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 “DJ 노무현정권 부패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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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DJ 노무현정권 부패 10년”
  • 박지순 기자
  • 승인 2010.04.0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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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로 미국 갈등관계...측근 비리도 심해

김창준(71) 전 미연방 하원의원은 한국인 출신 미국 정치인으로는 ‘입지전적 인물’, ‘전설’이란 말이 어울리는 유일한 사람이다. 김 전 의원은 부모와도 상의하지 않고 발급받은 비자로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백인이 만들어 놓은 철옹성 같은 주류 사회에서 시의원과 시장을 거쳐 전무후무하게 미국의 중앙 정치무대인 연방 하원의원을 3차례나 역임했다.
 
드넓은 미국 땅에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백인이 싫다고 하는 걸 어떻게 하냐”는 것이 김 전 의원의 말이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키워 세계 최고의 정치무대에서 중견의 위치까지 올랐다.
 
지난달 31일 여의도 자택으로 김 전 의원을 찾아갔다. 그리 넓지 않은 실내는 소박하면서 정리가 단정히 돼 있었다. 김 전 의원은 장대한 체구는 아니었지만 다부져 보였고 말에는 모호하거나 막히는 구석이 전혀 없었다.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먼저 질문 드리겠습니다. 한국 정치의 최대 문제를 꼽는다면 지역갈등입니다. 영호남이 대립돼 있고 충청은 충청대로 세력이 존재하는데요. 미국에도 지역색이 있습니까.
 
“미국에도 있지요.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졌죠. 남부 사람들은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에 대한 반감이 강할 수밖에 없고 링컨이 창당한 공화당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는 전통적으로 남부는 민주당, 북부는 공화당이 강세를 보여 왔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지역색이 약화되는 많은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972년 이래 민주당에서만 당선자가 나오던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선거에서 스콧 브라운(Scott Brown) 후보가 공화당 후보로 당선됐습니다. 획기적 사건입니다.
 
의원 구성을 봐도 과거에는 공화당은 부자당, 백인당으로 인식됐고 민주당은 서민당, 유색인 정당이라고들 했지만 현재는 공화당에 유색인 의원도 있고 흑인이라고 해서 전부 민주당을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유색 인종으로는 최초로 공화당 하원의원이 된 것 아닙니까.”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DJ와 노무현정권은 선거로 당선됐지만 지나친 반미로 미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웠고, 측근의 비리로 실패한 정권이라고 규정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영호남 갈등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할 것

 
-미국에 비하면 한국은 아직까지도 지역 정당이 너무나 견고한 듯합니다. 해결 방안은 없을까요.
 
“한국의 지역감정은 나무랄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봅니다. 제가 보니까 전라도 사람하고 경상도 사람이 결혼도 하고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지역감정이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문제입니다. 미국은 남북전쟁 때 54만 명이나 죽었는데도 지역색이 완화되고 있는 걸 보면 영호남 사이에서 전쟁을 한 것도 아닌 한국 정치에서 지역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됩니다.”
 
YS 진정한 민주주의 열어...DJ·노무현 정권 실패한 10년
 
-문민시대 이후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 간단한 평을 부탁드립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인 정치를 종식시키고 문민 정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김 전 대통령 이전에는 서울대 보다 육사를 나와야 한 자리를 했습니다. 군인이 정치를 하는 나라는 정치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회 해체는 목숨을 걸고 한 것이지요. 비록 경제에는 실패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를 연 분입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깨끗한 선거를 통해 당선되긴 했지만 사상이 좀 반미에 가까워서 한미관계가 악화됐어요. 세금을 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통령 주변을 에워싸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돈을 받는 등 부패했어요. 불행하게도 10년 동안 발전이 없던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경제인들의 기여가 큰 시기였지요."
 
-얼마 전 자서전 ‘흔들어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를 냈습니다. 언제부터 준비했는지요.
 
“한국일보에 1년 반 동안 연재하던 글이 있었습니다. 여성 작가가 저의 글을 보고 자서전으로 바꾸자고 제안하며 나쁜 기억도 전부 얘기하라고 하더군요. 바닥을 쳤던 기억까지 전부 얘기하라는 거예요. 처랑 의논해서 내기로 했습니다.
 
내 자신을 다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후세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자서전을 내고 나니 마음은 후련하더군요. 그러면서도 다시 읽고 싶지는 않고요. 사실 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서울대 법대 시험에 떨어지고 양복 해 입고 놀러 다니다 미국에 건너갔지요.”
 
한국 정치인들 권력 맛에 너무 취해 있어
 
-한국일보에 연재하던 글에서는 주로 어떤 얘기를 했나요.
 
“미국에서 국회의원을 한 한국인은 나 하나입니다. 미국 국회에 들어가 보니까 미국을 알게 됐고요. 미국에 유학 와서 박사학위 받은 것으로 한국에서 30년 간 우려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한국에서 노벨상이 안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과 미국 사회를 비교해 보면 한국에서 선거에 나오는 사람들이 권력 맛에 너무 취해 있습니다. 과거에 장관하고 국회의원 했던 사람들이 시장에 나온다 구청장에 나온다 하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참 보기가 안 좋아요. 답답해서 쓴 소리를 했지요. 나는 미국 시민이고 나한테 뭐라 할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미 연방 하원의원 3선을 했는데 더 도전할 생각은 없었습니까.
 
“저는 3선 이상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제 매니저가 ‘조심하라’고 귀띔을 했는데 미디어에서 선거자금 의혹을 제기하고 말았습니다. 공화당 내 유일한 유색인종인 제가 먼저 맞은 겁니다.”
 
▲ 김 전 의원은 YS는 군인정치를 종식시키고 문민 정치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자서전의 수익금을 정치를 준비하는 1.5세를 위해 쓰겠다고 밝혔는데 미국 교포들 중 정치에 뜻이 있는 이들이 많나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상당수 있다고 봐야죠. 저 이후로 연방 의원들이 계속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안 나오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주의원이 하나, 워싱턴 주의원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압니다. 선거 출마자들은 많은데 당선자가 안 나오네요.”
 
-미국에는 아직도 유색 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합니다. 김 전 의원께서는 잘 생긴 외모 덕을 본 것 아닌가요.
 
“제가 잘 생겼다고요. 농담으로 하는 소리겠지요.”
 
-김 전 의원께서도 미국 사회에서 인종 차별로 고통을 겪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극복 방법을 소개해 주시죠.
 
“인종 차별은 극복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며 바뀌는 것이죠. 백인들이 싫다는 걸 어떻게 합니까. 한국에서 흑인과 결혼한다고 하면 당연히 반대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극복이 되는 문제인가요.”

‘정부도 기업처럼’ 이란 메시지 유권자들에게 호평
 
-다이아몬드바시 시의원과 시장을 거쳐 캘리포니아 주 연방 하원의원에 1991년 당선된 후 3선을 기록했습니다. 김 전 의원의 어떤 면이 유권자들에게 평가받았다고 봅니까.
 
“제 선거구 인구는 62만 명이었습니다. 한국의 국회의원 수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드네요.
100명 정도는 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케네디처럼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전쟁 영웅도 아닙니다.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친척도 없고 조직도 없었지요. 미국에 오래 살면서 영어로 의사소통은 다 됩니다만 발음은 좋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미친놈’이라고 하거나 말거나 제 길을 갔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를 치르면서 ‘체인지(change)’라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제가 던진 메시지는 ‘정부도 기업처럼’이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학사, 석사를 현지에서 한 것이 저의 미국 생활에 도움이 됐지만 대학에 남는 것은 대학이 성(castle) 같아 보여 원치 않았고 기업을 했습니다. 미국 주류 사회에 진출하는 길이 기업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선거에 나가 ‘정부도 기업처럼’이란 메시지를 던진 것이 유권자들에게 호응을 얻은 것 같습니다.”
 
도요타 사태는 미국의 정치적 보복
 
-미국은 한국에 절대적인 나라지만 한국은 미국에 없어도 되는 나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위상이 이전과는 다른데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무역을 놓고 한 말입니다. 한국이 미국과의 무역에서 큰 흑자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없으면 이익이 되겠지요. 과거에는 아시아 국가 중에서 일본이 미국사회에서 가장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이 한국을 강한 동맹국으로 여기고 일본보다 오히려 인식이 더 좋습니다. 요즘 일본 총리가 삐딱하게 나와서 미일관계가 안 좋아요. 도요타 사태도 일본 총리 때문에 빚어진 겁니다. 총리가 사퇴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정치 선진국 미국에서 중견 정치인으로 활동한 입장에서 한국 정치 수준을 어느 정도라고 봅니까.
 
"정치인 개인을 놓고 보면 미국보다 더 낫다고 봅니다. 문제는 제도가 잘못돼 있다는 것이죠."
 
▲ 김 전 의원은 한국 정치인들은 너무 권력 맛에 취해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정치적 판단의 주체

 
-어떤 제도를 말하는 건가요.
 
“공천입니다. 민주정치는 국민에게 선택권이 있는 정치를 말합니다. 당연히 선거의 공천권도 국민에게 있어야 하지 당에서 공천권을 쥐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마치 바둑 두듯이 이 사람은 여기, 저 사람은 저기 식으로 공천을 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비례대표 제도도 없애야 합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인데 비례대표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10억이면 비례대표 한 자리를 산다고 하는데 그렇게 당선되니 임기 중에 그 돈을 받아내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세종시 문제도 국민투표에 부쳐 결정지어야 합니다.
 
노무현 정권이 수도를 이전하려다가 위헌 결정이 나니까 행정부처의 반을 옮기기로 한 건데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부의 정책도 당연히 수정돼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여당이 바뀌면 국회 내 모든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합니다. 한국처럼 위원장 자리를 나눠먹기 하지 않아요. 더 이상 논란을 키우지 말고 국민투표로 세종시 논란을 종식시켰으면 합니다.”
 
-국내 선거에 해외에 나가 있는 국적 소지자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됐습니다. 미국 내 한국인들이 국내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까.
 
“여론조사를 해 보지는 않았지만 관심이 높고 당연히 투표권을 줘야 합니다.”
 
-정치 외적인 질문 몇 가지 드리겠습니다. 자서전에서 ‘0%의 가능성, 운명을 스스로 디자인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처음 발명했을 때 목사인 아버지도 몰랐습니다. 하늘을 날 생각을 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굳은 확신이 있었기에 결국 비행기를 발명했죠. 저도 미국에서 정면 돌파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던 대로 한국에서 살았다면 세계를 흔드는 영웅이 됐을 지도 모릅니다.
 
뉴스에 보면 살기 힘들다고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뭐가 힘들다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부모들 책임이 큽니다. 저는 미국 가서 철이 났어요. 25살에 애가 둘이었는데 무슨 일을 하든 이 애들을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더군요.”
 
한국 사회 물질적으로 ‘Crazy’
 
-한국 사회가 너무나 물질적으로 풍족하다고 봐야할까요.
 
“제가 7년 전 ‘다이너스티’를 구입해서 지금도 타고 다닙니다. 주변에서 의원님이 더 좋은 차를 타야한다고 하는데 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차를 타는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죠. 미국 국회의원들은 지하철 타고 다닙니다. 지하철을 타야 주민들 생각을 알 수 있죠. 한국 국회의원들이 고급 승용차에 기사까지 데리고 다니는데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지금도 직접 운전합니다. 한국은 좁은 국토에 너무 차가 많아요. 아마 3년 뒤면 도로에서 운전을 못하는 시대가 올 겁니다. 저도 돈이 없어서 비싼 차 못 사는 게 아닙니다. 한국 사회가 아이를 안 낳아서 문제라고 하는데 교육비가 너무 비싸요. 무슨 학원이 이렇게 많습니까.
 
미국에서는 학교 말고 학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미국처럼 대학에 들어가는 건 쉽게 졸업하는 건 어렵게 제도를 바꿔야 해요.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식사 초청을 받아 가보니 일인분에 15만 원을 하는데 미국에서는 절대 이런 비싼 식사를 안 합니다. 한국사회가 ‘Crazy’(미친 것) 같아요.”
 
-글로벌 시대를 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세계 무대에 나와서 애국자가 되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미국 와서 인생을 개척했으면 합니다. 요리나 기계 기술만 있어도 성공할 수 있는 곳이 미국입니다. 외국 가서 성공하는 게 진정한 애국입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 서울 고향을 찾았는데 김 전 의원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시련이 와서 고향을 찾았던 건 아닙니다. 연어가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알을 낳고 죽지요. 폭포를 올라가다 힘이 빠져 반이 죽고 얕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곰에게 먹히고 고향까지 가는 건 100마리 중 한 마리 정도입니다. 연어를 보면서 묘한 생각이 듭니다. 나이를 먹으니까 고향 향수가 짙어지고 나도 모르게 한국이 좋아지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남북 통일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까.
 
“국제 사회의 토대 위에서 통일이 돼야 합니다. 외국에 의존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 손으로 국제적 호응을 얻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에 친북 성향의 좌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들 참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북한의 뭐가 좋다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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