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동이 갈채 받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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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이 갈채 받는 이유
  • 환타임스
  • 승인 2010.04.2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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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를 당당하게 걸어간다...당당함은 양의 기질
구이 - 이도탄탄(履道坦坦)은 정도를 당당하게 걸어간다는 뜻이다. 당당함은 양의 기질 때문이고 정도로 가는 것은 구이가 득중을 했기 때문이다. 탄탄대로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유인(幽人)은 세속적인 욕망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은자(隱者)를 가리킨다.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초연하므로 매사에 당당할 수가 있다. 우번(虞飜)은 유인을 옥에 갇힌 사람(囚)이라 했다. 귀매괘(歸妹卦) 구이효의 이유인지정(利幽人之貞)도 마찬가지이다.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죄를 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감옥에 갇혔더라도 반드시 죄인은 아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경우도 있고, 실정법을 위반했지만 소크라테스처럼 악법에 걸렸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감옥에 들어 갈 수도 있다. 어떤 경우로 감옥에 갇혔든지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를 지키면 비난을 면할 수도 있다.
 
인심은 일정치 않아서 무척 미워하다가도 막상 형벌을 받게 되면 동정심이 생기기도 한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거나 형벌을 받아서 천명을 다하지 못했지만, 당당하게 최후를 맞아했던 사람이라면 언젠가 다시 평가를 하기도 한다.

당당함으로 비난을 면했던 사람은 장세동이다. 장사가 많이 나기로 유명했던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그는 영남 출신인 전두환을 주군으로 섬겼다.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 부장과 대통령경호실장을 역임하면서 핵심인물로 권세를 누렸다. 권력은 뜬구름과 같아서 몇 년 후 김영삼정권이 수립되자 5공비리청문회에 끌려나왔다.
 
그러나 다른 증인들과 달리 그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분명히 죄인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국가의 이익을 지키려고 애쓰는 그의 당당함을 인정했다. 그의 덕분에 전두환마저도 대단한 리더십을 지닌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수시로 유행하는 깡패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끄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분명히 사회를 어지럽히는 범죄인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목에게 충성을 다하고 친구와의 의리를 지킨다고 생각하여 은근히 갈채를 보낸다. 이러한 현상의 저변에는 겉으로는 지성인인 체하면서 뒤로는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과 엄청나게 위대한 사람인줄 알았더니 치사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반작용일 뿐이다.
 
장세동이나 깡패들이 범죄인이라는 사실을 대중들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러한 사람들이 갈채를 받는 이면에는 지도층에 대한 실망과 사회에 대한 절망이 숨어 있다.

유인을 감옥에 갇힌 사람이라고 하든, 숨어 사는 사람이라고 하든 외부와 단절된 상태임에는 분명하다. 외부와 가장 단절된 상태는 자신의 속마음이다. 장세동이나 깡패들처럼 겉으로 당당하기도 쉬운 노릇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진정으로 정도라 할 수는 없다. 당당함의 진수는 겉과 속이 일치된 당당함이다. 당당함을 갖춘 예란 《대학》의 핵심인 성의(誠意)가 바탕이다. 성의의 내용은 4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毋自欺)이다. 남회근(南懷瑾)선생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살아갈 맛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앞길이 탄탄대로일 것이라 생각해야 희망도 있고 재미도 있을 것이다. 희망은 생명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거기에 도취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자신을 만족시켜주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날마다 자신을 배신한다. 열심히 공부하겠다, 부모님께 효도하겠다. 담배를 끊겠다, 교통신호를 지키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하지만 대부분 지키지 못하고 산다. 성(誠)이라는 글자는 말(言)을 한 것을 이룬다(成)는 뜻이다. 제3자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도 어렵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스스로와의 약속이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어겨도 그만이다. 그러나 자신만은 안다.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은 지키기 위해 한결같이 노력하는 행위가 곧 성실이다.

둘째는 호오(好惡)이다.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좋고 옳아도 이해관계가 걸리거나 나태하면 행하지 않고, 싫고 나빠도 이득이 되면 마지못해 뛰어든다. 의식이 엎치락뒤치락하니 자신의 정체성(整體性)을 깨닫지 못한다.
 
영정이치원(寧靜以致遠) 담박이명지(淡泊以明志)의 경지에 이르러야 탐진치(貪嗔癡)의 속박에서 벗어나 생각의 중심이 잡히고, 행동거지가 당당하여 어떠한 경우라고 흔들림이 없다.

셋째는 자겸(自謙)이다. 스스로에게 겸손하려면 의식이 청명하고 진솔해야한다. 그렇지 못하다고 자각했다면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 청명하고 진솔한 의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겸손은 자신에 대한 비하나 소극적인 사고를 의미하지 않는다. 주역의 64괘 가운데 15번째인 지산겸괘(地山謙卦)는 겸손의 도를 설파하고 있다.
 
높고 험준한 산이 평탄한 대지 밑으로 들어가 있는 형상이다. 64괘 가운데 모든 효가 길한 경우는 겸괘 뿐이다. 강인하고 유능하지만 자신을 낮추고 있으므로 흉악한 경우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있지만 드러내지 않으니 자만이나 교만이 아니요, 유능하지만 보통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니 무능하거나 소극적이지 않다. 유인이란 자겸의 도와 상통한다.

넷째는 신독(愼獨)이다. 소년시절에 학교의 화장실에 적혀 있던 구절이다. 담배를 피우거나 낙서를 하거나 화장실을 더럽히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다. 나중에 대학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다. 신독에 대한 남회근선생의 설명은 대단히 심오하다.
 
선생께서는 홀로 있을 때 즉 유인일 때 가장 삼가야 한다는 일반적인 설명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같다. 선생은 최고의 의학서적인 《황제내경》의 독오(獨悟), 독견(獨見), 독명(獨明)를 통한 식신(識神)의 경지야말로 신독의 묘체(妙諦)라고 했다.

독오란 조악하고 천박한 의식이 정지된 후에 나타나는 지혜이므로 귀로 들을 수는 없지만 마음이 열려서 삼라만상의 소리를 듣는 경지를 가리키며, 독견이란 깊은 명상의 상태에서 자의식이 사라진 후에 도달하는 청정함으로 시공(時空)을 초월한 심안(心眼)으로 우주에서 쿼크(quark)에 이르기까지 바라 볼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독명이란 신체의 감각마저 사라진 상태에서 마치 선계로 날아가는 듯한 상태를 가리킨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이니 스스로 수련을 통해 체험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한가할 때나 혼자 있을 때 조심하는 것이나 잘해야 할 것이다.

육삼 - 묘능시(眇能視)는 눈이 멀어 자세히 볼 수가 없다는 뜻이고, 파능리(跛能履)는 절름발이로서는 먼 길을 갈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주제에 잘 보려고 하거나 먼 길을 가고자 한다면 마치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서 물리는 것처럼 흉하게 될 것이다. 자기의 능력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을 하는 것은 마치 군사(軍事)에 관한 일 밖에 알지 못하는 일개 무인(武人)이 대권(大權)을 잡은 것과 같다.

리괘(履卦)에서 육삼은 유일한 음효로서 다른 상부에 있는 3개의 양효를 잘 따라야 한다. 그러나 하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마치 능력과 덕망이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교만에 차있는 것과 같다. 더구나 음효가 양의 자리에 있어서 득위를 하지 못하였으므로 자기자리가 아니라는 불만으로 가득 하다. 그러다가 결국은 상부의 양효들에 의해 징벌을 받게 된다.

예는 개인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국가간에도 존재한다. 국가간의 예는 대체로 약소국이 강대국을 섬기는 형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강대국이 약소국을 무시하다가 창피를 당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흔히 문화적 쇼비니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했던 중국사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문화적 우월주의가 팽만하면 편협한 애국심이 판을 친다.
 
대체로 외세의 압력을 받게 되었을 때 실용주의자들은 국제정세를 감안하여 냉정하게 현실적인 대안을 찾지만, 쇼비니스트들은 무모하게 강경책을 주장하며 호전적 애국주의자인 징고이스트로 바뀐다. 다음은 국제정세를 잘 알지 못하고 상대를 무시하여 무모하게 병력을 동원했다가 망신을 당한 사례이다.

주원장이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낸 이후로 명왕조는 당분간 유목민족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점유했다. 그러나 건국 이후 50년이 지나자 권력과 부를 지닌 지배층이 병역을 기피하는 경향이 심해졌다. 국방력이 급속히 약화되었지만 오판을 한 명 왕조는 여전히 강경책으로 일관했다.

명의 영종(英宗) 시대에는 환관인 왕진(王振)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왕진은 선종(宣宗) 때 환관이 되어 내서당(內書堂)에 선발된 후 동궁에서 태자 주기진(朱祁鎭)을 모셨다. 선덕(宣德) 10년인 AD1435년, 선종이 죽고 겨우 9세인 태자가 즉위했다. 그가 영종이다.
 
어렸을 때부터 왕진의 보호를 받고 자란 영종은 왕진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사례감(司禮監)을 관장하도록 했다. 그러나 영종 초년까지는 인종의 황후였던 태황태후 장씨와 양부(楊溥),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등 소위 ‘3양’의 보정으로 영종이나 왕진이 마음대로 행동을 하지 못했다. 정통 7년인 AD 1442년 태황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삼양도 죽거나 연로하여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정권은 왕진의 손으로 넘어갔다. 왕진은 태조 주원장에 세운 환관의 정치개입을 금한다는 철패를 옮기고 조정의 인사에 개입하여 반대파들을 숙청했다.

왕진은 이러한 자신의 문제점을 감추기 위해 황제를 부추겨 두 번의 전쟁을 일으켰다. 정통 6년인 AD1441년, 지금의 운남성 등현(騰縣)인 녹천(鹿川)에 웅거하던 만족(蠻族)의 추장 사임발(思任發)을 토벌하기 위해 15만의 대군을 동원했으나, 전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 만의 병력을 잃었다. 만족은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두 번째 전쟁은 더욱 황당했다. 왕진은 평소에 원왕조의 잔존세력인 북방의 와자(瓦刺)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기의 심복들에게 사사로이 화살촉을 만들어 와자의 좋은 말과 바꾸면서 변경의 안녕을 도모한다고 주장했다. 와자는 명왕조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중원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정통(正統) 4년인 AD1449년 봄, 와자는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할 때, 왕진 등이 강제로 말의 가격을 깎자 불만을 품었다. 그해 7월, 야선(也先-에센)은 와자의 대군을 이끌고 산서성 대동(大同)을 공격했다. 대동의 명군이 참패하자 각처의 방어진이 잇달아 무너졌다. 조정은 삽시간에 두려움에 쌓였다. 친히 정벌에 나서기로 한 영종은 왕진과 함께 50만 대군을 이끌고 성급하게 북경을 출발했다.
 
용관(庸關), 회래(懷來), 선화(宣化)를 거쳐 대동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군사를 동원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악천후까지 겹쳤다. 양초(糧草)가 준비되지 못한데다가 주둔지 부근은 인구가 적어서 현지에서 수급을 하기도 어려웠다. 대동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군량이 동이 나자 군중에서는 탈영자가 늘어났다.

영종이 친정에 나섰다는 사실을 안 야선은 유인책을 써서 황제를 생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먼저 주력부대를 철수시키고, 기병대에게 두 갈래로 나누어 명군의 양익을 우회하여 에워싸라고 명했다. 8월 초에 대동에 도착한 명군은 와자군이 철수했다는 사실을 알고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매복에 걸려 추격했던 명군은 전멸했다.
 
영종은 사태가 위급하다고 판단하여 철수명령을 내렸다. 영종의 동태를 살피던 야선은 기병대를 조직하여 주야로 명군을 추격했다. 낭산(狼山)과 요아령(鷂兒岺) 일대에서 명군은 3만명의 병력을 잃었다.

8월 13일. 영종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회래성에서 20리 떨어진 토목보(土木堡)라는 작은 요새에 주둔했다. 토목보는 지대가 높아서 주위에 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곳이었다. 몇 일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명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이틀 동안 맹공을 퍼부었지만 승리하지 못한 야선은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고 후퇴하는 척하기로 결정했다.
 
명군이 요새 바깥으로 나오면 기다렸다가 섬멸할 계획이었다. 야선은 왕진에게 편지를 보내 전투를 멈추고 강화회담을 열자고 했다. 사신이 토목보로 가는 동안 와자군은 토목보에서 30리 후퇴했다. 영종과 왕진은 강화사절이 떠나자마자 수원(水源)이 있는 것으로 병영을 옮겼다.

명군이 토목보에서 4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을 때, 갑자기 와자군이 사방에서 달려나와 공격을 퍼부었다. 명군은 수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대패했다. 혼전 도중에 왕진은 수백명의 경호부대와 함께 영종을 보호하여 포위망을 뚫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러한 참상을 본 영종은 말에서 내려 큰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장탄식을 했다.
 
그는 와자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왕진을 비롯한 명군은 50만 대군의 대부분이 전사했다.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조야가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도 우겸(于謙)이 북경을 잘 수비하여 명왕조는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다.
 
사건이 벌어진 후 명은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려고 했으며, 나중에 영종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국가의 위신이 크게 손상되었다. 권의를 잃은 영종은 형제들끼리 권력다툼을 벌이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와자부 즉 오이라트부족은 원나라의 후에로 명이 건국한 후에 신하로서 조공을 바치던 관계였다. 명과 와자부의 국력을 비교하면 와자부는 약자였고 명은 강자였다. 그러나 와자부의 추장 야선은 토목보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곳곳에서 명군보다 선수를 쳐서 우세한 위치를 점유했다.
 
그는 금적금왕책(擒賊擒王策)을 성공적으로 응용하여 영종을 생포하고 무려 50만명의 명군을 격퇴했다. 군룡무수(群龍無首)의 상태가 된 명군은 황제가 포로로 잡히자 자멸했을 뿐만 아니라, 영종을 인질로 삼아 후퇴하는 야선을 추격할 수도 없었다.

황제는 멍청했지만 그래도 신하들은 중국인답게 실용적인 생각을 했다. 명왕조의 신하들은 과거에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金)에 포로로 잡혀간 후에 두 황제를 되찾아 온다는 명분 때문에 정치적 혼란을 겼었던 송왕조의 전례를 되풀이 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간 영종을 재빨리 태상황으로 떠받들고 그의 동생을 황제로 옹립했다. 영종을 사로잡은 야선이 자신의 딸을 황후로 삼아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려고 했지만, 새로 황제를 옹립한 명조정은 사직이 중요하지 통치자는 누구라도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인질로서 가치가 떨어지자 야선은 약간의 배상금을 받고 영종을 돌려보냈다.

이상이 명왕조가 몽고족에게 당한 가장 창피를 당한 ‘토목보의 변’이다. 이 사건 이후로 몽고족은 더 이상 명왕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눈도 멀고 다리도 저는 주제에 호랑이의 꼬리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이 강하다는 착각과 상대가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우월의식으로 국가간의 예를 무시한 결과였다. 자존심은 아무 때나 부리는 것이 아니다. [서상욱 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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