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철, ˝체포령만 떨어지면 우리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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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철, ˝체포령만 떨어지면 우리 집으로 왔다˝
  • 김병묵 기자
  • 승인 2014.08.13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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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에서 통일로(1)>경기 민주화 운동의 대부 신하철 전 의원
군정 종식의 숨은 공신들…˝늦게라도 보상 이뤄져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1987년 6월의 한국은 뜨거웠다. 6월 10일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정부시위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골자로 하는 결국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이는 사실상 군정의 종식을 알리는 신호였고 동시에 민주주의의 시대 개막을 알리는 계명성(鷄鳴聲)이었다.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서울 명동성당에서의 농성, 그리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의 중심인 김영삼(YS)·김대중(DJ) 등으로 대변되는 민주화 투쟁 정치인들이다.

같은 시간, 경기도에서도 안양과 수원을 중심으로 민주화의 뜨거운 불길이 타올랐다.

1987년 6·29 선언 소식을 들은 신하철 민추협 사회국장은 감격에 젖었다. 지난 투쟁의 나날과 수많은 동지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의 구술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방불케 하던 당시로 시간을 되돌려봤다. <편집자 주>

▲ 신하철 민추협 사회국장 ⓒ 시사오늘

체포령만 떨어지면 우리집으로…경기 민주화운동의 안가(安家)

경기도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인물은 신하철 전 통일민주당 의원. 경기도 의왕의 지역 유지였던 그는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사들을 숨겨주는 것은 물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며칠이고 밥을 먹이면서 재워주고, 체포된 인사들에겐 사식을 넣어주기도 했다. 아내 김정숙 여사도 아낌없이 지원과 헌신을 보였다. 그러다 여러 번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신 전 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집이 민주화 운동하는 학생들의 거점지였다. 집이 의왕에 있다. 교통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안양에서 8km떨어진 의왕 부곡역(현 의왕역)까진 차가 들어오지 않았다. 버스도 안 다녔다. 그래도 체포령만 떨어지면 무조건 우리 집으로 왔다. 아지트 역할을 한 거다. 아내가 다 도와줬다. 정말 고생 많이 했다. 갈 곳 없는 학생들, 민청련 동지들을 한 달씩 밥을 해 먹였다. 빨래도 다 해줬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여기서 잠시 신 전 의원의 아내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김 여사는 신하철 민주화 운동의 동지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약사였던 김 여사의 아버지는 독립 운동가였다. 신 전 의원은 ‘독립운동을 하던 장인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승윤 전 민청련 의장이 수배령이 떨어져서 우리 집에 한 달간 숨어 지냈다. 김 의장이 잡히고 나서 어디 있었냐고 하니까 결국엔 우리 집에 있었다고 자백했다. 그것 때문에 아내와 내가 안기부에 끌려가서 열흘정도 심문을 당하게 됐다. 그런데 아내는 끝까지 김 의장을 모른다고 말했다. 나도 결국 (김 의장에 대해)말했는데, 참 대단하지 않나.”

신 전 의원은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과 시민운동을 때론 직접 뛰고, 지원하며 이미 이름이 퍼지기 시작한 상태였다. 정계와도 연을 맺고 있던 그의 이름이 경기남부 전체에서 오르내렸다. 주 활동 무대는 안양이었다. 안산 한양대의 학생들이 학생운동을 벌이려고 하면 신 전 의원이 있는 곳으로 오기도 했다.

“민주화 운동에 앞서 시민운동부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76년 함평 고구마 사건에도 참여했다. 농협 전라남도 지부가 건고구마 대신 생고구마를 사들이겠다는 수매 방침을 발표했다. 농민들은 그 말을 믿고 고구마를 썰어 가공하지 않고 그냥 길에 쌓아 놨다. 그러나 막상 수매시기가 되자 전량 수매를 약속했던 농협이 실제로는 농민들 생산량의 4할만 수매한 거다. 나머진 다 얼어 터져서 못쓰게 됐다. 그 보상을 요구했던 운동이다. 당시 카농(가톨릭농민회)사람들과 함께 싸웠다.”

▲ 신하철 민추협 사회국장 ⓒ 시사오늘

신하철·김정태·서의석…경기 민주화운동의 삼두마차

신 전 의원의 곁에는 함께 투쟁을 전개하던 두 사람의 특별한 동지가 있었다. 한 사람은 김정태 교수고, 다른 한 사람은 서의석 씨다. 신 전 의원이 조직을 관리하고 일선에 나가 활동을 지휘했고, 김 교수는 민주주의 이론 지도 등을 담당했다. 서 씨는 점조직으로 된 재야의 시민운동을 이끄는 행동대장 격이었다.

세 사람은 생각도 조금씩 달랐고 출신도 달랐지만 따로 또 같이 경기도의 민주화운동을 추진했다.

“나와 민주화 운동을 같이 한 사람은 김정태 교수다. 김 교수는 야학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랬는데, 나랑은 구치소에서 알게 됐다. 서로 다른 곳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잡혀온 거다. 거기서 알게 된 다음에 이제 내가 먼저 출소했고 김 교수가 조금 뒤에 나와서 만났다. 그 다음부터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게 됐다. 지금은 현실정치에 실망해서 전부 접고 태국에 가 있는 것으로 안다.”

김 교수는 민주화운동 중 고정간첩으로 몰려 수원에서 체포당했다. 아침에 경찰이 집을 급습했다. 팔달로로 나가 도망치던 중 경찰이 발포한 총에 관통상을 입고 결국 끌려갔다. 당시 이를 지휘한 경찰서장 등은 발포 사실이 미안해서 김 교수를 상당히 정중하게 대접했고, 이에 화답하는 차원에서 김 교수는 총상을 입은 사실을 덮어두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김 교수는 이 모든 과정에서 신 전 의원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나중에 그 일을 물으니 “신 선배를 보호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름을 말합니까. 제가 말하면 경기도 동지들의 기댈 곳이 사라집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신 전 의원이 국회에 입성할 때 “신 의원님은 정당에서 활동하시라. 나는 갈거다”라며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북한을 이념이 없는 집단으로 판단내리고, 한국 정부에도 실망한 나머지 김 교수는 삶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이는 다행히 미수에 그쳤다.

서 씨의 경우는 갑자기 신 전 의원의 집을 찾아왔다. 신 전 의원이 경기도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있다는 소식이 암암리에 퍼지자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 온 것. 서 씨는 원래 통일원(현재의 통일부)의 사무관이었다가, 부정부패에 반기를 들며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재야의 시민운동을 이끌어 오다가 신 전 의원과 만나 의기투합하게 된 것이다. 지금기준으로는 보수에 가까운 신 전 의원과 달리 서 씨는 강경한 진보에 가까웠다. 하지만 군정종식과 민주화 쟁취라는 대명제 아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여선 안됐기 때문에 마치 독립운동을 방불케 하는 은밀한 접촉이 이뤄졌다. 신 전 의원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서의석 동지와의 접촉은 마치 독립운동처럼 이뤄졌다. 6월 항쟁 때 데모 동원자금을 전달해야 하는데 곳곳에 감시망이 깔린 거다. 어디서 누굴 만나도 안심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래서 수원-안양을 잇는 지지대고개가 있다. 지금의 1번 국도다. 거기서 차를 타고 가면서 내 돈 200만원을 전달했다. ‘어디어디에 어떤 복장으로 서 있으시오’, 그렇게 미리 약속하고 열린 차창을 통해 돈만 주고 지나친 거다. 그러고 나서 차는 빙 돌아서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왔고.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도 이야기하다가, 서로 뒤돌아서 갈 길을 갔다. 모르는 사람처럼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이후 서 씨의 행보를 말하면서는 신 전 의원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서 동지는 투쟁 중에 감옥에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안양에서 데모를 주도하다 끌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매를 맞아 다친 후유증으로 죽었다. 6·29 선언이후 세상이 어느 정도 안정될 즈음이었는데, 다방에서 계단을 내려오다 쓰러져서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 보상도 받지 못했을 거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 부인이 삼형제를 다 키워내서 대학까지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서 동지와는 사실 사상이나 이런 노선이 꼭 맞지는 않았지만, 이런 의인(義人)들은 반드시 재조명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정의를 쫓아 나온 청렴한 사람 아닌가.”

민주화는 이뤄졌지만…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신 전 의원은 이후 13대 총선에 나서 당선되며 원내에 입성했다. 본인의 정치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안양시갑을 정치신인 이인제 의원에게 내주고 대신 다소 생소한 안양시을에서 나갔음에도 압승을 거뒀다. 공천 당사자인 YS도 깜짝 놀란 결과였다. 경기도 민주화의 상징적 인사이자 대표 정치인으로 부상한 신 전 의원에게 YS는 이례적으로 초선임에도 원내부총무를 맡기기도 했다.

“양일동이 있는 민주통일당에선 정치적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경기도 10개 도당위원장과 함께 YS에게 투신했다. 이는 나중에 YS가 당권을 잡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

신 전 의원은 정계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 치열하게 싸워서 민주화를 쟁취했다. 다양한 영욕도 모두 겪은뒤 이젠 노정객(老政客)이 된 그에게 남은 아쉬움은 하나다. 민주화를 함께 이룬 동지들에 대한 것이다. 신 전 의원은 민주화 동지들에게 제대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민주화는 그 당시 시대의 소명이었다. 우리의 역할이라 생각해서 청춘을 불살랐고, 재산도 아낌없이 내놨다.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 운동에 재산을 다 털어 넣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나는 다행히 자식들도 잘 자랐고, 지금도 먹고 살 만 하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민주화 의사들이 많다. 보상받아야 할 만큼 인생이 변한 사람들도 많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시대의 소명을 이뤄 다음 세상을 연 이들에게 제대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누가 앞장서서 한국의 미래를 열려고 하겠나.”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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