 인정이 있었다. 그가 국회에서 1964년 남북가족면회소설치를 주장한 것은 민족사와 국민에 대한 정과 의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는 두번이나 정치활동규제법으로 사실상 정계퇴장을 당했고 (박정희와 전두환에 의한), 신민당 공천신청 다섯 번 모두가 낙천되고, 여섯 번째 겨우 공천되는 동안 세월은 24년이 흘러갔다. 상해임시정부가 27년 존속되었음을 생각할 때 나의 기다림의 세월, 원외 민주화투쟁은 길었다. 나는 1980년대의 역사적 명분이 없는 군부의 쿠데타가 잔인하고 얼마나 살벌했던가를 회상할 수 있는 합동후보자 연설에서 행한 나의 연설을 여기에 수록코자 한다.

님에 바치는 장미

 존경하는 대구시민 여러분!!

▲ 서민생활만 해온 아내는 닥쳐오는 미지의 세계~중 상류 생활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실토하고 있다 (1985)

무능한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 때 외채가 150억불이었는데 지금은 300억불로 불어났습니다. 빚지고는 못 삽니다. 어떻게 빚을 갚겠습니까? 빚이 많아진 멕시코는 석유가 펑펑 쏟아져 석유를 팔면 되고, 역시 외채가 많은 브라질은 그 넓은 땅을 담보로 하면 되고, 쿠바의 카스트로 대통령은 그 멋지게 생긴 수염을 팔면 되는데, 여러분!! 우리나라 대통령 전두환 씨는 수염이 없습니다. (이 연설이 청와대까지 보고가 되었을 때는 “수염이 없다”라는 말이 “터러기”가 없다고 보고되어 대통령은 진노하고 대통령 측근들은 폭소했다는 후문.)

어제까지 한 후보와 나는 김영삼 총재 밑에서 험난한 야당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김영삼 총재가 대구에 오실 때는 한병채 후보는 김총재의 오른 팔을, 나는 그 분의 왼팔을 들고, 동성로를 행진했습니다. 한 후보 정치지도자를 잘 눈여겨 보십시오. 지금 당신이 흔들고 있는 팔은 독재자 전두환 씨의 팔입니다. 사냥꾼이 사냥개를 끌고 사냥을 하면 아무리 운이 없는 날에도 토끼 한 마리는 잡지만 똥개를 따라가면 통시(변소)에 빠집니다.

- 모기관원 황씨가 찾아와 똥개연설을 한 번만 더하고 그만하면 좋겠다고 압력을 넣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세 번만 더 해야겠다고 우겼다. 그는 상부에 알아보겠다고 나갔다가 다시 나에게 와서 두 번만 더 하고 더는 하지 말라고 종용했다. 나는 똥개비유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 두 번만 했다. 황씨는 기관원 중 성실한 사람이었다. 유권자들은 그 다음 연설에 똥개 얘기가 빠졌다고 야단이었다.

위대한 대구 시민 여러분!

광주 사태는 한국현대사를 강타한 일대 비극입니다. 이 광주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는 일보도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국민 화합도 지역화합도 모두가 구두선에 불과합니다. 유권자 여러분, 나는 광주사태의 진실 확인을 위해 빛이 있는 광주땅을 찾아 갑니다.

어허, 저 암벽 핏빛으로 염색되고

여기 기름진 들녘은 검붉게 물들었네.

민주투사의 피, 젊은 의인의 피

저 피 깨끗이 씻어 가신 님 고이 모시려면

저 피 흘리게 한 자의 피로 씻어야!

(이 연설을 할 때 까지 정부차원에서의 광주사태 해결은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은 광주사태가 발생한 후 15년이 되어서야, 김영삼 문민정부하에서 제정되었다.)

▲ 국회의원 당선되었을 때 배지를 달아주는 아내 (1985)

그 날 연설을 끝마치면서 나는 서울서 김영삼 총재(당시 자택에서 강제연금 당하고 있을 때)가 부인 손명순 여사와 따님 혜숙 양을 대구연설장에 보내주셨기 때문에 청중에게 소개했다. 그 환영의 함성은 컸다. 손여사는 간이의자 위에서 인사했다. 연설을 마치고 나오자 젊은 청년들이 나를 그들의 어깨에 메고 행진하기 시작했다. 수 만명의 대구 시민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행진했다. 그들의 구호는 “민주투사 유성환”의 반복이었다. 대로 전부분을 점령한 대행진이었다. 이 날부터 합동유세가 끝날 때마다 나를 어깨에 앉힌 채 행진은 계속 되었다. 나는 그 날의 감동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학생들이 부르짖는 민주투사 유성환의 참뜻은 이땅에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도래를 절규하는 함성이었다.

역사는 그 나라의 깨어있는 청년들이 창조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민족통합의 국사관을 위하여

1987년 12월 초, 김정렬 국무총리가 6·25전쟁 때 공군 참모총장으로서 조국을 지켰던 혁혁한 공적에 대해 감사드리면서, 국회 예결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나의 뜻을 말했다.

한반도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국을 형성하고 있을 때 3국은 상호간 많은 전쟁을 하였다. 남북이 분단된 후 국민들의 역사 감각은 백제와 신라간의 전쟁만이 회상의 대상이 되는 인상을 준다. 특히 7세기에 있었던 신라 백제간의 전쟁은 그 결과가 너무 커서 오늘의 우리 의식 속에 아직도 깊게 남아있다. 이를 부인할 수 없다. 1300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김총리에게 동양 삼국의 전쟁 역사를 볼 때 중국의 동족끼리의 수많은 전쟁, 최근세사에 기록된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 그리고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장기 전쟁, 또 일본의 전국시대 2~3백년간의 전쟁 등 민족 상호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음을 우리 학생들에게 특히 국사 교과서에 특별 주석을 달아서 우리 학생들이 우리 민족 상호간 특히 백제와 신라간의 감정이 철저히 순화되도록 교과서에 백제와 신라간의 전쟁 결과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 찌꺼기를 일소하기 위한 구체적 설명을 해당 과목의 페이지 윗부분의 지면에 상세히 주석으로 기술해 줄 것을 건의했다. 오늘의 국사교과서를 읽는 학생들은 교과서의 무책임한 서술로, 비유하자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계백장군과 김유신장군의 휘하에 각각 입대한다.

김정렬총리의 답변은 크게 수긍하고 교육부 관계자와 토의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뒤 교과서가 달라진 것을 듣지 못했다. 그날 회의를 마치고 복도를 걸어오는데 여당의 모의원이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유의원 오늘 발언이 통일국시 발언보다 더 컸다”고 했다.

▲ 국회내무위에서 전두환 대통령 국정수행의 불실을 정면비판하는 장면.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 때 (1985)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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