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추협 커튼콜④>김상현 ˝민주화는 우리의 생명이자 국민의 희망이었다˝
<민추협 커튼콜④>김상현 ˝민주화는 우리의 생명이자 국민의 희망이었다˝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4.06.30 1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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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공로자, 후농 김상현 단독 인터뷰
˝미국에 있던 DJ 반대해 단독 강행˝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손을 잡은 정치단체다. 그러나 민추협 탄생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DJ가 아니었다. 대신 그 자리에 서 있던 인사는 한때 DJ의 오른팔로 불렸던 새정치민주연합 김상현 상임고문이다. 한국 정치사의 산증인이자 민추협을 탄생시킨 숨은 주인공인 김 고문의 이야기는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생생한 증언을 듣기 위해 <시사오늘>이 26일 코리아나호텔 카페에서 김 고문을 만났다.

▲ 김상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전 민주당 의원) ⓒ시사오늘

-최근 근황은 어떤가.

“그냥 조용히 지내고 있다. 후농(後農:김상현의 호)청소년문화재단 활동도 지금은 하지 않고 있다.”

-민추협은 어떻게 탄생했나.

“당시 김영삼 총재가 정치탄압에 저항한다고 단식을 했다. 20일 넘게 단식을 했기 때문에 위로?격려차 병원에 방문을 했다. 그걸 계기로 해서 단식을 마친 후 상도동에서 만났는데 그때 ‘정치권이 민주화 조직을 하나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당시 재야 운동단체도 많았는데 나는 ‘운동권하고는 별도로 정치인들만의 독립적인 조직체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상도동 쪽에서는 ‘재야 쪽하고 같이 하자’그런 의견들이 많았다. 그것 때문에 열흘 간 논쟁을 하다가 결국 내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합쳐진 것이다.”

-민추협이라는 명칭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처음 제안됐던 것은 민주구국투쟁동지회였다. 상도동 쪽에서 ‘민주’하고 ‘투쟁’은 꼭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민주화운동은 행동으로 투쟁해서 되는 거지 무슨 단체명 가지고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은 좀 가볍게 지어서 군부정권 사람들 안심시켜 주고,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면 될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결국 2주도 넘게 논의한 끝에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됐다.

-민추협의 역사성은 무엇인가.

“우선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50대 50으로 구성됐다.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합의해서 결정했다. 특이한 것이, 우리(민추협)는 회칙과 정관이 없다. 선언을 하고 그걸 기준으로 매번 합의를 했기 때문에 회칙과 정관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당시 정부기관이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이 회칙이나 정관이 없으니 우리가 다음에 무슨 일을 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다음날 무슨 조직이 나올지 모른다. 민추협은 회의 때마다 뭐 발표하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조직이고 새로운 투쟁노선이었다.”

-그런데 민추협은 DJ가 해외에 있을 때 결성됐다.

“DJ는 미국에서 민추협 조직과 발족을 반대했다. 그런데 내가 독자적으로 밀고 나간 거다. 그래서 나중에 DJ와 갈등관계가 조성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공동의장은 김 고문이 아닌 DJ가 맡았다.

“상도동 측 의장은 당연히 YS였고, 조연하, 박종률, 김녹영 이런 분들이 나를 의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니까 상도동 쪽에서 故 김동영, 최형우 등이 강하게 반발했다. 어떻게 김상현 의원과 YS를 동급으로 볼 수 있냐고, 공동의장은 안 된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YS가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내가 YS를 찾아가서 말했다. 큰일을 앞두고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나를 권한대행으로 하고 DJ가 귀국하면 의장으로 추대하면 될 거 아니냐고 했다. 그랬더니 YS가 알겠다고 해서 나는 권한대행이 됐다.”

-그렇다면 반대하던 DJ는 귀국 중에 생각이 바뀐 것인가.

“아마도 귀국 후에도, 시간이 흐른 후에 바뀌었을 것이다. 소위 동교동계의 가신 그룹은 민추협 출범 때 단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동교동계 가신 그룹은 DJ가 귀국하고, 우리 집에서 YS와 같이 모셔서 공동의장으로 추대한 후에야 민추협에 참여했다.”

-DJ는 왜 민추협에 반대했던 것인지.

“자신이 국내에 없으니까 동교동계가 상도동계에 흡수될 것을 걱정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DJ는 정치적으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시 2·12 총선이 있었다. 그 직전인 2월 8일 DJ가 귀국했다. 당시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전당대회에서 결의해서 ‘김대중 귀국 환영회’를 만들었다. 환영회 위원장을 이민우가 맡고, 당 사무총장이 환영회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열렬히 환영했다. 전국 각 시도지구에 DJ 귀국 날짜와 시간이 적힌 플래카드를 걸어서 신민당 당원, 지지자들 수만 명이 다 갔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동교동서 DJ가 연금되는 바람에 접촉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내가 중간에 출입하는 사람을 시켜서 신민당에 감사하는 메시지를 주라고 했다. ‘이민우 총재를 비롯해서 신민당이 환영을 거하게 해줬으니까 고맙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전하려고 했다. 그래서 (김)홍일이에게 전화를 하는데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DJ는 민한당을 밀고 있더라. 그래서 조윤형, 정대철 등에게 민한당에 남으라고 미리 연락했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은 그래서 민한당 간판을 가지고 출마했다.”

-그해 총선에서는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켰던 것으로 안다.

“그랬다. 신민당 창당에 반대했던 DJ는 오판한 것이다. 2월 13일 새벽 6시에 동교동을 방문했다. DJ가 ‘미안하다. 신당은 2명 아니면 3명밖에 안 될 줄 알았는데 크게 오판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내가 ‘형님은 미국에 계셨으니 국내 상황에 어두울 수도 있고, 미안해할 것 없습니다’며 그렇게 위로했다.”

-DJ와 갈라선 것은 그보다도 나중 이야기 아닌가.

“결정적인 것은 1987년 대선 때다. 당시에 나는 YS와 DJ가 무조건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가 갈라지면 노태우가 이기는 건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래서 내가 YS-DJ 단일화 100만인 서명운동도 벌였다. 99만 명 정도 참여했다. 그런데 결국은 DJ가 평민당을 만들어 나갔고, 나는 그때 따라가지 않았다. 사실상 DJ와 멀어진 것은 그 때다.”

-당시 DJ는 ‘4자 필승론’을 주장하지 않았나.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당시 민주당 의원 하나가 논문을 들고 가서 DJ를 설득했다. 결과는 어땠나. 민주화가 늦춰진 거나 다름없다. YS와 DJ, 양김은 이 사안에 대해서만큼은 역사에 죄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최근 민추협의 활동은 어떤가.

“특별한 활동은 없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모임을 갖고 돌아가면서 점심 정도 하고 있다. 그리고 민추협 관련 민주기념관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 서울시와 접촉하고 있다. 서울시내 부지를 알아보는 단계다.”

-얼마 전 YS의 차남 김현철이 야당서 동작을 출마를 언급하며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메신저를 자임했다. 사전에 이야기된 적이 있는가.

“김현철 동지가 우리(동교동계)와 구체적으로 논의한 사실은 없다. 언론에 보도된 것을 보고 알았다. 다만 나 같은 입장에선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동교동계는 상도동계에 비해‘민주동지회’같은 눈에 띄는 조직이 없다. 이유가 있나.

“동교동이 개별적으로는 친하다. 조직적인 모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YS는 후계자를 많이 기른 편이고, 생존해 있는 것도 크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과거 민추협의 의의를 정리해 달라.

“민추협은 6월 항쟁을 주도하고, 6?29 선언을 이끌어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당시 민주화는 우리의 생명이었고 국민의 희망이었다. 그걸 동력삼아 정말 힘든 시기를 헤쳐 나갔고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YS, DJ 등 민추협 두 의장이 대통령을 한 것도 한국 정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줬다. 정치학자들도 한국 정치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조직이 민추협이라고 평하고 있다.”

 

담당업무 : 경제부 금융팀/국회 정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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