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 ˝중진차출론은 어불성설,내가 중진이다˝
정병국, ˝중진차출론은 어불성설,내가 중진이다˝
  • 김병묵 기자 홍세미 기자
  • 승인 2014.03.02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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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국회의원 경기도를 서울보다 낫게… 경기 3.0,'발상의 전환'으로 이룬다"규제를 못 풀면 규제 없는 사업을, 오가기 힘들면 안 가도 되게"'부자도 빈자도 모두 한 표'…손명순 일침에 정치를 깨닫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홍세미 기자)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상도동계의 막내뻘이다. 새순이었다. 새내기 정치인은 청와대 부속실 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등 정부 요직을 거쳐 4선의 중진의원이라는 아름드리 나무로 성장했다. 6·4 지방선거 경기도지사에 출사표를 던지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정 의원과의 인터뷰는 2월 1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됐다.

첫 질문은 정병국 의원의 최근 행보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지난달 16일 경기도지사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경기도와 국회를 오가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라는 정병국 의원의 속내를 들어봤다.

-경기도지사 출마 결심 계기는 무엇인가.
“국회의원 4선을 하면서 당에서 사무총장도 했고, 장관도 했다. 그러면서 국민들 성원에 내가 어떻게 보답을 할 것인가 고민했다. 직접 집행자가 돼서 하나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계기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경기도를 통해서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도지사 출마를 결심했다.”

-해결해야 할 경기도의 첫 번째 문제점으로 ‘교통’을 뽑았다. 김문수 도지사도 과거 ‘뻥쑥 하겠다’는 슬로건을 걸며 교통문제 해소를 시사한 바 있다. 이와 차별점이 있나.

“김문수 도지사는 교통망을 확충하겠다는 것이다. 김 지사가 제시한 건 기본적인 해결책이다. 거기서 나아가 왜 교통난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경기도가 서울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서울에 아파트가 필요하면 경기도에 아파트를 짓고, 공장이 필요하면 경기도에 공장을 지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경기도엔 일자리가 없고 학교가 없고 문화시설이 없다. 그래서 서울로 125만 명이 출퇴근·통학을 한다. 교통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또 그 결과로 경기도 자체적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구조가 됐다. 경기도민들 1년 카드 사용량이 47조 원인데 그중 36%인 17조 원을 서울에 가서 쓴다. 이래서는 경기도가 발전할 수 없다. 그 고리를 끊고 싶다.”

-생각해둔 방법이 있나.

“오가는 것을 빨리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가지 않아도 되게 만들면 된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경기도에 좋은 일자리, 좋은 교육, 좋은 문화가 주변에 있으면 경기도민들이 서울로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서울 사람들이 경기도에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기도민들이 서울을 오가는데 허비했던 시간, 1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한 시간 더 행복한 경기도를 만들겠다’는 내 슬로건이 나온 배경이다. 이런 시대를 경기도 3.0 시대로 칭하고 만들어 가려 한다.”

-고향인 양평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양평·가평, 그리고 여주까지가 지역구다. 경기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고 지속적으로 인구가 줄던 곳이다. 처음 국회의원이 됐던 시점에 양평은 8만 명이 안 됐다. 가평은 겨우 5만 명을 넘겼다. 지금은 양평은 10만 명이 넘었고 가평은 6만 명이 넘었다. 발상을 전환한 결과다.

그동안 내가 각종 규제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고 했던 그곳에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고, 좋은 문화환경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살고 싶은 곳이 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평이나 가평으로 이사 오고 싶어한다.”

-그 ‘발상의 전환’은 어떤 것인가.

“경기도는 규제가 참 심하다. 그간 수많은 규제 때문에 못 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통령도 그 규제는 못 푼다. 법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의원들 간에 ‘수도권’ 대 ‘비(非)수도권’ 구도가 있어서 법을 바꾸는 것도 어렵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을 했다. 어려운 규제를 풀려고 하지 말고, 그 규제를 받지 않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바로 고부가가치의 지식산업, 문화 콘텐츠 사업, 관광 서비스 사업 등이다. 이런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육성하면 규제를 뛰어넘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고, 좋은 교육환경과 문화환경을 만들 수 있다. 이 사업들은 규제를 받지 않는다.”

-경기도 전체에도 적용할 수 있나.

“가능하다.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 더 이상 제조업과 같은 규제받는 사업은 부가가치도 없고 인력창출도 잘 안 된다. 제조업 공장 만들어도 외국 근로자가 와서 일한다. 그걸 바꿔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사례를 보자. 미국이 어떻게 세계 최고가 됐나. 이젠 미국에서 ‘Made in USA’ 제품을 살 수 없다.

그런데도 제조업이 아닌 지식, 문화 콘텐츠, 관광, 서비스 산업으로 세계 최고에 오른 것이다. 그것을 경기도에서 이루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젊은 사람들에게도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경기도지사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야권의 상대도 상대지만 여권 대표 후보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당에서 돌고 있는 남경필 의원 차출설도 신경 쓰인다.

-새누리당 내에서 ‘중진차출론’을 놓고 말이 많다.

“경기도에서 뛰는 사람들 다 중진이다. 나오고 싶은 사람은 나와서 경선을 치렀으면 좋겠다. 경쟁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들은 차출이 아니라, ‘나와서 같이 경선을 해라’고 하는 게 맞다. 차출은 전략공천을 주겠다는 것인데, 전략공천을 누가 마음대로 주나. 후보가 한 사람도 없었다면 모르지만 당헌·당규가 있는데, 어떻게 차출을 하겠다는 것인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 ⓒ시사오늘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의 일등공신…“하늘이 도왔다”

세계를 뜨겁게 달군 소치 동계올림픽이 얼마 전 끝났다. 다음 개최지는 평창이다. 정 의원은 평창올림픽 개최 성공을 이끈 주역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지난 2번의 유치 실패에서 성공 요인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하면서 2018년 평창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지금 소치올림픽이 진행되고 있어서, 그때 생각이 많이 난다.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해 김연아, 이상화, 모태범, 이승훈 선수와 같이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장관을 하면서 가장 큰 미션은 평창올림픽 유치였던 것 같다. 두 번이나 실패했던 것을 우리가 유치해낼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큰 경험이었다.어떻게 하면 평창올림픽이 우리 기대 이상으로 진행이 될까 항상 고민했다. 또 올림픽 유치는 우리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창에서 열리지만, 배후도시는 경기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내가 도지사가 되면 평창 동계올림픽 효과를 경기도 경제발전의 계기로 삼으려고 한다.”

-올림픽 유치 때 에피소드가 있을 듯싶다.

“국민적인 성원이 대단했다. 그래서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한 가지 큰 걱정이 ‘눈(雪)’이었다. 경쟁 도시에 비해 평창엔 눈이 별로 내리지 않았다. ‘눈 없는 데서 올림픽을 한다고 하면 믿겠나’ 싶었다. 그런데 2월 말, 동계올림픽 끝나고 나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실사단이 평창에 방문했을 때 그 당시 눈이 기적처럼 많이 왔다. 그래서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했다.”

정 의원은 그러면서 동계올림픽에 떨어진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더니 답이 나왔다고 부연설명했다.

“또 ‘왜 우리가 두 번이나 동계올림픽에 떨어졌나’ 생각해 보니 IOC 위원들이 뭘 원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지난 두 번의 발표는 전직 장관이라든지 국내 고위층이 했다. 하지만 IOC 위원들은 그런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래서 꼭 필요한 사람들 이외엔 발표자 대부분을 김연아 선수와 같은 유명한 스포츠 선수들로 바꿨다. 이것이 결정적인 성공 요인이었던 것 같다.

경쟁 상대들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의 경쟁국이 독일이었다. 토마스 바흐라는 IOC 위원장이자 독일 유치위원장이다. 그 사람이 “뮌헨에 오면 300개가 넘는 박물관이 있다”고 선전했다. 그 순간 기에 눌렸다. 곧바로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뭘 가지고 박물관 300개를 이길까’ 생각했다.
그래서 대구 도화사 천년 사찰로 위원들을 불러 만찬을 가졌다. 그 전경을 본 IOC 위원들이 “wonderful, wonderful”하더라. ‘독일엔 미술관?박물관이 300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천년이 넘은 사찰이 1,000개가 넘습니다’ 하면서 독일 기를 죽였다.”

YS에 대한 감정은 ‘애틋함’…상도동계 입문 첫 일은 ‘신발정리’

정 의원은 YS 문하생이다. 학생운동권 출신이던 정 의원은 1987년 YS와 연을 맺은 후  손명숙 여사를 모시는 것이 임무였다. 정 의원은 손 여사로부터 “정치를 제대로, 처음부터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상도동계’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난 YS 밑에서 정치를 시작했기 때문에,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상도동계 인사들이 만든 민주동지회원들은 다 나의 선배들이다. 난 1988년 1월 1일, YS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다. 선배 비서들이 막내였던 내게 첫 번째 일거리를 준 것이 상도동 집에 온 손님들 구두 닦고 인사하는 것이었다.

신년이니까 손님들이 많이 왔다. 그래서 선배들이 나한테 구두주걱을 주면서 ‘손님들 구두정리하고, 오고 갈 때 ‘안녕하세요’‘안녕히 가세요’ 인사해’라고 시켰다. 그게 시작이었다.”

정 의원은 이 대목에서 눈을 감더니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래서 YS가 대통령 되기 전 5년, 대통령 되고 나서 5년, 비서만 10년 하면서 YS를 모셨다. YS는 내가 뭐라 표현하기도 힘들다. ‘애틋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민주동지회는 나와 같이 동문수학을 했던 사람이고, 그 당시에 그분들과 민주화 투쟁하면서 뛰어다녔던 기억도 있다.”

-YS가 정 의원을 발탁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987년도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6월에 구속이 됐다. 그때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구속된 인사들을 위해 무료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그때 나도 무료변론을 받았다. 구속이 되고 나서 1주일 있다가  6·29가 일어났다. 그 당시 안기부에 의해 남산에 끌려갔다. 나는 취조받고 있어서 며칠이 지났는 지도 몰랐는데 1주일이나 지났다고 했다. 1주일 후 수사관들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변호인단과 6·29 덕분에 서대문 구치소로 넘어갔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때 막 대통령 선거가 시작됐다. YS와 DJ 둘 중 누가 되느냐, 하다가 갈라서게 됐다. ‘비판적 지지세력’에 들어가서 뭔가 바꿔보자고 생각해서 통일민주당 선거캠프에 들어갔다. 처음엔 자원봉사로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니까 전문위원이라는 타이틀을 주더라. 그래서 그때 홍보물을 만드는 홍보담당위원이 됐다.

그렇게 대선을 치른 후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YS가 낙선했다. 그래서 비서실을 다시 재편했다. 선거 때는 비서가 30명이 있었는데, 선거 끝나고 나서는 5명만 남겨놨다. 그리고 새로 한두 사람을 뽑았는데 그때 내가 들어갔다. 나를 추천했던 사람이 김무성 의원이다. 재정국장이었는데 김 의원의 추천으로 들어가게 됐다.
내가 들어갈 때 이인제 의원과 같이 갔다. 이 의원은 정치계에선 선배이지만, 상도동은 같은 시기에 들어간 것이다.”

-상도동계 이성헌 · 김영춘 전 의원과 비슷한 또랜데, 정 의원만 너무 승승장구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돈다.
“선거 때 이성헌 김영춘 전 의원과 선거 전략을 짜던 생각이 난다. 두 분 모두 훌륭한 분이다. 내가 더 운이 좋았던 측면도 있다.” 

▲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 ⓒ시사오늘

어머니 같은 손명숙 여사에게 배운 정치인생 30년

-손명숙 여사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손 여사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대통령 선거 시작 전, 경선할 때 실무적인 일을 내가 맡아서 했다. 경선이 끝나고 내게 주어진 업무는 후보 부인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팀을 짜고 총괄 지휘를 하면서 손 여사를 모시고 다녔다.

그 당시 우리가 여당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고 하니까 조심하라’든지, ‘누구의 이미지가 나쁘니 멀리하라’ 같은 정보와 전략들이 들어왔다.

하루는 손 여사를 행사에 모시고 나갔는데, 당에서 만나지 말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래서 내가 ‘사모님, 이분은 이런 문제가 있으니까 가능한 한 안 만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했더니 ‘예, 알겠어요’ 하시더라. 그런데 며칠 있다가 그 사람을 또 만나더라. 그래서 재차 만나지 말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며칠 후에 손 여사는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그래서 세 번째로 말씀을 드렸더니 딱 거기서 정색하며 말을 하더라.

‘비서 아저씨, 정치는요, 거지도 한 표, 부자도 한 표, 못난 사람도 한 표, 잘난 사람도 한 표입니다. 이 사람은 잘났으니까 만나고, 이 사람은 못났으니까 안 만나고, 이 사람은 가난하니까 안 만나고, 이 사람은 못됐으니까 안 만나고 하면 누구하고 정치하실 거예요?’ 

충격을 받았다. 이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분을 5년 동안 모시면서 기본부터 배웠다. 제대로 된 정치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배운 정치의 기본이 오늘날 나를 만들었다.”

-아이디어가 좋아서 손 여사한테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아이디어가 좋다는 것보단, 손 여사나 대통령께서 전적으로 나를 믿어줬다. 전권을 주다시피 했던 것 같다. 때문에 내가 생각나는 것들을 바로바로 시행할 수 있어서 많은 기획을 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나.

“신문을 읽다가 독자투고란을 봤다. YS가 취임한 후 봄이었다. 평창 임업시험장에서 야생화를 상품화시키기 위해서 목장을 만들었는데, 누구도 야생화를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공짜로 줘도 안 가져간다고 하더라. 그런 야생화들이 썩고 있다고 했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서, 손 여사께 알렸다. 손 여사는 ‘청와대 가서 심죠. 조경을 야생화로 하면 어떨까요’라고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봄이 되면 청와대선 팬지 같은 꽃을 가져다 심으면서 조경을 한다. 그런데 그 해 야생화를 청와대에 가져다 심었더니 난리가 났다. 모든 정부기관이 조경을 하며 야생화를 가져다 심은 거다. 야생화는 이틀 만에 동이 났다. 오늘날 외국 꽃들과 견줘도 야생화가 밀리지 않는다. 그건 이 때부터였다.
첼로연주가 장한나도 생각난다. 장한나가 그 당시 초등학교 3~4학년, 어린 나이에 국제 콩쿠르 입상을 했다. 장한나 기사를 보는데 악기가 없어 빌려서 콩쿠르에 나갔다고 하더라. 그걸 읽고 손 여사께 말씀드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내가 ‘메세나(기업의 예술활동 지원)’라는 게 있는 것을 손 여사께 알렸다. ‘메세나’로 방송국과 협의해서 캠페인을 하면 모금을 할 수 있다. 메세나 회장이 금호그룹 박삼구 회장이었다. 금호 문화재단을 운영하던 박 회장이 악기를 사서 장한나한테 줬다. 오늘날 장한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 ⓒ시사오늘

원조 소장파의 상징, 그 길을 걸은 이유

정 의원은 충분히 주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초재선 당시 남경필·원희룡 의원과 함께 '남원정' 이라는 이름의 소장파로 활동했다. 그 배경이 궁금했다.

-당 내에서 주류로 갈 수도 있었는데, 왜 ‘소장파’를 택한 것인지.

“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정치판에서도 그렇고, 나는 처음부터 뭔가를 위해 투쟁이나 정치를 한 것이 아니다. 학생 때는 누려야할 자유를 군사정권이 침해했다. 그래서 투쟁했다.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정치판으로 이어졌다. 정치인으로서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을 가지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도부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장파가 된 것 같다. 바른 정치를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미래연대’, ‘새정치수요연대’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때론 미움도 받았고, 협박도 받기도 했지만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들이 국민적 지지를 받아서 우리 소장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원조 소장파로 불리는 ‘남원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은 어떻게 결성됐나.

“미래연대를 하면서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역풍이 불면서 한나라당이 존폐 위기에 몰렸다. 그때 우리를 비롯한 소장파 의원들이 ‘최병렬 대표 물러나라’면서 당 지도부는 모든 권한을 내려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 지도부의 저항이 심했다.  당시엔 지도부가 우리 공천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기가 시기다 보니 당에서 협박도 받았다. 그런 협박과 온갖 비난에도 끝까지 남았던 사람이 우리 ‘남원정’이다. 우리 셋이 남으니까 언론에서 소장파의 대표격이라며 ‘남원정’으로 이름 지었다.

결국 우리 뜻이 이뤄져서 지도부가 사퇴하고 전당대회를 열었다. 거기서 우리가 추대한 박근혜 의원이 대표가 됐다. 기존 당사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해서 박 대표 당선 다음날 간판을 떼서 천막당사에 달았다. 그게 천막당사의 역사다. 소장파도 유명세를 탔다.”

-지금도 ‘남원정’은 친분관계가 두터운가.

“우리가 3선이 되고 나서 중진 반열에 올라섰다. 또 우리가 집권 여당이 되고 나니  각자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난다. 요즘은 만나서 하는 얘기가 우리가 정치권의 중진이 됐고, 중심세력이 됐는데, 우리가 초재선 때의 초심을 가지고 대한민국 정책을 바꿔야 되는 것 아니냐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한다.”

-요즘 새누리당에는 ‘소장파’가 없다는 말이 돈다.

“아쉽다. 지금 우리 당 초재선 의원 분들을 보면 개별적으로 역량들이 뛰어난 전문가들이다. 그런데 그분들을 보면 정치를 전문으로 해오던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 아직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국회의원이 된 후 2년이 지났으니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자신이 가진 전문가적인 지식과 정치력을 발휘하면 또 다른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

내가 MB맨? 나는 ‘문화맨’

-일각에서는 정 의원을 두고 ‘MB맨’이라고 한다.

“나를 ‘MB맨’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진 않다. 다만 MB 정부 시절 장관을 했다고 ‘MB맨’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그렇게 낙인찍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유정복, 최경환 의원들도 다 MB 시절 장관하던 사람 아니냐. 내게 낙인을 찍으려고 하는 것은 정치공세다.

난 MB를 대통령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를 MB 맨으로 부르는 것은 아무 상관없다. 그런데 난 시대적으로 보면 YS부터 시작해 이회창 총재 부실장을 하면서 수행팀장도 했다. 그러면 ‘YS맨’, ‘이회창맨’이라고 해야 하나.”

정병국 의원은 그러면서 본인을 ‘문화맨’이라고 칭했다. 문화체육관광 방송통신위원회에서 11년, 문광부 장관까지 역임한 그는 현재의 문화 부흥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 발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에 전반적인 문화 정책은 어떻게 보고 있나.

“우리 역사를 되돌아 봐도 지금과 같은 문화 부흥기가 없었다. 나는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부터 줄곧 문화체육관광 방송통신위원회에서 11년을 몸담았다. 최장기 상임위원을 했고 장관까지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문화맨’이다. 그런 과정을 겪어온 내가 볼 때 지금 같은 문화 부흥은 시대적 흐름이다. 우리 민족이 사회적으로 요구해온 것과 딱 맞아 떨어진다.

‘빨리빨리’하려는 습성들이 방송통신·미디어와 연결되고, 감성적으로 우뇌가 발달했던 민족성이 문화적 트렌드와 접목이 되면서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됐다. 우리 민족이 우수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런 부분들을 잘 활용해서 새로운 민족, 부흥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본인의 정치적 소신이나 좌우명을 들려준다면.

“내 좌우명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치, 생활정치를 하자는 거다. 늘 현장에서 답을 찾자는 것이 내 기본적인 생각이다. 앞으로도 어떤 정치를 하든, 어떤 위치에 있든, 국민의 눈높이와 현장에 찾아갈 것을 약속드리고 싶다.”

담당업무 : 국회 및 더불어민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行人臨發又開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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